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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임금을 세운 공로를 자랑하지 않은 병길과 이준경

⊙ “수고로움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것은 두터움이 지극한 것”(《주역》)
⊙ 漢나라 때 병길, 옥중의 어린 宣帝 보살피고 황제로 추대… 즉위 후에도 자신의 공로 드러내지 않아
⊙ 이준경, 선조 즉위 주도하고도 공신 책봉 거절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2019-06-11 09:48

▲ 漢나라 宣帝 때의 재상 병길은 소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陰陽의 조화를 살폈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뜻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수제자인 안회(顔回)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바람은 자신의 좋은 점이 있다 해도 자랑하지 않고[無伐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無施勞].”
  
둘 다 비슷한 의미인데 스스로를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벌(無伐) 혹은 불벌(不伐)의 문제는 공자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랬기에 수제자인 안회도 자신이 공부하는 목표가 바로 ‘무벌선(無伐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논어》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또 나온다. ‘옹야(雍也)’편이다.
  
“맹지반(孟之反)은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패주하면서 후미에 처져 있다가 장차 도성 문을 들어가려 할 적에 말을 채찍질하며 ‘내 감히 용감하여 뒤에 있었던 것이 아니오. 말이 전진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맹지반은 노(魯)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측(側)이다. 당시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씨(三桓氏) 가운데 맹씨(孟氏) 집안 사람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싸움에 패해 돌아올 때 군대의 뒤에 있는 것을 그나마 공(功)으로 여겼다. 끝까지 적과 맞서 싸우다가 가장 뒤늦게 퇴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벌이란 아주 높은 수준의 사리, 즉 예(禮)인 것이다. 공자는 《주역(周易)》을 풀이한 ‘계사전(繫辭傳)’에서 그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고로움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勞而不伐] 공로가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것[有功而不德]은 두터움이 지극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공로를 세우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것[下人]을 말하는 것이다. 다움[德]으로 말하자면 성대하고, 예 갖춤[爲禮]으로 말하자면 공손한 것[恭]이니 겸손함[謙]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임금이라면 신하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재상(宰相)으로 앉혀야 하며, 이러한 것이 일의 이치[事理=禮]다.
  
목숨 걸고 宣帝를 지켜낸 丙吉
  
병길(丙吉·?~기원전 55)은 노나라 사람으로 율령(律令)을 공부해 노나라 옥리(獄吏)가 됐다. 공적을 쌓아 점차 승진해 정위우감(廷尉右監)이 됐다. 한(漢) 무제(武帝) 말년에 무고(巫蠱)의 일이 일어나자 병길은 전에 정위감을 지냈다고 하여 불려가 무고와 관련한 군저(郡邸)의 옥사를 관리하라는 조서를 받았다. 이때 선제(宣帝)는 황제의 증손(曾孫)으로서 생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고로 일어난 여태자(戾太子) 사건으로 인해 옥에 갇혔는데, 병길은 갓난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도형(徒刑)을 받은 여자 죄수 중 착실한 한 사람을 골라, 본인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잘 기를 수 있게 조치했다.
  
병길이 무고의 사건을 맡아 살폈으나 해를 거듭해도 판결이 나지 않았다. 후원(後元) 2년에 병이 든 무제가 신병(身病) 치료차 장양궁(長楊宮)과 오작궁(五柞宮)을 왕래할 때 천지의 기운을 보고서 점을 치는 자[望氣者]가 장안의 감옥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말했다. 이에 상(무제)은 사자를 보내 도성 내 모든 관청의 조옥(詔獄)에 구금된 죄수를 파악해 죄의 경중을 가리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내알자령(內謁者令) 곽양(郭穰)이 밤중에 군저의 감옥에 도착했다. 병길은 문을 닫은 채 사자를 막고선 “황제의 증손께서 여기에 계신다. 다른 사람도 무고하면 죽이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황제의 친증손임에야!”라고 말했다. 서로 대치해 날이 샐 무렵이 돼서도 감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곽양이 돌아가 사유를 보고하고 병길을 탄핵했다. 그러나 무제도 사정을 깨닫고 “하늘이 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하고서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이 무렵 증손은 병이 들어 거의 가망이 없는 순간이 여러 번이었는데, 이때마다 병길은 의원을 보내고 수시로 약을 드리게 하는 등 증손을 아주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다
 
