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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고 아름다울 어른, 염정아

글 | 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2019-04-25 10:06

가르마를 앞으로 바꿨을 뿐인데, 전혀 달라진 인상의 염정아가 앉아 있다. 오드리 헵번을 닮았던 쇼트커트는 이제 제법 길어 부드러운 중단발이 됐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카페 건너편 빵집의 큐브빵이 유명하다는 말에, 빵을 사다 한 입 베어 물던 염정아는 기자가 도착하자 “어머, 오셨어요”라며 차와 함께 빵을 얼른 씹어 삼켰다. “그 집 빵이 맛있긴 하다”고 말하는 기자에게 웃으며 “잘 지냈느냐”고 안부를 묻는 염정아와 마주 앉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완벽한 타인〉의 수현도, 〈SKY 캐슬〉의 한서진도, 〈미성년〉의 영주도 아닌 염정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행여 상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먼저 무장을 해제하는 인물. 그를 롤모델이라 여기며 자란 신인 배우들은 막상 현장에서 그를 만나면 긴장해 어깨가 굳기 마련인데, 염정아는 그래서 더 편안하게 상대에게 다가간다. 아는 동생을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애꿎은 긴장으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건 정말 아까운 일이니까.

염정아는 배우로 28년을 살면서도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달라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SKY 캐슬〉은 한국 드라마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됐고, 염정아는 그 획의 가장 앞에 우뚝 섰다. 최근 연달아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영화 속에서 그가 맡은 인물들은 한 번도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광고계의 러브콜이 이어지면서 브랜드 평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배우 김윤석은 자신의 첫 입봉작인 영화 〈미성년〉의 주인공으로 염정아를 점찍었다. 중견 배우의 훅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는 이유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그가 등장하는 현장에는 팬덤이 함께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다. 염정아는 도리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고 했다.



뭐랄까요. 요즘 염정아 씨를 보는 많은 분들이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런 용기를 얻을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죠.(웃음) 제 나이에 팬덤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20대 여자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뵈면 정말 감사해요. 한편으로는 10대가 아니라 다행이기도 하고요.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이 오면 정말 몸 둘 바를 몰랐을 것 같아요.”


드라마 〈SKY 캐슬〉에서도, 영화 〈미성년〉에서도 염정아 씨가 맡은 인물들은 고등학생인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상처를 안으로 감추죠. 거기엔 아빠가 다른 자식을 만들었다는 비밀이 있고요.

“엄마는 그렇죠. 엄마니까요. 아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빠로 인해 상처를 받은 거잖아요. 그 일은 저 자신에게도 충격이지만 아이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두 인물이 상황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요.
〈SKY 캐슬〉의 한서진이 자존심이 센 인물이라면, 〈미성년〉의 영주는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죠.


“한서진은 오히려 자존감은 낮은 인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더 세게 표현하고 마음은 감추려고 했겠죠. 영주는 달라요. 자존감이 높은 영주는 그동안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을 꾸려왔고 때문에 이런 일로 자신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 없어 하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삭이는 인물이고요.”


본인은 누구에게 더 가까운가요?

“저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에요.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래야 일도 잘 해결되더라고요. 성격이 원래 밝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제 속도 편해요. 긴 시간 학습에 의해서 알게 됐어요.(웃음) 그 편이 훨씬 결과가 좋고, 제 맘도 편하고, 주위 사람들도 편하다는 걸요. 단, 전제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겠다는 자세죠.”



〈미성년〉은 배우 김윤석이 감독이어서 어려운 지점도 있었을 듯합니다. 들키는 기분이 들 것도 같고요.

“첫날엔 그랬어요. 감독님이 배우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더라고요. 모든 걸 들킨 기분이었어요. 하루가 딱 지나니까 인정이 되고 편해지더라고요. 오히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감독님께 의지했어요. 제가 어떤 연기를 하면, ‘지금은 이런 감정으로 하셨는데, 이번엔 이런 감정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하시죠. 깜짝 놀라요. 마치 자기가 연기한 것처럼 잘 알아서. 저는 이 작품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연기는 어렵겠지만, 연기를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하는’ 감독님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고 했죠.”


