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히식스(HE 6)! 뭐든 다 할 수 있죠?

글 | 이상문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5-23 18:10


‘갬성(감성)’이 대세다.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해시태그(#)를 입력해보면 ‘갬성’이란 단어 하나로 관련 포스팅이 100만 개를 훌쩍 넘어선다. 갬성사진, 갬성글귀, 갬성맛집 등 유관 키워드도 풍년이다. '복고감성’도 한 축이다. ‘레트로’, ‘뉴트로’라는 키워드가 복고 트렌드를 대변하고 있다. 패션과 뷰티는 물론 방송 예능 프로그램 곳곳에서 복고 아이템들이 등장한다. 근래엔 TV조선 프로그램‘ 미스 트롯’이 종편 시청률로선 경이적인 18%를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감성의 회귀는 해당 연령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래 묵은 것들은 젊은 세대의 감성도 이끌어내는 뭔가가 있는 듯하다. 
 
60~70년대 대중음악을 주름잡던 밴드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기타에 미치고 드럼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내로라하는 절정의 보컬도 있었다. 다변화되고 화려해진 요즘 음악에 꿀리지 않는 순수한 열정이 있었노라고, 그들도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합동공연을 했던 히식스(HE 6), 데블스, 딕훼밀 리가 그 예다. 멤버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정통 밴드 ‘히식스’를 만났다. 60~70대 5인조 밴드 히식스는 매주 하루씩 잠실 연습실에 모여 3시간 이상 연습에 몰입한다. 리더인 조용남(73. 베이스 기타) 씨는 히식스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산 증인이다.
 
조용남의 음악인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숨어있던 싹수까지 찾아낼 수 없었지만 본격적인 사건은 그 무렵 시작됐다.
“2학년 때 내가 친구들 부추겨서 시작된 거죠. 조경수(배우 조승우의 아버지)랑 가까웠는데 걔가 트럼펫 불고 다니던 애야. 당시엔 비틀즈에 환장하던 시대였는데 그런 음악을 나도 하고 싶었어요. 경수한테 ‘너, 만날 트럼펫만 불고 있으면 폐병 걸린다’고 으름장도 놓고 꼬시기도 해서 밴드를 결성했죠.”
 
3명을 ‘꼬셔서’ 4명으로 결성한 밴드 이름은 ‘고고스’였다. 고고춤을 뜻할 수도 '가자! 가자!'라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중요치 않았다. 빨리 음악을 하고 싶은 혈기만 꽉 차올랐다. 서울시민회관 정문 바로 앞이 음악학원이었다. 연습이 시작됐다. 길 건너 시민회관 소강당이 ‘록커 신중현’ 선배의 사무실이었다. 마음이 급했던지 ‘중현 형님’한테 레슨도 받기로 했다. 두 달 열심히 달리니 익숙한 레퍼터리 4곡이 만들어졌다.
 
“부푼 꿈을 안고 기지촌으로 갔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미8군 기지 근처 클럽을 전전하며 살아남기 위해 연습하고 연주하고 연습하고 연주하고 맹렬하게 지냈죠. 하숙집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요. 주인 할머니가 그 시간에 도시락을 만들어 문을 두드리고 ‘학생, 학교 가야지~’하면 안 일어날 수가 없어요. 문산 선유리에서 서울로, 매일 그렇게 등교하며 살았어요. 시골미니버스 뒷좌석에 타고 문산역까지 10리길을 나와야 하는데, 기차 갈아타고 서울역 도착해보면 머리에 혹이 여기저기 불거져 있었죠. 자면서 오니까 이리저리 부딪치는 거야. 아프면서도 웃음이 났던 기억이 생생해요.”
음악을 하는 데다 먼 길을 그렇게 어렵게 다니고도 개근상을 받았다.
 
대학 원서를 쓸 무렵엔 지방에서 흥행하던 쇼 극단에게 당한(?) 기억도 있단다. 크게 내키지도 않았지만 원서접수와 시험도 있어 일정 자체가 안 맞았다. 비행기라도 태워서 중간에 보내줄 테니 걱정 말라는 꼬임에 빠졌다. 전라도 순회공연에 합류했다가 기약 없이 그대로 눌러 앉게 됐고, 시험은 수포로 돌아갔다. 상처와 반감이 컸던지 음악을 쉬고 학교생활에만 집중했다. 
 
본문이미지
히식스 리더 조용남 씨. 팀내 최고령으로 히식스의 뿌리다. 밴드의 멋과 맛을 포기 못 해 무대에 복귀했다. 70대에도 '다 할 수 있다'는 열정과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절 ‘종로바닥’은 몇 안 되는 서울의 대표적 다운타운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수많은 사람이 만나니 얽힌 인연도 운명도 가지가지. 그 역시 이날 운명이 또 바뀌었다. 길에서 우연히 신중현을 다시 만난 것. 타다 남은 불씨에 기름을 붓듯 ‘넌 음악 안 하고 뭐하냐?’는 핀잔과 함께 제안이 들어왔다. 한사코 안 하겠다고 했다지만 마음은 이미 그쪽으로 접혀가고 있었다. 방학 때만 하기로 타협점을 찾았다. 조용남식 표현으로 ‘코 꿴 날’이었다.
 