병길의 보호로 살아남아 天子가 된 漢 宣帝.
뒤에 병길은 거기장군(車驥將軍) 군시령(軍市令)으로 있다가 승진해 대장군의 장사(長史)가 됐는데 (대장군) 곽광(霍光)이 그를 매우 소중하게 여겨 그는 조정에 들어가 광록대부 급사중이 됐다.
  
소제(昭帝)가 붕(崩)했을 때 후사(後嗣)가 없자 대장군 곽광이 병길을 보내 창읍왕 하(賀)를 맞아들이게 했다. 창읍왕은 즉위했으나 행실이 음란해 폐위(廢位)됐다. 곽광은 거기장군 장안세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누구를 옹립할지 토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길은 곽광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삼가 엎드려 뭇 백성의 말을 듣고 그들이 한 말을 헤아려보건대 제후와 종실의 반열에 오른 분 가운데 백성들로부터 평판이 그리 좋은 분이 없습니다. 무제께서 잘 양육하라고 유언을 남기신 증손 병이(病已)라는 분이 외가에서 자라다가 현재 액정(掖庭)에 들어와 계십니다. 신이 과거 군저에 사자로 파견돼 있을 때 어린 그분을 뵈었으니 지금은 열여덟에서 열아홉 살이 되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경술에 통달하고 훌륭한 자질을 소유했으며, 처신이 점잖고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 상세히 의논하시고 점괘를 참조하셔서 그분을 높이고 현창해 먼저 궁궐에 들어가 태후를 모시게 한 다음 천하에 분명하게 알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곽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침내 무제의 증손을 옹립하고자 종정(宗正)인 유덕(劉德)과 병길을 보내 증손을 맞아들이게 했다. 선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병길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선제는 어릴 때 자신을 보호해준 인물이 병길임을 몰랐다.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는 그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했다.
  
“병길은 사람됨이 깊고 두터웠으며[深厚] 자신의 잘남이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不伐]. 황증손(선제)을 만나면서부터 입을 굳게 닫고[絶口] 예전에 베풀었던 은혜를 말하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알 수가 없었다.”
  
승상의 직무
  
한참 세월이 흘러 액정의 궁비(宮婢)인 칙(則)이 민부(民夫)를 시켜 황제를 잘 키운 공로가 자신에게 있다고 상주문을 올렸다. 그 상주문을 액정령에게 내려보내 조사를 시키자 궁비 칙은 당시에 옥사를 관리한 사자(使者) 병길이 당시 상황을 잘 알 것이라며 길을 끌어들였다. 액정령은 칙을 데리고 어사부로 가서 병길과 대면시켰다.
  
병길은 칙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너는 과거 황제의 증손을 양육할 때 정성껏 보살피지 못해 매질을 당하는 벌을 받았거늘 무슨 공이 있다고 하느냐? 위성(渭城)의 호조(胡組)와 회양(淮陽)의 곽징경(郭徵卿)만이 은혜를 베풀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병길은 호조 등이 황제를 보살핀 실상을 파악하여 상주했다. 선제는 길에게 호조와 곽징경을 찾도록 조칙을 내렸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선제는 친히 병길을 불러 만나본 후, 길이 옛날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그가 크게 뛰어난 인물[大賢]이라 말했다.
  
조신한 처신으로 마침내 승상에 오른 병길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여기서도 남다르게 일의 이치를 살필 줄 알았던 그의 면모가 보인다.
  
