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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위·변조의 세계

⊙ 전문가들의 의견도 갈리는 서예 위·변조
⊙ 시대별 書體의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
⊙ 일제강점기 《명가필적집》에 나타난 위·변조 사례
⊙ 조선시대에도 많았던 비슷한 이름 이용한 ‘혼동’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2019-06-05 09:24

▲ 2014년 10월 서울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추사정화전’을 찾은 시민들이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 photo by 뉴시스
“평생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보관한 충무공 글씨가 위작(僞作)이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집중해왔다. 숨겨진 충무공 자료를 찾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기에 충무공 글씨를 감정해달라는 의뢰 역시 많이 받는다. 노 소장은 “집안에서 내려온 글씨라고 하더라도 위작이 많다”며 난처한 경우 대처 방안을 알려줬다. 
  
“진짜라면 그냥 진짜라고 하겠지만, 가짜일 경우 정말 난처해요. 확신이 들지 않으면 다른 분에게 감정을 받아보라고 해요. 괜히 가짜라고 했다가는 욕만 먹죠.”
  
진짜를 찾아내는 방법을 묻자, “확실한 진짜인 《난중일기》와 서·간첩의 글씨를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글의 내용과 글씨 형태를 확인하고, 사용된 종이가 임진왜란 당시 것인지도 유심히 본다”고 했다. “가짜는 필획(筆劃)이 맞지 않거나, 편지 내용이 틀린 경우가 많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화재 가운데 글씨의 경우 감정이 특히 어렵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노 소장은 “대학에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진짜 고문서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감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보는 눈의 수준 차이도 크기 때문에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양한 분쟁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충무공 《난중일기》. 사진=뉴시스
지난 4월 3일 전남 고흥군은 전임 군수 시절 사들인 윤봉길 의사의 유묵(遺墨)을 가짜로 결론지었다. 2015년 11월 분청문화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구입한 윤봉길 의사의 유묵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은 결국 가짜로 판명된 것이다.
  
고흥군은 2015년 11월 25일 유묵 매도자 이모씨와 윤봉길, 안중근, 안창호, 김구 선생 등 항일 애국지사 6인의 글씨, 족자, 시문, 서첩 등 6점을 10억원에 유물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으로 4억원을 지급한 고흥군은 잔금 6억원을 2017년 3월까지 나눠 지불하기로 했다. 유묵 계약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에서는 위작 시비와 예산 낭비 논란이 일었고, 고흥군은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유묵을 판 이씨는 2016년 10월 광주지법에 유묵 매도대금을 지불하라며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에서 진위를 가리게 되었다. 고흥군 역시 6점의 유묵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밝혀내기 위해 재판부에 재감정을 신청했다.
  
일단 윤봉길 유묵은 확실하게 가짜로 결론이 났지만 나머지는 의견이 갈렸다. 지난해 9월 유물감정 전문가 3명에게 감정 의뢰한 결과, 윤봉길 유묵 1점은 만장일치로 ‘가짜 판정’을 받았다.
  
문제는 나머지 유묵 5점이었다. 2명은 가짜로 판정했고 1명은 진짜로 판단했다. 광주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16일 매매대금 지불 청구 소송에서 “윤봉길 의사 유묵은 진품이 아니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다만 재판부는 이씨가 고흥군에 요구한 매매대금 6억원 중 1억3000만원만 인정하고 고흥군에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이에 고흥군은 “나머지 유묵도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며 바로 항소했다. 이와 별도로 고흥군은 지난해 10월 이씨에게 유묵 판매 계약금으로 줬던 4억원을 돌려달라며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수요가 많을수록 위작도 많아
  
이렇듯 서예 작품은 일단 진위 논쟁이 시작되면 진흙땅 싸움이 되곤 한다. 서예 작품만큼 위작 논쟁이 뜨거운 분야도 없다.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수결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 결론이 나지 않고 논쟁만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고문헌 전문가 박철상씨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군 장성 출신 집을 방문했는데, 충무공의 글씨를 가지고 있었어요. 과거 자신이 모시던 상관에게서 받은 글씨라며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위작이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믿으려 하지 않더라고요.”
  
이러한 위조를 찾아내는 것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학문의 기본이기에 중요하다. 박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문학 연구의 시작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책을 읽는 것이죠. 그런데 그 책이 가짜면 어떻게 되겠어요. 가짜 책을 보고 쓴 논문은 당연히 의미가 없는 것이죠.”
  
