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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의 지방관이 된 이슬람교도 고려인

⊙ 茶 수출이 시작된 항구 샤먼(厦門)… ‘tea’는 茶의 샤먼 지역 발음 ‘te’에서 비롯
⊙ 광저우(廣州)의 古刹 光孝寺는 혜초가 머물던 곳
⊙ 해상 실크로드는 ‘도자기의 길’… “중국 陶器야말로 도기 중에서 최상의 것”(이븐 바투타)

글 | 허우범 여행작가 2019-04-09 09:56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광저우의 최초 해외무역항구였던 황푸구항(黃浦古港)의 모습.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샤먼(厦門)까지는 대략 100km 정도다. 대륙 중국에서 이 정도의 거리는 가까운 거리다. 그래선지 출퇴근 시간이면 고속도로는 통근전쟁이다. 경제성장에 따른 도시 간 통근자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수도인 베이징(北京) 부근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도 중국 전체 톱10에 든다고 한다. 이제 중국에서의 여행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다녀야만 한다.
  
샤먼은 주룽강(九龍江)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서기 3세기 진(晋)나라 때 퉁안현(同安縣)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타이완(臺灣)과 해협(海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수심(水深)이 깊고 겨울에도 얼지 않아 16세기에는 유럽과의 교역장소로 사랑받았다. 
 
이 도시의 원래 한자명(漢字名)은 ‘샤먼(下門)’이었다. ‘주룽강의 입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명(明)나라 때 해적(海賊)들을 소탕하기 위해 성(城)을 쌓고 ‘아모이’라고 불렀다. 이는 ‘큰 집의 문’이라는 의미다. ‘厦門’은 ‘샤먼’으로도 발음한다. 그래서 지금은 ‘厦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샤먼은 송나라 때 처음으로 차(茶)를 수출한 항구다. 이 지역에서 차를 ‘테(te)’라고 발음한다. 영어의 ‘티(tea)’도 이곳의 발음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독일·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도 비슷하게 부른다.

大紅袍茶
 
중국은 차의 나라답게 명차(名茶)가 많다. 유럽에 차 수출로 알려진 도시답게 이 지역에도 중국의 10대 명차의 반열에 오르는 차가 있다. 바로 대홍포차(大紅袍茶)다. 우이산(武夷山)에서 나는 이 차는 찻잎이 필 때면 타오르는 불처럼 빛이 나며 마치 붉은 천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도 차 문화가 있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간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의 차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오직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단차(龍鳳團茶)만을 귀중하게 여긴다. 황제가 하사해 주신 것 이외에도 상인들이 가져다가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한다.〉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하였는데 ‘먹을거리’ 부분에서 주로 인삼(人蔘)을 수출하고, 차를 수입하였다. 차 문화는 왕실과 귀족, 승려 등에서 시작되어 점차 평민들에게로 확산되었다. 고려 왕족 출신의 승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유학할 때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그가 구법(求法)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스승이 귀한 차를 선물하였다. 그 차는 황실의 다원(茶園)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용봉차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귀한 차를 받은 의천은 그 즉시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시를 남겼다.
 
  황실에서 가져온 신선한 차를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께서 보내주셨네
  東林贈進僧
  한적하게 차 달일 날보다 앞서
  預知閑煮日
  찬 얼음을 깨고 샘 줄기를 찾는다
  泉脈冷敲氷
  
 
700년 만에 발견된 團茶
 
의천이 받았던 귀한 차가 조선시대에 발견되었다. 때는 1846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부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를 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겼다. 이곳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하의 명당자리였다. 대원군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지(住持)에게 1만 냥을 주고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러고 탑을 부수고 그 자리에 묘를 이장하였다.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여러 기물(奇物)이 나왔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그 내용이 전한다.
   