〈한번은 승상 병길이 외출하다가 승상의 행차를 위해 깨끗하게 치운 길에서 떼를 지어 싸우는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사상자들이 길에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었다. 그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뿐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지도 않자 소속 관리는 의아하게 여겼다. 또 그가 앞서가다가 어떤 사람이 잃어버린 소를 쫓아가는 장면과 마주쳤는데 그 소가 헐떡이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수레를 멈추게 하고 관리를 시켜 “소를 몰고 몇 리를 왔느냐”고 묻게 했다. 소속 관리는 속으로 승상의 질문이 앞뒤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를 비꼬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싸우다가 서로 살상한 것은 장안령(長安令)과 경조윤(京兆尹)이 금지하고 경비하며 체포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승상은 연말에 그들을 고과(考課)해 상벌을 시행하면 그만이다. 승상은 직접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길에서 묻는 것은 옳지 않다. 봄에는 소양(少陽)이 용사(用事)하므로 심하게 덥지 않다. 가까운 거리를 가는 소가 더워서 헐떡이는 것은 계절의 기운이 절도를 잃은 징표이므로 해(害)가 닥칠까 두렵다. 삼공(三公)은 음양의 조화를 담당하므로 직분상 마땅히 염려해야 할 일이다. 이 때문에 물은 것이다.”
  
소속 관리는 그 말을 듣고 감복하고 그가 정치의 큰 요체[大體] 잘 안다고 인정했다.〉
  
滅門之禍 당한 집안 출신 영의정 이준경
  
오랜 폭정(暴政)이 난무하면서 썩어 문드러진 명종(明宗) 시대를 지나면서도 인재는 남아 있었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말 그대로 진흙탕 속의 진주였다.
  
이준경은 세조와 성종 때 크게 번성했던 광주 이씨의 후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그의 나이 6세 때, 즉 연산군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준경 형제도 함께 유배를 갔으나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록은 “준경은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비범하였으며 체격이 웅대하여 많은 선비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다소 늦은 중종26년(1531) 문과에 급제해 주로 홍문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533년에는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禍)를 당한 사림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어 5년 동안 독서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강직하기로는 그의 형 이윤경(李潤慶·1498~1562)이 한 수 위였다. 두 사람 모두 관리로서 청렴과 엄중함이 뛰어나 두 봉황새라는 뜻에서 ‘이봉(二鳳)’으로 불렸다.
  
1537년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강직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이 설쳐대던 명종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명종3년에는 요직인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한때 윤원형과 가까운 이기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이듬해 풀려났고, 그 후 형조·병조·이조·공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다. 명종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을 때는 도순찰사를 맡아 성공적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우찬성에 올랐고 이후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년)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이른다.
  
명종의 죽음
  
임금이되 어머니 문정왕후로 인해 임금이지 못했던 ‘눈물의 왕’ 명종은 승하 직전인 1567년(명종22년) 6월 24일 자신의 병환에 대해 신하들에게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내가 본래 10여 년 동안 심열이 있어 왔는데 또 도진 듯하다.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때가 되면 으레 서열(暑熱)이 서로 도와 위로 치밀어 몸이 대단히 편치 않다. 세자의 상(喪)을 당하던 계해년부터 5년 동안 시름시름 앓았고, 모후의 상을 당했던 을축년 가을에는 큰 병을 앓다가 겨우 회복되었는데, 지금 역시 일에 있어 총명이 감한 듯하며, 내 기운이 전보다 아주 다르게 허약해졌다. 이달 초에 또 열 증세가 있기에 즉시 냉약(冷藥)을 복용했고, 일기도 시원해서 불안한 기운이 조금 덜해졌기 때문에 부묘하는 대례를 억지로 행하였다. 그 후에 마침내 노열(勞熱)이 나고 백 가지 병이 뒤섞여 일어났는데, 천식 증세도 있어 요즈음 편치 못한 지가 여러 날째인데도 조금도 차도가 없다.
  
