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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산 구간 역사문화]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

글 | 신준범 월간 산 기자 2019-04-23 10:21

홍건적의 난 때 황장산에 산성 쌓아 피신시켜
 
황장산의 원래 이름은 작성산鵲城山이다. <산경표>, <대동지지>, <예천군읍지> 등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니, 황장산으로 불린 세월보다 작성산으로 불린 세월이 훨씬 길다. 산 이름은 고려 공민왕 때 작장군이 세운 성이 있었다 하여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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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산 묏등바위에서 본 문경 동로면 일대.

1361년 홍건적이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 고려 침공을 감행했다. 최영 같은 맹장이 있었으나 대군을 막기엔 역부족, 수도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때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반격으로 홍건적이 밀리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안동에서 문경 어류성으로 옮겨 개경으로 올라갈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바로 문경새재의 주흘산 8~9부 능선 자락이며, ‘대궐터샘’으로 불리는 샘터는 지금도 물이 콸콸 나오고 주변에서 기왓장이 나온다고 한다.
 
주흘산에서 황장산은 직선거리로 16㎞ 떨어져 있고, 능선이 이어져 있다. 주흘산은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살짝 비껴 나와 있다. 이때 공민왕은 작장군에게 “황장산에 산성을 쌓으라”고 명해 노국공주와 비빈, 궁녀들을 대피시켜 머물게 하고는 자주 들러 피난길의 고생을 위로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 작성의 둘레가 610척(약 200m)이고, 높이가 11척(약 3m)이라 기록되어 있다. 돌로 만든 산성이며 수량이 풍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은 어릴 적 원나라에 붙잡혀 가서 볼모 생활을 했다. 이때 몽고족 처녀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기에 처음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으나 점점 마음을 주기 시작해, 노국공주 외에는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간청에 어쩔 수 없이 후궁을 간택했으나 형식상의 혼인이었을 뿐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지극히 아꼈기에 험준한 황장산에 본대와는 별도로 피신시켰음을 가늠할 수 있다. 공민왕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며 민심을 얻기도 했으나 노국공주가 출산 중 숨을 거두자 정치에 흥미를 잃은 채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고려사> 공민왕 편에서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즉위 후 온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며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노국공주 영전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황장산은 백두대간 줄기, 경상도와 중부지방을 나누는 자연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공민왕이 개경이 수복되기 전 충청권 언저리까지 올라와 노국공주를 이곳에 피신시킨 것은, 수도를 탈환하면 곧장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왕은 홍건적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니 노국공주를 분리시켜 더 험준한 곳에서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국경을 초월한 정략결혼이었으나 지극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 황장산에 깃들어 있다. 
등록일 : 2019-04-23 10:21   |  수정일 : 2019-04-2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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