위작 논쟁이 뜨거운 작품은 보통 가지고 싶어 하는 수요가 많은 작품이다. 추사 김정희, 충무공 이순신, 다산 정약용 등의 작품이 그러하다.
  
충무공 글씨의 경우 억대에 거래된다. 당연히 돈을 노린 가짜가 만들어진다.
  
완벽한 위조가 가능한지 묻자, 박씨의 대답은 이러했다.
  
“20대부터 아무리 영어 공부를 많이 해도,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영어로 생활한 사람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글씨 역시 비슷해요.”
  
서예 글씨가 일상이었던 시대에 수백만 번 자연스럽게 쓰면서 닦인 서체를 현대인들이 아무리 익힌다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나아가 “시대별로 서체(書體)에 흐름이 있다”며 “현대인이 일제시대인 100년 전의 사람들과 같은 글씨를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글씨를 제대로 보는 ‘안목(眼目)’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안목의 중요성에 대해 박씨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해줬다. 
  
“어느 유명인사의 집을 방문했는데, 벽에 편지 하나가 걸려 있었어요. 추사 김정희 글씨라고 하더군요. 그건 추사 제자 조희룡의 글씨였어요. 평생 조희룡 글씨를 추사 글씨라고 생각했으니, 진짜 추사 글씨를 봐도 구분하기 힘들죠. 진짜를 많이 봐야 안목이 생기는 이유죠.”
  
일제시대부터 본격적 위작 나타나
  
우리 문화재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한 때는 일제강점기다. 골동품, 서화, 고문서 등이 수집과 판매의 대상이 되었다.
  
단지 돈뿐이 아니라 나라가 사라진 현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일제시대에 위작들이 대거 등장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이 망하니, 국가의 기강과 정체성이 흔들린 것도 영향을 미쳤어요. 감히 충무공 글씨를 위조할 생각을 못 하다가 돈이 되니까 글씨 좀 쓸 줄 아는 사람들이 가짜 글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죠.”
  
일제시대는 본격적인 서예 위·변조의 문이 열린 시기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방식은 아직도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명가필적집(名家筆蹟集)》은 이러한 일제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옛사람에게 편지는 일상이었다. 생각이 글로 남겨져 영원히 전달되기에, 옛사람들은 편지를 수집했다. 편지를 모은 간찰집(簡札集)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편지에는 문학적 내용뿐만 아니라 일상의 잡다한 이야기가 녹아 있다. 명문 집안의 경우 조상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간찰집 《명가필적집》은 조선총독부가 1910년에 구입한 것이다. 《명가필적집》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219명이다. 시대별로는 정몽주로부터 시작해 19세기 인물까지 망라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명가필적집》을 간행하면서 박철상씨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간철집에 일부 위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박씨의 의견은, 새롭게 간행된 《명가필적집》에 ‘명가필적집에 보이는 위작의 사례’라는 제목의 글로 실렸다.
  
보통 위작으로 판정이 되면 가치가 없다고 본다. 박씨의 주장에 따르면, “위작 자체도 중요한 연구 자료다”며 “향후 위작을 판별하는 데 참고 자료로 사용될 수 있어 《명가필적집》은 가치가 있다”고 했다. 또 “100년 전 위작을 만들던 방법이 아직도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그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의 문화재를 무차별로 수집했어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명가필적집》이 나온 것이죠. 일부 위작이 있지만, 《명가필적집》의 가치는 인정해야 됩니다. 위조의 방법이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죠. 특히 초서 작품이 많아 초서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그대로 모방하는 ‘위조’
  
보통 위작이라면 위조(僞造)를 생각한다. 원본을 보고 임서(臨書·글씨본을 보면서 따라 씀)하거나 모사(模寫)한다. 처음부터 오래된 종이를 사용하거나 인위적으로 변색시키기도 한다. 임진왜란 시대의 종이와 먹을 이용해 위조하는 경우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개인별 서명에 관심이 있었다. 인명사전에 개인별 서명을 수록한 경우까지 있었다. 위작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위작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즈음 도장의 경우 100%에 가까울 정도로 위조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의 서명을 중요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전문가들은 서명도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참고 자료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박철상씨가 《명가필적집》에서 위조 사례로 든 작품은 이렇다. 
   
〈조태채(趙泰采·1660~1722)의 편지다. 종이도 후대의 것이지만 서체 또한 활달한 맛이 없고 자연스럽지 못하다. 초서를 쓰는 솜씨도 어설프다. 한눈에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오세창이 엮은 근묵(槿墨)에도 조태채의 간찰이 실려 있다. 둘을 비교해보면, 두 편지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위조의 경우 안목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안목은 사람마다 다양해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안목의 수준이 다양해 다수결로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흔히 결론이 나지 않고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다.
  