조사(朝使·명나라 사신)가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니 내 마음속으로 걱정된다. 예전 조사가 올 때에는 미리 기일을 알았기 때문에 위에서 여러 차례 대내에서 습의(習儀·의례를 갖추다)를 했는데 지금은 내 기운이 계속 편안치 못하여 지난번 단지 한 번 환시(宦侍)로 하여금 습의하게 했을 뿐 친히 해보지 못했다. 또 무오년(1558)에는 기력이 아직 강해서 다릿심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서서 말을 할 수도 있었고, 중국 사신과 술을 나눌 때에도 별달리 잘못된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이미 10년이 지나서 몸에 병이 많고 심신이 어두워지고 기력도 전과 다르며 다릿심도 지난날 같지 않다.”
  
결국 명종은 나흘 후인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훙(薨·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한 불운의 군주였다. 묘호는 명종이었지만 실은 암군(暗君)이었다.
  
임금 추대하고도 功臣 책봉 거부
  
사태는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심야부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 11시경 중전이 두 정승과 약방제조(藥房提調)를 불렀다. 당시 우의정 권철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고 영의정은 이준경, 좌의정은 이명이었다.
  
그러나 영의정과 좌의정 두 사람은 궐내에 없었고 약방제조 심통원만이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양심당에는 얼마 후 심통원과 병조판서 원혼, 도승지 이양원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얼마 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해 좌승지 박응남,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나마 이준경은 의정부에서 유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의 미묘함에 대해 사관은 아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만일 이준경의 입시가 늦었으면 중전과 약방제조이자 중전의 작은 할아버지인 심통원만이 유명(遺命)을 받게 되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소인(小人·심통원)이 그사이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준경이 들어왔을 때 아직 명종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준경은 중전에게 하교(下敎)를 내려주기를 청했고 중전은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지난 을축년에 하서(下書)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경들 역시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을 후사로 삼겠다는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다. 결국 영의정 이준경이 을축년의 하서를 근거로 중전의 승인을 받아 하성군 이균을 다음 국왕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명종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한다.
  
“이준경은 평소 중망(重望)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모두 하는 말이 ‘이때에 이 사람이 있으니 나라가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할 자가 정해지자마자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던 것은 다 이준경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공이었다.”
  
이때 일부에서는 “신하가 임금을 추대한 것은 비상한 일”이라며 공신 책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이준경에 의해 일축당했다. 예종(睿宗)이 죽고 성종(成宗)이 즉위했을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책봉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준경의 공은 좌리공신들에 비해 훨씬 컸다는 점에서 이준경 또한 불벌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산새”
 
퇴계 이황.
그는 이황(李滉)의 선배이기도 했다. 선조 집권 초 이런 일화가 있다. 이준경의 도움으로 선조는 집권했다. 이제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는 임무는 전적으로 영의정 이준경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이준경은 가장 먼저 이황을 선조의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전수하려 했다. 이황을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除授)했다. 그러나 이황은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했다. 자신은 병약하고 현실정치를 모른다는 이유였다. 계속되는 강청에 결국 이황은 한양으로 올라온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이황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들이 아침저녁으로 그의 문전을 찾아가니, 이황은 한결같이 모두 예(禮)로 접대하였다. 최후에 이준경을 찾아가 인사하자 이준경은 “도성에 들어오신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제야 찾아오십니까?”라고 했다. 이황이 “사대부들을 응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고 했다. 이준경이 언짢아하며 “지난 기묘년(己卯年)에도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염소 몸에 호랑이 껍질을 뒤집어쓴 자가 있었으므로, 사화가 이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조정암(趙靜庵·조광조) 이외에 그 누구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고 말하였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에 대한 경고의 말이었다. 그 의미를 이황이 모를 리 없었다. 그 후에 다시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찾는 선조에게 이준경은 “그 사람은 산새[山禽]이니 더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등록일 : 2019-06-11 09:48   |  수정일 : 2019-06-1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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