평소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눈여겨본 건가요?

“그전에는 사적인 친분이 전혀 없었어요. 〈전우치〉와 〈범죄의 재구성〉을 함께 찍었지만 같이 등장한 적은 없었죠. 관객으로 그 배우의 연기를 보면, 놓치고 가는 부분이 없어요. 그냥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 큰 그림을 보는 느낌이에요.”


배우가 보기에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있나 봐요.

“몇 분 있죠. 정말 잘하는 분들.”


누군가에게는 염정아 씨도 그런 배우 같은데요. 실제로 후배 배우들이 롤모델로 꼽았죠.
〈SKY 캐슬〉의 오나라 배우나 〈미성년〉의 박세진 배우도.


“〈SKY 캐슬〉 친구들은 〈미성년〉 시사회에도 예쁘게 하고 와서 응원해주고 갔어요. 박세진 배우는 〈마녀보감〉이라는 드라마에서 만났어요. 제 호위무사로 나왔죠. 신인 배우들은 현장에 오면 워낙 긴장하니까 먼저 말도 걸고 편하게 지내려고 해요.”



영화 보면서 든 생각 중 하나는 ‘진짜 어른이 뭘까’였어요. 영화 속 인물은 아직 어른이 아닌 미(未)성년이거나, 아름다운 어른인 미(美)성년이더군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에요. 나는 어떤 어른일까. 아니, 나는 어른일까.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데뷔작이 1991년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죠. 스무 살 무렵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일찍 철들지 않았나요?

“오히려 철이 늦게 들었죠. 그때는 주변에 늘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고, 항상 현장에서 보호받으면서 일했으니까 오히려 세상 물정을 몰랐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그때 다작을 한 비결은 뭘까요.

“도회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비슷한 배역을 많이 했어요. 그땐 아무도 저한테 다른 제안을 안 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다른 캐릭터를 만나면 서슴지 않고 했죠. 그런 부분은 제가 잘했든, 못했든 스스로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힘들진 않았나요?

“일단 제가 거절을 못 했고요.(웃음) 당시엔 매니저도 없었고, 엄마가 전화 받으면 바로 하는 거였어요.(일동 웃음) 그래서 들어오는 작품을 거의 다 했던 것 같아요. 20대가 아주 바쁘게 지나갔죠.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양한 인생 경험은 못 했어도 카메라 앞에서는 많은 경험을 한 것 같아요.”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네요.

“정말 별의별 역을 다 해봤어요. 그땐 잘 울지 못해서 큰 고민이었어요. 풀지 못한 숙제였죠. 돌아보니 그 인물에 빠져들지 못하고, 집중을 못해서였던 것 같아요. 울려고 눈을 계속 뜨고 있어보고, 슬픈 생각도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다 거짓이었죠. 진짜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영화 〈미성년〉 스틸. 염정아는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영주’역을 맡았다.
연기는 언제부터 그렇게 잘하셨나요?(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알았죠. 인물에 대한 이해가 안 되면, 시청자든 관객이든 설득할 수 없다는 걸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앞뒤가 맞도록 꼭 이해를 해야 해요. 그 외에 다른 방법은 모르겠더라고요.”


〈완벽한 타인〉부터 〈뺑반〉, 〈SKY 캐슬〉 그리고 〈미성년〉까지 매 계절 새 작품이 나왔어요.

“새로운 캐릭터를 주셔서 너무 좋아요. 작품은 주는 사람 마음이거든요.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요. 재작년 말부터는 너무 재미있는 배우 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연기도 늘었겠죠? 조금씩은 늘지 않을까요?(웃음)”


일과 삶의 균형, 일과 가정의 균형 잡긴 괜찮았나요?