일부 수정하는 ‘변조’
 

가짜라고 하면 위조를 생각하는데, 이미 있는 글씨의 일부분을 수정하여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변조(變造)가 더욱 많다. 변조의 경우 편지 내용은 바꾸지 않기 때문에 발신자의 행적을 편지 내용과 비교하면 변조된 간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명가필적집》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1〉은 임상원(任相元·1638~ 1697)의 편지로 되어 있다. 계축년(癸丑年·1673)에 쓴 편지인데, 편지 글 중에 ‘제작추조실인지상(弟昨秋遭室人之喪·저는 지난가을에 아내의 상을 당했습니다)’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대로라면 임상원은 1672년 가을에 아내의 상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임상원의 아내는 임상원이 죽은 뒤 8년이 지난 1704년에 사망했다. 또 끝에 쓴 이름에서 ‘상(相)’자는 지운 뒤에 다시 쓴 것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2〉는 홍석보(洪錫輔·1672~ 1729)의 편지로 되어 있다. 홍석보는 1729년에 사망했는데 이 편지를 쓴 때는 경술년(庚戌年)이다. 경술년은 홍석보의 생애에서 1670년과 1730년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홍석보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름 ‘석(錫)’자의 수정 흔적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편지를 변조한 것이다.
 

〈사진3〉은 이복원(李福源·1719~ 1792)의 편지로 되어 있는데 신축년(辛丑年)에 쓴 것이다. 이복원의 것이라면 1781년에 쓴 것이 된다. 그런데 이 편지의 피봉(皮封·겉봉)에 보면 ‘완백사장(完伯謝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전라도 관찰사가 1781년에 보낸 답장이라는 의미다. 전라 관찰사는 ‘완백(完伯·完州 등의 이름에서 유래)’으로 불렸다. 1781년에 전라도 관찰사는 이원복이 아니라 박우원(朴祐源)이었다. 박우원은 이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이름 우원(祐源)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祐)자의 보일 시(示) 변을 그대로 둔 채 오른쪽 부분만 수정하여 복(福)자로 바꾸고, 원(源)자는 그대로 둠으로써 이원복의 편지로 둔갑했다.
  
〈사진4〉는 조정만(趙正萬·1656~ 1739)의 편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글씨체를 보면 분명히 남구만(南九萬)의 글씨다. 남구만의 편지를 변조한 것이다. 즉 구만(九萬)의 구(九)자를 정(正)자로 변조하여 조정만의 편지로 둔갑시킨 것이다.
  
애매하게 속이는 경우
 

요즈음에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다. 조선시대 역시 비슷해, 같은 이름의 사람이 여럿이었다. 예를 들어 ‘이순신’이라는 이름도 여럿이었고, 후대로 넘어오면서 마치 충무공의 글씨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름이나 호(號)가 동일한 경우가 그렇다.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혼동을 주는 경우다. 다음은 그 예이다.
  
〈사진5〉는 이직(李稷)의 편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편지글 중에 ‘석담서원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는 일’이란 문구로 보아 조선중기 이후의 편지로 보인다. 석담서원은 조선중기에 세워진 서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름을 보면 직()으로 되어 있어, 이직의 이름과는 다르다. 이 편지는 이름이 비슷한 조선 중기 인물의 편지를 가져다가 고려말 인물인 이직의 편지로 바꾼 것이다.
  
〈사진6〉은 차운로(車雲輅)의 편지라고 되어 있다. 글씨는 남구만이 분명하다. 운로(雲路)는 남구만의 자(字)이다. 운로(雲路)를 의도적으로 운로(雲輅)로 판독함으로써 남구만의 편지를 차운로의 편지로 둔갑시켰다.
     
이렇듯 위조, 변조, 혼동의 방법들은 아직도 글씨 위조에 쓰이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변용되고 있다.
  
누구나 진짜를 가지고 싶어 한다. 문화재의 경우 진위 판정을 위한 안목을 기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한국의 불투명한 검증시스템도 문제다. 아직 공신력 있는 감정기관이 없는 탓에 명성이 있는 전문가 개인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법원에 나가서 특정 작품이 위작이라고 증언할 경우, 해당 작품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측에서 법적 공격이 시작될 수 있다. 시달릴 것이 당연한데 소신껏 이야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논쟁하면서 결론이 나오는 분위기가 중요한 이유다.⊙
등록일 : 2019-06-05 09:24   |  수정일 : 2019-06-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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