〈(대원군이 이건창(李建昌)에게 말하기를) 탑을 쓰러뜨리니 그 속에는 백자(白磁) 두 개와 단다(團茶) 두 병, 사리주(舍利珠) 3매(枚)가 있었다.〉
  
여기서 발견된 ‘둥근 모양의 차(團茶)’가 의천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용봉단차’로 송(宋) 휘종(徽宗) 때인 1120년경 만들어진 귀한 것이었다. 한데 황제만이 마시던 귀한 차가 어떻게 가야사의 탑 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대원군에게서 이 차를 얻을 수 있었던 이상적(李尙迪)이 남긴 산문(散文) 〈용단승설차를 기억하다(記龍團勝雪)〉에 그 답이 있다.
 
〈송나라 인종 때 벌써 작은 용단(龍團)차가 있었으나 오로지 승설(勝雪)이라는 이름은 휘종 선화(宣和) 2년(1120년)에 비롯되었다. 고려의 승려인 의천・지공(指空)・홍경(洪慶)・여가(如可)처럼 앞뒤로 바다를 통해 도(道)를 묻고 경전을 구하러 송나라에 왕래한 사람이 줄을 이었음을 문헌에서 증명할 수 있다. 이때 이들은 필시 다투어 좋은 차를 구해서 불사에 공양했을 터, 심지어 석탑에까지 넣어서 700여 년을 넘겨 다시 세상에 나오도록 하였다. 아! 참으로 기이하구나!〉
  
차는 고려시대 송과의 교역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품목이었다. 이는 고려의 수준 높은 문화와 어울리는 기호품이자, 신심(信心) 넘치는 승려들이 부처에게 공양(供養)하는 보배이기도 하였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용단승설차가 오늘날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국보(國寶)가 되었으리라.
 
옛 선인들의 다도(茶道)를 생각하며 대홍포차 한 잔을 마신다. 어느덧 공항으로 갈 시각이 되었다. 샤먼에서 광저우는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다. 광저우공항을 나서니 아열대 기후라선지 후덥지근한 바람이 코를 막는다.
  
2000년을 이어온 대외무역항
 
1830년대의 황푸구항.
광둥성(廣東省)은 남중국해와 접하고 동남아시아를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처음으로 중원을 통일한 진(秦)나라 때부터 한(漢)·당(唐)·송·명 등 통일왕조들은 각종 필요한 물산(物産)과 금권(金權)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부터 다졌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다. 광둥성은 한번에 보아도 풍요로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각종 물산의 풍부함도 있을 터지만 고대로부터 유럽과 아시아에서 중국을 향하는 모든 선박은 이곳을 거쳐야 했기에 상업과 문화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광저우(廣州)는 광둥성의 성도(省都)다. 이 도시에는 중국의 4대 하천 중 하나인 주강(珠江)이 흐른다. 이 강의 하구만(河口灣)은 홍콩・마카오・선전(深) 등과 인접해 있다. 이 도시가 처음 광저우로 불린 것은 삼국시대 손권(孫權)에 의해서다. 한・당 시대를 거치며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자 당・송 시기부터 북방인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명・청 시기에는 더욱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들을 ‘객가인(客家人)’이라고 불렀다. 아편전쟁 이후 많은 인구가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광둥 화교(華僑)의 주축을 이룬다.
 
광저우는 한(漢)나라 시기부터 항구로 발전한 이래 줄기차게 성장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해금정책(海禁政策)에도 불구하고 이곳만은 개방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중국의 유일한 대외개방 항구였다. 2000여 년 동안 한 번도 폐쇄하지 않았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이어온 도시인지라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상당수 있다. 당나라 때 지은 사찰인 광효사(光孝寺・광샤오쓰)는 신라의 승려인 혜초(慧超)가 인도로 구법(求法)을 떠나기 전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혜초가 머물렀던 절 光孝寺
 
