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유리왕과 황조가(黃鳥歌)의 주인공 치희

⊙ 유리왕이 흰 노루를 잡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아름다운 여인’과의 만남을 비유한 것일 수도
⊙ 유리왕, 골천 지방 토호의 딸 화희 등쌀에 떠난 漢人 치희를 그리며 〈황조가〉 지어
⊙ 유리왕이 치희를 데려오지 못한 것은 유리왕의 미약한 왕권과 우유부단함 보여줘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글 | 염광용 소설가 2019-05-10 09:34

▲ 고구려 장천1호분 벽화. 고구려 귀부인의 외출 모습을 그렸다.
노랫말이 오래도록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며 불리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대를 불문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감성적 매력까지 함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조동일 교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한국문학통사》에서 고대(古代)가요에 대한 그 존속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그런데 흔히 고대가요라고 하는 〈구지가(龜旨歌)〉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 같은 것들은 긴 노래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지만, 고대문학으로서 주목할 만한 구실을 했기 때문에 자료가 남을 수 있었고, 계속 논란이 되는 문제점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 중에서 〈구지가〉는 가락국 건국신화에 소개되고 있으므로, 그 의미가 어찌 되었든 백성들이 즐겨 불러 잊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國歌)처럼 나라의 큰 행사 때는 모두가 합창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공무도하가〉
 
국립국악원의 음악극 〈공무도하〉. 백수광부가 강을 건너려는 것을 아내가 만류하고 있다. 사진=국립국악원
그런데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는 건국신화에 나오는 〈구지가〉처럼 국가적인 행사에서 불리는 노랫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전해지고 있다. 과연 그 노랫말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노랫말의 공통점은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영원한 주제이면서 감성의 카타르시스를 촉발시키는 도체(導體)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노랫말들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속성은 전달력인데, 주제가 모든 이의 가슴을 울리는 사랑이다 보니 더욱 강력한 접합에 가속도까지 붙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공무도하가〉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일반인인 데 반해, 〈황조가〉는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과 관련이 있다. 두 노랫말 다 안타까운 ‘사랑의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 〈공무도하가〉는 이별의 원인이 죽음에 있는 데 반해, 〈황조가〉는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떨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이별이라는 점에서 다른 속성을 지닌다.
  
〈공무도하가〉의 유래다.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치광이 사내가 강물에 뛰어들자, 그의 아내가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고, 그 슬픔에 공후(箜篌)를 타며 노래를 지어 부르다 남편을 따라 강물로 뛰어들어 같이 물에 빠져 죽는다. 그것을 목격한 곽리자고(霍里子高)라는 뱃사공이 자신의 아내에게 말하자, 그 아내가 너무 슬퍼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것이 다시 이웃으로 전해지고 〈공무도하가〉로 남았다.
  
〈님더러 물 건너지 말래도, 님은 건너고 말았네(公無渡河, 公竟渡河)
물에 빠져서 죽었으니, 님을 언제 다시 만날꼬(墮河而死, 當奈公何)〉
  
이러한 〈공무도하가〉에 반해 〈황조가〉는 좀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리왕과 한인(漢人)의 딸 사이에 얽힌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흰 사슴과 봉황
  
유리왕(‘유리명왕’이라고도 함)은 추모왕(주몽)이 죽고 나서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 왕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과 결혼하였다.
  
송양은 원래 비류국 왕이었으나 추모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였다. 결국 비류국은 고구려의 제후국인 ‘다물도’가 되었고, 송양은 그곳의 통치를 맡았다. 따라서 이제 그는 고구려의 왕을 섬기는 제후가 되었으므로 신하의 도리를 다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왕이) 다물후 송양의 딸을 들이어 비(妃)로 삼았다’고만 나오기 때문에, 그 결혼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추모왕이 죽기 전에 송양에게 딸을 태자와 결혼시키라고 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아니면 송양이 계속 다물후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유리왕에게 딸을 바쳤을 수도 있다. 또는 반대로 유리왕이 송양의 지지기반을 이용하여 왕권(王權)을 탄탄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리왕이 송양의 딸과 결혼한 그해에는, 그것을 축복이라도 하듯 신비한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9월에 (왕이) 서쪽으로 순수(巡狩)하여 백장(白獐·흰 노루)을 잡았다’고 하며, ‘10월에 신작(神雀·鳳凰)이 왕정(王庭)에 모여들었다’고 했다.
  
결혼한 지 2개월 후인 9월에 유리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떠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 잡은 것이 과연 흰 노루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10월에 봉황이 왕궁 뜰로 날아들었다고 하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볼 때 간혹 ‘흰 노루’는 있을지 모르나, ‘봉황’은 상상의 새이므로 사실과 다를 것이다.
  