신중현이 속한 기획사 화양엔터테인먼트에서 다시 음악활동이 시작됐다. 당시엔 이미 신중현의 곡 여러 개가 당대의 유명 가수들에 의해 공연될 정도로 유명세가 있었다. 그러나 조용남은 결국 신중현과 결별하게 된다.
“음악 참 잘하는 형님이었죠. 배운 것도 많고. 그런데 성향은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개런티도 들쭉날쭉인 것도 불만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평소 다른 밴드팀을 눈여겨 봐두었다. 매년 치루는 사내 오디션 날, 식당에 모인 그들에게 용기 내어 제안했다. 뜻 맞고 실력 있는 친구들로 팀을 새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걱정과 달리 ‘찍어놓은’ 그들이 모두 이심전심이었다. ‘역적’ 소릴 들어가며 소속사를 옮긴 대사건이었다. 
 
이후로 다섯 명의 멤버가 망원동 집에서 연습, 이태원 클럽에서 공연하는 나날이 일상화됐다. 스물한두 살 무렵이었다. 해병대 군악대 출신인 클럽 사장이 단골인 AFKN 관계자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그들이 본국(미국) 휴가를 갈 때마다 최신 히트 음반을 사다 달라고 졸랐다. 잘 나가는 음반을 구입해 특히 잘 나가는 곡들에 동그라미를 쳐 전해준 그들 덕에 더 신이 났다.
 
운명은 또 한 번 그들을 흔들었다. 1968년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 기타를 맡던 멤버가 이민을 가게 된 것. 떠나기 전 오비스캐빈에서 고별공연을 열었다. 멤버들이 헤어지는 마당에 연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오비스캐빈의 섭외가 집요하게 들어왔다. 이듬해에 조용남은 멤버를 보강해 'HE  6'라는 이름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된다. 
“이태원 다운타운에서 밀키스라는 팀에 노래 잘 하는 친구 있어서 스카웃했는데, 단짝인 기타리스트와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는 거예요 .싱어만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영입했죠. 그래서 그날부터 ‘HE 6’가 된 거예요.”
애초에 ‘히식스’의 'HE'라는 이름은 'She 5'에서 비롯됐다. 화양엔터테인먼트를 박차고 나올 무렵, 미국 국무성이 유명 걸 밴드인 'She 5'를 초청해 공연을 마련했던 적이 있었다. 연주와 보컬, 퍼포먼스에 매료되어 ‘우리는 HE로 하자!'가 되었던 것.
 
활발하던 밴드열풍이 점차 식어간 건 7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엔 대마초 파동 등으로 대중예술, 특히 밴드가 기울었고 무대도 줄었다. 잘 나가던 밴드들이 반주클럽으로 전락하는 분위기였으니 해체된 밴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히식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용남 씨는 음악을 접은 뒤 80년대 초 한동안 외식사업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낭패. 하릴없이 쉬다가 전 밴드 멤버가 오픈한 재즈아카데미에 취업(?)하기도 했다. 임원으로 10여년 일하고 은퇴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건 별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료들이었다. 이 무렵 마음의 결이 또 달라짐을 느꼈다. 

“나이가 들어가니, 돈을 벌기보다 우리가 즐기기 위해서 다시 모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어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가 다가온 실버시대의 마중물이 되고 싶기도 하고...(웃음).”
 
본문이미지
60~70대 '젊은 오빠'들로 구성된 히식스가 잠실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좌로부터 남상구(보컬, 세컨드 기타), 리더 조용남(보컬, 베이스 기타), 백천남(드럼), 최훈(퍼스트 기타), 김영태(키보드).

사실은 더 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밴드 멤버 중 한 친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중견 회사를 임원으로 은퇴한 뒤 얼마 안 돼 암이 발병했다. 아내를 먼저 보낸 터라 더욱이 쓸쓸했던 그 친구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죽는 날까지 음악만 하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절절한 그의 소망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들은 다시 사람을 모으고 악기를 닦았다.

여기에 작곡 · 작사가인 김희갑 양인자 부부도 힘을 보탰다. 실버들을 위한 위로곡이자 행진곡 ‘다 할 수 있어’를 만들어주었다. 나이 칠십 넘어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내용. 현 멤버 중 유일한 70대인 ‘용남이’를 위한 선물이다. 데뷔 때 첫곡을 주었으니 마지막 곡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던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선배부부의 성의였다.  
 
매주 화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연습하고 뒤풀이로 간단한 저녁을 먹은 뒤 헤어지는 사람들. 멤버들은 ‘우리가 참 합이 잘 맞는 것 같다’고 서로 부추긴다. 하지만 리더 조용남은 농반진반으로 기자에게 볼멘소릴 전한다.
“사실 연습을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 되는데... 나이들 먹었다고 연습들을 예전만큼 많이 안 해. 쪼인트를 까야 되는데 워커가 없어요. 하하하.”
 
음악엔 정년이 없다. 음악 속에서 그들은 아직도 팔팔하다. 머리 희끗한 장년들의 수준급 연주와 보컬은 5월 25일 인사아트홀, 6월 15일 삼익아트홀, 6월 29일 인사아트홀, 11월 7일 국립극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등록일 : 2019-05-23 18:10   |  수정일 : 2019-05-25 11:32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NS 로그인
  • 페이스북 로그인
  • 카톡 로그인
  • 조선미디어 통합회원 로그인
  • pub 로그인
댓글을 입력해주세요.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