당나라 혜능선사의 삭발한 머리카락이 묻혀 있는 髮塔 주위를 한 신도가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고 있다.
광둥성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인 광효사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대웅전 앞의 거대한 보리수가 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 절은 기원전 11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광저우가 있기 전 광효사가 있었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 절은 남월국(南越國)을 세운 조타(趙陀)의 저택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조타는 베트남의 건국 시조와 같은 사람이다. 당시 인도에서 고승(高僧)들이 와서 이곳에 머무르며 불교를 전파하면서부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나라 손권 밑에서 관료 생활을 하다가 그의 미움을 받아 좌천된 학자 우번(虞翻)이 수백 명의 제자에게 학문을 전수해주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사찰이 유명해진 것은 당나라 때다. 고승 혜능(慧能)이 이곳에서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어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법당 뒤편에는 발탑(髮塔)이 있는데 이곳에는 혜능선사의 삭발한 머리카락이 묻혀 있다고 한다. 신라인 혜초는 인도에서 온 밀교승(密敎僧)인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그로부터 밀교(密敎)를 사사(師事)하였다. 그러고 스승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시 밀교의 본향(本鄕)인 천축(天竺)으로 향하였다.
 
여기저기 향내가 진동한다. 많은 사람이 불당 앞마다 서너 개씩 향을 들고 저마다의 소망을 빌고 있다. 혜초가 머물던 당시의 광효사도 이처럼 번성하였으리라. 그러하기에 혜초도 당시 최고의 사찰이었던 이곳에서 혜능선사의 설법을 염송(念誦)하며 천축으로 가는 뱃길의 안녕(安寧)을 염원하였으리라.
  
예테보리호
 
황푸구항 공원에 있는 스웨덴 상선 예테보리호 부조상.
혜초가 천축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탄 부두는 어디일까. 황푸구항(黃浦古港)일 가능성이 크다. 이 항구는 광저우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당·송 시대부터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해외무역항으로서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역사와 달리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적은 많지 않다.
 
황푸구항은 퇴락한 어촌의 모습 그대로다. 몇 척의 나룻배가 개펄 위에 있고, 과거의 부두였을 곳에는 전시용으로 만들어놓은 배 한 척이 홀로 좁은 항구 터를 지키고 있다. 그 옛날 광저우를 드나드는 입구로 중시되어 온 곳이지만 과거의 영광은 세월의 무상함에 묻힌 지 오래다. 부두 터에 세운 깃발만이 과거의 명성을 말해주려는 듯 바람에 펄럭인다. 항구 너머 야산에 있는 파저우(琶洲)탑은 당시 등대 역할을 하였고, 부두 앞에 있는 작은 건물은 세관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지금은 황푸구항과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정화(鄭和)의 항해도(航海圖)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중국 연안지역 박물관은 어느 곳이나 빠지지 않고 정화의 항해도를 전시한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전시관은 명·청 시대 광저우의 모습과 세관 업무 등을 사진과 모형으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스웨덴의 상선이었던 예테보리호의 모형과 자료가 비교적 자세하게 비치되어 있다.
 
18세기 중엽, 예테보리호는 이곳에서 많은 물건을 수입하여 돌아가던 중 항구 바로 앞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였다. 스웨덴은 이 배를 발굴하여 1994년에 복원했다. 예테보리호는 2006년 7월 260여 년 만에 옛 광저우로 항해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항구 유적을 복원해놓은 것이었다. 박물관의 관리자가 알려준 공원에도 예테보리호의 부조상(浮彫像)이 있다. 중국이 고대부터 세계적인 국가였음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
  
이슬람사원 懷聖寺의 光塔
 
7세기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이슬람사원인 懷聖寺.
광저우에는 아랍인들도 앞다퉈 몰려들었다. 아랍인들이 늘어나자 그들만의 거주지인 번방(蕃坊)을 설치하였다. 광저우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유럽에 ‘칸푸(Khanfu)’로 알려지고 이후 영국인들이 ‘캔턴(Canton)’으로 부르면서 별칭(別稱)이 되었다. 아랍 상인이 증가하자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 사원도 생겨났다.
 