신화에서 주인공들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유리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떠났다는 것은, 그 땅이 한(漢)나라와의 경계인 요동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지역에 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상징화된 표현일 수 있다고 추측된다.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흰 노루’는 ‘아름다운 여자’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불과 한 달 후에 고구려 왕정으로 봉황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진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봉황은 상상의 새이므로 상징화된 표현일 것이다. 만약 유리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노루’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여자’와 인연을 맺었다면, 그로부터 한 달 후 고구려 왕궁으로 그녀를 맞아들인 사건을 ‘봉황이 모여들었다’는 표현으로 상징화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기록인 유리왕 3년 조에 나오는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이야기’가 충분히 상상 가능한 재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희와 치희
  
유리왕은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후, 다음 해 7월에 ‘골천’이란 곳에 이궁(離宮)을 지어 함께 지냈다. 기존의 왕궁은 정사(政事)를 펴는 곳이고, 새로 지은 이궁은 오직 왕비와 함께 지내기 위한 별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왕은 왕비에게 별궁을 지어줄 정도로 극진하였으나, 왕비는 결혼 1년 3개월(유리명왕 3년 10월)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후 유리왕은 두 여자를 얻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娶)하여 계실(繼室)로 삼으니, 하나는 화희(禾姬)란 이로 골천인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雉姬)란 이로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골천인’이란 바로 이궁을 세운 지역의 유력자를 말하는 것이며, 그 딸이 ‘화희’다. 어쩌면 ‘화희’, 즉 ‘벼꽃’이 이름자에 들어가듯이 이 지방은 부농(富農)의 토호(土豪)들이 사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 토호 중에서 부와 권력을 함께 쥔 세력가의 딸이 화희일 것이다. 
  
또 한 여자는 ‘치희’인데, 고구려 서쪽 변방에 와서 살던 출신이 불분명한 한나라 사람의 딸일 것이다. 유리왕이 동부여에서 온 이방인이듯이, 치희 또한 한인의 딸로 고구려의 국내성이 이방에 속하므로 두 사람은 그런 동류(同流)의식이 강해 더욱 애틋한 정을 나누게 되었을 것이다. 
  
화희나 치희는 이름이라기보다 비로 삼으면서 새로 지어 부른 명칭으로 보인다. 한문의 뜻을 토대로 풀이하면 화희는 벼꽃을 닮았다는 뜻이며, 치희는 꿩을 닮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화희와 치희는 유리왕을 두고 질투가 심하였다. 서로 사랑 다툼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자, 왕은 양곡이란 곳의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궁(宮)을 짓고 두 여자가 각기 떨어져 살게 하였다. 아마도 동궁에는 화희가, 서궁에는 치희가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유리왕이 기산(箕山)이란 곳으로 사냥을 나가서 7일 동안 머물렀다. 왕이 궁을 비운 사이에 화희와 치희는 또 다툼을 벌였다.
  
화희가 한나라 출신의 치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너는 신분이 비천한 주제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궁중의 서열로 봐서 화희가 치희보다 앞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한 화희는 한나라 출신의 치희를 매우 업신여겨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치희는 화희의 구박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부끄럽고 분하여 친정으로 떠나버렸다.
  
〈황조가〉
 
고구려 오회분4호 무덤 속 귀부인의 모습. 치희를 밀어낸 화희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사냥터에서 뒤늦게 돌아온 유리왕은 사랑하는 치희가 떠났다는 보고를 받고, 손수 말을 달려 쫓아갔다.
  
서쪽 변경의 집까지 찾아가 치희를 만났으나, 왕은 끝내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였다.
  
“다시는 화희가 그대를 욕보이지 않게 할 테니, 나를 따라 고구려로 돌아갑시다.”
  
“…”
  
치희는 고구려 왕성에 간 처음에는 ‘봉황’처럼 우대를 받았을 것이나, 이제는 정말 그 이름처럼 ‘꿩’으로 전락했다. 돌아간다 해도 화희의 질투와 부친의 권세를 앞세운 이른바 ‘텃세’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치희는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국 화희에게 당한 설움 때문에 독이 바짝 오른 치희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유리왕을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
  
홀로 고구려 궁궐로 돌아오면서 유리왕은 도무지 치희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궁궐로 돌아와서도 유리왕은 치희를 잊지 못해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황조(黃鳥·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그는 치희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조렸다.
  
〈꾀꼬리는 오락가락, 암수가 함께 노는구나(翩翩黃鳥, 雌雄相依)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念我之獨, 誰其與歸)〉
  
이것이 바로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다.
  
