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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문은 동서양을 향해 활짝 열렸네”

廣州 〈끝〉

⊙ 해상실크로드박물관, 인양한 ‘보물선’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현장 위에 박물관 건립
⊙ 서양과 거래하는 독점권 가진 ‘洋行’ 등장… 官이 상인을 관리하고, 상인이 외국인을 관리
⊙ 화재로 13행이 보관하던 銀貨 4000만 냥 녹아… 냄새, 1~2리 밖까지 진동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글 | 허우범 여행작가 2019-04-23 10:20

광저우 남쪽 하이링에 있는 해상실크로드박물관. 宋代 상선 ‘난하이 1호’를 인양·발굴하고 있다.
  
며칠을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오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창하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도 상쾌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차에 올랐다. 광저우(廣州) 남쪽 하이링(海陵)섬에 있는 해상실크로드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곳은 남송(南宋) 시대 초기, 도자기를 싣고 동남아시아로 가다가 침몰한 ‘난하이(南海) 1호’를 인양・발굴하는 곳이다. 이 배는 길이가 30m를 넘는데, 이제까지 발견된 송나라 상선 중 최대의 크기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거대한 돔형 건물이 연이어 보인다. 마치 운동경기장에 온 듯한 느낌이다. 박물관 크기가 이 정도라니 이곳에 있는 실크로드 유물은 얼마나 많은 것인가. 중국의 유명 박물관은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현장에 직접 건설한다. 발굴지와 그곳에서 나온 유물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최대한의 조치다.
 
박물관 중심에는 ‘난하이 1호’의 발굴 작업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박물관은 건설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바닷속에 침몰한 거대한 배를 어떻게 파손 없이 통째로 인양하느냐는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대형 철제 박스를 만들어 갯벌과 함께 난파선 전체를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성공했다. 인양된 난파선은 가장 가까운 해변(海邊)인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위에 박물관을 만든 것이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박물관 중심에는 인양된 ‘난하이 1호’의 발굴 현장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인양된 선박은 몇 년간 물 빼기와 인양 준비 작업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박물관 개장과 함께 공개되었는데, 발굴 현장은 아직도 개흙이 그득하다. 그 사이로는 도자기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발굴자들은 흙을 퍼내고 귀중한 도자기를 조심스레 꺼낸다. 한쪽에서는 여러 가지 도자기를 세척 중이다. 유리벽 너머로 실시간 작업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나도 발굴 현장에 함께한 듯한 느낌이다. 
  
발굴 현장 좌우로는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대부분이 도자기다. 발굴된 도자기의 양도 양이지만 질 또한 최고여서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 난파선에서 도자기와 각종 물품이 8만 점 넘게 나왔는데, 시가(時價)로 환산하면 10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가히 보물선이 아닐 수 없다. 
  
  
공원에서 자식 대신 선보는 부모들
  
다음날, 광저우의 13행(行)거리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공원을 가로지르는데 길 양편으로 어르신들이 빼곡하게 늘어서서 저마다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그들 주변에는 하나같이 삼색 매직펜으로 무어라고 쓴 커다란 종이들이 진열해 있었다. 어떤 것은 잘 보이게 하려는 듯 양산에다가 붙여놓았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결혼을 중매(仲媒)서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연애결혼을 하지 않나요?”
  
“결혼 연령이 되어도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부모들이 서로 논의해서 만남을 추진합니다.”
  
젊은 층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아껴가며 열심히 돈을 벌고, 부모들이 대신 자녀들의 손발이 된 것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차이가 있을 터인데 이는 어떻게 극복할까. ‘아파트 가격은 장모가 올렸다’는 말처럼 집 한 채 장만은커녕 임대료 감당도 버거운 젊은 층들. 결혼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것인가. 중국도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결혼은 쉽지 않은 문제가 된 듯하다.
  
광저우의 주강(珠江) 변에 있는 13행 거리는 오늘도 늘어선 상점과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은 17세기에 서양 상선들에 의한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이름이 높았다. 18세기에는 막대한 부(富)를 창출하며 국제무역의 최대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중앙정부의 재정에도 엄청난 이득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중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記述)했다.
  