‘마호메트를 마음속에 품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회성사(懷聖寺・화이성쓰)는 7세기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이슬람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3m에 이르는 광탑(光塔)이 있다. 흰색의 원뿔형으로 지은 이 탑은 이슬람 지역에서 보는 탑인 미나레트와는 그 모양이 다르다. 탑 위에서 쿠란을 낭송하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불을 밝혀 아랍 상인들의 배가 무사히 정박할 수 있도록 등탑(燈塔)으로써의 기능을 하였다. 광탑은 아랍 상인들의 상업적 교역과 종교의 전파라는 두 가지의 이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사원에는 고려인의 흔적도 있다. 많은 이슬람교도의 묘비석(墓碑石) 중 14세기에 살았던 ‘라마단(刺馬丹)’이라는 신도는 고려인이었다. 그는 광저우에서 지방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다루가치는 원나라 때의 관직이다. 고려는 남송(南宋) 때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이때 광저우로 온 한 고려 상인이 사업으로 부(富)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의 후손은 선친(先親)의 명성에 힘입어 원나라 때 지방관에 임명되어 활동했을 것이다. 그가 이슬람교도가 된 것은 당시 아랍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과 원나라의 우대정책에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원나라 때 고려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사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했을 것이다. 대신 우대정책을 펴는 이슬람교도로의 전환은 현지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기에 더없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리라.
  
광저우에서 만난 신안 해저유물
 
해상 실크로드에 관한 광저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려면 광둥성박물관(廣東省博物館)이 제격이다. 이곳에는 광둥성의 자연과 역사, 지리와 문화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광둥을 총망라한 16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별전시실에는 13~14세기 동아시아 문화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도자기이다. 초원길과 사막길을 통한 교류가 비단이 주종(主宗)을 이루었다면, 바닷길을 통한 교류의 주종은 중국의 도자기였다. 그래서 일명 ‘도자기의 길(陶瓷之路)’이라고도 부른다. 아랍여행가 이븐 바투타도 광저우에 들러 당시 도자기 수출로 번창한 항구의 모습을 목도,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 도기(陶器)야말로 도기 중에서 최상의 것이다. 광저우는 대도시의 하나로 시가지가 대단히 아름답다. 가장 큰 시장은 도기시장으로 이곳에서부터 중국 각지는 물론 인도·예멘 등지로 수출된다.〉
  
방문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 간 당대 문화교류 이해를 도모하는 특별전시가 기획되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신안 해저 유물선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해상무역 활동의 결과물인 도자기와 목간(木簡) 등 총 4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안 유물선은 1975년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들이 걸려 올라오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 후 11차례의 발굴을 거쳐 총 2만3500여 점의 유물을 인양하였다. 이 중 2만600여 점이 중국에서 생산된 도자기였다. 이 배는 길이 30여m의 송나라 상선(商船)으로 한반도를 경유지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국제무역선이었다. 특별전은 우리의 신안 해저 유물선의 유물을 중심으로 중국 현지에서 생산된 같은 종류의 도자기를 비교 전시하여 이해도를 넓혀주었다.
 
신안 해저 유물선에서는 많은 수는 아니지만 고려청자도 발굴(7점)되었다. 그런데 제작시기가 침몰 당시보다 100여 년을 앞선 것이었다. 골동품과도 같은 청자가 어떻게 이 배에 있었던 것일까. 추측건대 고려가 송나라로 수출한 청자를 중국 상인이나 일본인들이 다시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중국인들의 아쉬워하는 기운도 느껴졌다. 신안 유물선에서 나온 많은 양의 도자기 때문이다. 현재 국제법상 자국의 해안에서 발굴된 난파선은 그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도해(多島海)에다 조류 또한 거세 바닷속에는 아직도 많은 난파선이 있을 것이다. 더욱 활발한 인양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보물선을 찾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해양의 역사를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등록일 : 2019-04-09 09:56   |  수정일 : 2019-04-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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