“〈완벽한 타인〉은 지방에서 한 달 만에 찍었어요. 마침 아이들도 방학이었고요. 〈미성년〉이랑 〈뺑반〉은 제 분량이 몰려 있어서 타이트하진 않았어요. 공간도 거의 변화가 없었고요. 〈SKY 캐슬〉도 생각보다 여유롭게 찍었어요. 마지막 2~3주만 좀 빡빡했지, 밤 한 번 새우지 않고 찍었거든요. 그래서 촬영 기간에도 그렇게까지 제 할 일을 못 하진 않았던 거 같아요. 남편이 워낙 제 일을 잘 이해해주기도 했고요. 또 좋은 감독님들을 만났어요. 오래 찍는 분들은 거의 없었어요.(웃음)”


동탄에 가면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아서 ‘동탄맘’이라는 별칭도 있던데요.

“아이를 키우면서 커뮤니티라는 걸 처음으로 가져봤어요.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엄마들을 만나는 게 너무 재밌었죠.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또 달라요. 모든 게 달라지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어요. 다들 학교 끝나면 학원 가야 하니 너무 바빠요.”


〈SKY 캐슬〉 이후 교육관이 바뀌진 않았나요?

“(머리를 두 손으로 싸며)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돼요. 아이들 교육을 생각할 때가 제일 고민스러워요. 연기 고민하는 것만큼이요.”



〈미성년〉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보다 낫다’ 싶을 때가 있었나요?

“많죠. 영화에서도 일은 어른들이 저지르고, 해결은 아이들이 하려고 치고받잖아요. 제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인데, 문득문득 제 감정이 컨트롤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너무 화가 나는데, 아이가 딱 알아채고 얌전해지면 미안해져요. ‘왜 더 성숙하지 못했지?’ 후회가 돼요.”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나 봐요.

“말도 못하죠. 애들 예쁜 거. 말도 못하게 예쁜데, 말도 못하게 말도 안 들어요.(일동 웃음)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 정말 큰 에너지를 얻죠.”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도 커리어를 더 탄탄히 쌓고 있는데요.

“그런 것들을 두려움 없이, 철모르고 지나온 거 같아요. 늦게 결혼했지만 아이를 빨리 가져서인지 모든 게 빨리 지나간 느낌이에요. 사실 어떻게든 해결이 돼요.(웃음) 결혼하고 나서는 오히려 더 안정된 느낌이에요. 저는 일상적인 연기를 좋아해요. 누군가는 ‘엄마 역할만 맡으니 속상하지 않냐’고 물으시는데, 전혀요. 오히려 일상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죠.”


〈SKY 캐슬〉을 마치고, 작품이 잘돼서 좋은 점으로 “다음에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 같아서”라고 했죠.

“정말 그래요. 감사하게도 요즘 책(시나리오)이 많이 와요. 그걸 읽는 동안 정말 행복해요. 읽다 보면, 연기하고 있는 내가 그려지는 작품이 있거든요. 그러면 바로 선택하죠. 〈완벽한 타인〉이나 〈미성년〉이 그랬어요.”


이렇게 작품이 쌓이고 쌓이면 또 시간이 흘러가 있겠네요.

“제 미래가 궁금하진 않아요. 걱정도 안 해요. 아예 생각을 안 해요. 오히려 그런 생각이 저를 가두는 것 같거든요. 지금처럼 그때그때 열심히 하다 보면 또 10년이 지나가 있겠죠. 어렸을 때는 ‘내가 나이 들어서 늙어진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스무 살, 그때그때 들어오는 작품을 열심히, 그저 열심히 찍었던 배우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저 열심히 작품을 찍고 있다. 28년을 스크린 안에서 세월과 함께 나이 들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행운의 여신이 염정아를 바라보며 자주 미소 짓는 이유는, 그가 얼마나 거짓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알아서일 것이다.

아름다웠고, 아름다울 어른(美成年) 염정아. 그 자신이 행복한 동시에, 함께하는 이들도 행복하게 해주는 그와 같이 나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건 관객에게도 행운이다.
등록일 : 2019-04-25 10:06   |  수정일 : 2019-04-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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