〈육로를 통해 이 도시로 물건을 들여오거나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상인들, 바다를 통해 상품을 내가는 상인들로부터는 상품의 3.3%, 바다를 통해 상품을 들여오는 사람들은 10%, 가축이나 토지, 점포 등에서 이득을 얻은 것은 모두 10%를 납부해야 한다. 실로 엄청난 액수이다.〉
  
마르코 폴로는 한 도시의 세금(稅金) 수납(收納) 상황만으로도 ‘들은 적도 없고 계산하기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국가 전체로 따지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일 수밖에 없다. 특히 국제무역이 왕성한 항구도시는 막대한 세수(稅收)의 근원이었으니 황실 역시 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洋行’의 등장
淸代의 광저우 13행거리 풍경.
그런데 왜 13행이라고 했을까. 청(淸)나라의 강희제(康熙帝)는 명대(明代)의 해금(海禁)정책을 깨고 밀려드는 서양 상선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네곳에 세관을 설치했다. 윈타이산(雲臺山)의 장하이관(江海關), 닝보(寧波)의 저하이관(浙海關), 샤먼(厦門)의 민하이관(閩海關), 광저우의 웨하이관(粤海關)이었다.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의 웨하이관을 제일 많이 찾았다. 이곳은 강바닥이 넓고 수심이 얕아 배를 접안하기가 수월했다. 광저우는 천혜의 항구라는 이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재력(財力)과 실력을 갖춘 상인을 선발해, 서양 상인과 거래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 그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런 역할을 하는 상점을 ‘양행(洋行)’이라 했고 광저우에는 모두 13곳이 있었다. 13행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양행이라는 말은 후일 서양 상품을 취급하는 회사, 혹은 서양식 근대 회사를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됐다. 제약회사 ‘유한양행’이 그 예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상업을 경시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사회적으로는 지위가 낮았다. 하지만 돈의 위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부상(富商)들은 점차 거금을 기부하고 관직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상인들 사이에서는 기부금을 내고 관직을 사는 일이 관례가 되었다. 정부도 이들을 이용하여 외국 상인을 관리하는 방책(方策)을 시행했다. 즉 ‘관(官)이 상인을 관리하고, 상인이 외국인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거금의 기부금을 내고 관직을 산 13행의 주인들은 ‘반관반상(半官半商)’이 되어 국제무역을 독점하며 관청과 외국 상인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광저우뿐 아니라 다른 세관에도 양행이 있었다. 하지만 광저우만큼 재력이 튼튼하진 못했다. 광저우의 13행은 자본뿐만 아니라 인맥(人脈)도 넓었다. 상품거래도 계약서조차 필요 없이 성실과 신뢰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은 서양 상인들에게 몹시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80%가 넘는 서양 상선들이 웨하이관으로 몰려든 것이다. 광저우에서 20년간 상업에 종사한 미국인 헌터가 쓴 《광주번귀록(廣州番鬼錄)》에도 13행의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회계는 아주 총명하여 계산이 빠르고 정확했다. 상점은 민첩하고 질서정연하며 정돈을 잘하고 빈틈이 없었다. 같은 상인이 보기에도 신용을 잘 지켜서 믿고 거래할 수 있었다. 계약을 잘 지키고 통이 크며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
  
강희제를 이은 건륭제(乾隆帝)는 광저우만 개방하는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을 시행했다. 서양의 상선들이 중국 곳곳을 속속들이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서 없는 것이 없고, 더욱이 외국의 산물(産物)로 부족한 것을 보충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중화적 조공질서(朝貢秩序) 의식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한 서양 상선들은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중국과의 무역은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3행거리와 맞닿아 있는 진룬후이관(錦綸會館)은 상인들이 비단을 거래하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관우를 모시는 관디먀오(關帝廟)였다. 대개 관우는 중국인들이 모시는 무신(武神)으로 알고 있지만, 재물신(財物神)이기도 하다. 점차 거래가 왕성해지자 관디먀오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재물신인 관우가 상인들에게 톡톡히 혜택을 준 것이다. 이븐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서 중국의 비단 생산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중국은 비단이 대단히 흔하다. 누에가 스스로 과실에 붙어서 그 과실을 파먹고 살기 때문에 먹이가 별로 필요 없으니 비단이 흔할 수밖에 없다.〉
  
마르코 폴로 역시 ‘이처럼 엄청나게 생산되는 비단에 대한 세금 역시 대단히 많다. 비단에 대해서도 10%의 세금을 부과한다’고 했다. 특별한 노력 없이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비단과 그에 대한 서구세계의 열렬한 관심은 국제무역을 하는 상인들은 물론 중국 정부에도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금(金)으로 산을 만들고 진주(珍珠)로 바다를 메운다’는 말 그대로 광둥(廣東)은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였던 것이다.
  
13行 상점마다 銀錢이 넘쳐나네
 
광저우를 오가는 상인들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난하이선먀오(南海神廟).
거리 골목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유럽풍의 건물들은 당시 13행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듯하다. 13행거리 앞에는 광저우의 상징인 주강이 흐른다. 당시 13행 상점의 대문은 모두 주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배에 물건을 실어 내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성(城)처럼 웅장하다.
  
광저우의 황푸(黃浦)항에는 배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난하이선먀오(南海神廟)가 있다. 이곳은 1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곳으로 바다의 수호신인 남해신(南海神)을 모시는 곳이다. 4대 선먀오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선먀오는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유적지답게 고색창연하다. 입구의 패방(牌坊)에 적힌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는다(海不揚波)’는 문구에서 뱃사람들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옛날에는 이 앞에 커다란 부두가 있었다. 광저우로 들어오는 모든 외국 선박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무사항해(無事航海)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빌었으리라.
  