〈황조가〉는 아주 짧지만, 마치 거울처럼 유리왕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유리왕은 강력한 왕권을 갖지 못하고 있었음을 이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유리왕은 고구려의 제후국인 비류국 송양의 딸을 취하면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왕비가 일찍 죽는 바람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다시 골천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유력자의 딸 화희를 취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우유부단한 유리왕
  
친정으로 떠난 치희를 데리러 갔으나 유리왕이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구려에 남아 있는 화희와 그녀의 아버지인 골천의 유력자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화희와 그 배경 세력이 두렵지 않았다면 유리왕은 어떤 설득을 해서라도 사랑하는 연인 치희를 다시 고구려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왕권이 너무 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온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왕은 지지기반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세력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소서노가 낳은 비류·온조 형제와 태자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왕실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다 비류와 온조가 그들을 따르는 세력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우면서, 유리왕을 따르는 세력 기반이 그만큼 약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유리왕은 왕권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력한 아버지의 세력을 배후에 둔 화희의 질투에 대하여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화희에게 벌을 주었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유리왕은 질투심이 많고 대가 센 화희보다 의지할 데라곤 없는 외로운 여인 치희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이국에서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왕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였고, 그래서 더욱 치희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미 〈황조가〉에서 유리왕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가 후에 태자 해명(解明)을 죽게 한 이야기에서도 그 허약성이 엿보인다.
  
유리왕 27년에 태자 해명은 고구려의 고도인 졸본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웃 나라인 황룡국(黃龍國) 왕이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강궁(强弓)을 선물했다. 이때 해명은 황룡국 사자가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단번에 꺾어버린 후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리왕은 황룡국이 자칫 오해를 하여 고구려를 칠까 내심 두려웠던 모양이다.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사자를 보내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를 하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주시오” 하고 청했다. 그러나 황룡국 왕은 해명의 놀라운 기개에 눌려 두려운 나머지 결국 죽이지 못했다. 이때 유리왕은 태자에게 칼을 보내 자결토록 하였고, 해명은 창 자루를 땅에 깊이 꽂아놓고 말을 달려 창끝에 그대로 엎어져 찔려 죽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유리왕은 부친 추모왕처럼 활을 잘 쏘는 무사적(武士的) 기질보다는 문사적(文士的) 기질이 뛰어났던 것 같다. 아마도 모친인 예씨(禮氏) 부인의 기질을 이어받았는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기록에 예씨 부인은 당차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며 아들 유리가 잘되기만을 비는 모습이다.
  
‘불러도 해결이 없는 노래’
  
유리왕의 〈황조가〉는 그 이후 인구에 회자되며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짝을 찾으면서 불렀던 노랫말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조동일 교수의 견해다. 그는 《한국문학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청춘남녀가 짝을 찾으면서 불렀던 것 같다. 노래를 부르면서 짝을 찾는 행사가 실제로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유리왕과의 관련을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유리왕이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일국의 제왕이면서 이런 노래를 지어 자기 심정을 호소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유리왕은 바로 주몽의 아들이고, 건국신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주몽처럼 ‘동명왕’일 수는 없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유리왕 때 나라 안팎에 시련이 많았다고 한다. 부여와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벌어진 위기는 아직 국력이 약했던 탓이라고 돌릴 수 있으나, 내부적인 시련은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명 태자가 죽게 된 사태가 벌어지고, 여기서 보듯이 화희와 치희의 다툼도 일어났으며,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왕비 사이에 오해의 장벽이 생겼다. 시련의 근본적인 이유는 신화적인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치관의 전반적인 혼란이 일어난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아와 세계의 동질성이 흔들렸으므로 유리왕은 일방적인 사랑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불러도 해결이 없는 노래이니, 이것이야말로 서정시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조동일 교수는 〈황조가〉를 서정시로, 유리왕을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병욱 교수도 《한국고전시가론》에서 〈황조가〉를 남녀가 짝을 찾는 노래로 보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유럽 세레나데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주인공 돈 조반니는 “오, 사랑하는 이여 창가로 와주오. 여기 와서 내 슬픔을 없애주오. 내 괴로운 마음 몰라주면 그대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끊으리라…” 하고 노래했다. 그 슬픔의 농도로 볼 때, 이 노랫말들은 〈황조가〉와 많이 닮은 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황조가〉야말로 고대판 ‘세레나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왕 이후 고구려 청춘남녀들이 즐겨 부르며 짝을 찾는 노래의 대표 격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등록일 : 2019-05-10 09:34   |  수정일 : 2019-05-10 09:33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NS 로그인
  • 페이스북 로그인
  • 카톡 로그인
  • 조선미디어 통합회원 로그인
  • pub 로그인
댓글을 입력해주세요.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