13행은 날로 번창했다. 특히 비단은 생산량도 많고 품질도 최상이었다. 청나라 때의 시인인 굴대균(屈大均)은 ‘광주죽지사(廣州竹枝詞)’에서 13행의 비단사업 번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서양 배들은 앞 다투어 13행 상점을 찾고(洋船爭出是官商)
  사방의 문은 동서양을 향해 활짝 열렸네(十字門開向二洋)
  오사와 팔사 광주 비단이 최고니(五絲八絲廣緞好)
  13행 상점마다 은전이 넘쳐나네(銀錢堆滿十三行)
  
13행의 번성은 화재로도 알 수 있다. 청나라 도광(道光) 시기에 13행에 큰불이 났다. 이 불로 13행은 일주일간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 상점마다 비축해놓은 4000만 냥의 은화(銀貨)가 모두 녹았다. 이 냄새가 1~2리 밖까지 진동했다고 하니 이곳의 번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편전쟁
 
박물관 앞 해변에는 ‘난하이 1호’와 같은 모형을 만들어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13행의 발전은 중화제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영화만 지속된 것은 아니다. 밀려드는 서양의 통상(通商) 요구에 조공질서만으로 대응하다 힘없이 무너진 현장이기도 하다.
  
차(茶)는 13행의 번성을 더욱 가속화하는 물품이었다. 영국인의 차 문화는 오후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대중화되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이 점차 중요해지자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했다. 영국은 중국의 3대 자랑품인 차와 비단, 도자기를 수입하고 모직물과 면화를 팔았다. 하지만 중국은 영국의 상품을 수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차는 영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영국의 차 수입은 중국에서의 수입물품 중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對)중국 수출은 지지부진했다. 영국은 무역적자가 점차 심각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했다. 아편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다. 한번 아편에 맛을 들이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000상자에서 1만 상자, 아편전쟁(阿片戰爭) 직전에는 4만 상자로 늘어났다.
  
고위 관료에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편을 피웠다. 중국 전체가 아편굴이 되어 사람들을 피폐시켰다. 이제는 중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중국 정부는 1839년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광저우로 급파했다.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하여 폐기시키고 부패관리들을 엄벌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1840년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켰다.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화제국 청나라는 ‘가장 치욕적’으로 패배했다. 청나라 멸망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던 아편전쟁이다.
  
광저우 싼위안리(三元里)의 백성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영국군에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엄청난 화력은 이미 만연한 부패로 종이호랑이가 된 제국을 여지없이 불살랐다. 결국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항하는 ‘난징(南京)조약’에 서명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큰 이익을 보지 못하자 1856년 중국 관리가 자국(自國)의 선박에 들어와 국기를 내린 것을 핑계로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도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에 참여했다. 청나라는 또다시 패배하고 도시 개방의 확대, 선교활동의 보장, 군함의 입항 허가 등을 담은 ‘베이징(北京)조약’에 서명했다.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도 물었다.
  
다시 솟아오르는 龍
 
광저우 주장(珠江)의 야경. 아편전쟁의 아픔을 딛고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광저우의 13행거리에서 180년 전의 아픔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사몐(沙面)거리에는 당시의 영사관과 상점, 은행 등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서유럽풍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공원이 되어 청춘남녀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아편전쟁의 치욕을 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날의 모든 상황은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13행거리에도, 자의국(咨議局・청나라 말기에 설치한 성 단위의 지방의회) 자리에도 박물관이 있다. 주요 항구도시에도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나아가 별도의 아편전쟁박물관, 해전박물관도 있다. 그리고 오늘도 무료로 개방한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고 전 국민이 스스로 조용히 깨치게 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며 중국인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정신을 떠올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작년에 “이제 중국공산당은 아편전쟁 이후 온갖 능욕을 당한 암담했던 중국의 처지를 완전히 바꿨다”고 선포했다. ‘중국몽(中國夢)’으로 대변되는 중화제국의 위대한 부흥을 역설한 것이다.
  
광저우를 떠나기 전날 밤, 주강유람선을 탔다. 상하이에 버금가는 네온사인이 강변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커다란 유람선들이 강을 촘촘히 오가고 있다. 그들 모두는 21세기 문명을 향유(享有)하며 새로운 문명 창조에 열을 올린다. 시원하던 강가는 어느덧 뜨거운 열기가 넘친다. 순간, 거대한 용(龍)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환영(幻影)처럼 스쳐 간다. 아, 아편의 치욕을 딛고 화려하게 부활한 용이 밤하늘을 휘돌고 있구나!
등록일 : 2019-04-23 10:20   |  수정일 : 2019-04-2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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