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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다시 보다

의사는 원흉 저격 순간에도 무고한 희생을 염려했다

글 |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2019-03-28 09:52

▲ 안중근 의사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필사본. 육필 원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의사는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불굴의 독립투사다. 하지만 우리는 의거(義擧) 자체에만 열광한 나머지,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더듬어보려는 노력은 오히려 소홀히 하지 않았나 싶다. 심지어 그가 죽음을 앞두고 절절(切切)한 회고록을 남겼다는 사실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회고록이 난무한다. 1980년대 이후 대통령들도 예외 없이 회고록을 냈다. 하지만 그 두껍고 으리으리한 회고록들은 한결같이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심지어 회고록으로 인해 법정을 드나드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그 밖에도 감동적인 회고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회고록 하면 으레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감동과 교훈을 주는 진실된 회고록이 있었다. ‘백범일지’가 대표적이다. 우직한 투사가 한 땀 한 땀 적어내려간 삶의 역정은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것은 후세에 독립의 결의를 물려주기 위한 유서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삶의 이면도 숨기는 법이 없다. 도피 중인 자신과 동고동락하다 헤어진 중국 여성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도 솔직히 토로한다.
   
   ‘백범일지’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감동적 회고록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1910)이다. 이것은 의사가 옥중에서 자신의 30여 평생을 담담히 되돌아본 자전(自傳)이다. 응칠은 의사의 자(字)다. 의사는 자신의 가슴과 배에 점이 일곱 개 있어 그런 자가 붙었다고 알려준다.
   
   이 문서는 그의 사후 거의 60년 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9년부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으로 된 필사본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흔히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의 육필 원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나마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의사는 황해도 해주의 진사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나 어려서부터 학문보다 오히려 사냥을 좋아했다. 스스로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16세 결혼하던 해, 동학당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부친은 포수들을 끌어모아 동학당을 토벌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이때 의사가 앞장서서 동학당 무리를 격퇴했다. 부친의 민병대는 군량 천여 포대를 노획했다. 1894년 12월이었다.
   
   이듬해 여름에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작년 전쟁 때 동학당이 실어온 천여 포대의 곡식은 본래 아무개의 물건이니 수량대로 내놓으라.” 나라를 위해 고생한 사람에게 상은커녕 매가 돌아왔다. 실제로 아무개라는 세력가는 부친을 해치려 대들었다. 사태 확인차 상경했던 부친은 다급하게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한동안 머물며 강론도 듣고 성경도 읽었다.
   
   그 무렵 의사는 기울어가는 나라에 울분을 토로하며 기방(妓房)도 드나들었다. 그리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어디서 산다는 말만 들으면, 언제나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갔다”. 하지만 귀향한 부친의 권유로 빌렘 신부로부터 온 가족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의사의 세례명은 도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의 이름이다. 실제로 교리에 감명을 받은 의사도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에 나섰다. 자서전에는 의사의 전도 내역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의사는 백성들의 돈을 떼어먹거나 남의 처와 가산을 강탈한 관리들에게 항거하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젊은 청년 안중근은 울분을 터뜨렸다. “저같이 악한 정부를 한 주먹으로 두들겨 개혁한 뒤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쓸어버리고 당당한 문명 독립국을 이루어, 명쾌하게도 민권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기울어가던 나라가 이제는 독립을 잃게 되었다. 의사는 밖에다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 사는 조선인 권력가나 재력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우연히 아는 신부를 만나 “돌아가 교육사업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귀국했다. 마침 의사의 귀국 직전에 부친이 운명했다. “나는 술을 끊기로 맹세를 했고, 대한이 독립하는 날까지로 그 기한을 정했다.”
   
   이듬해(1906년)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태가 다급하게 돌아가자, 의사는 1907년 가족과 이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일대를 돌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마침내 200~300명 규모의 독립군을 모아 지휘관이 되었다. 1908년 6월 함경북도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퇴하였다. 갖은 고생을 하며 겨우 목숨을 건져 물러났다.
   

   1909년(31세) 1월 동지 12명과 단지(斷指) 맹세를 했다. 그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신문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의사는 곧 동지 몇 명을 규합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10월 26일 아침 9시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의사는 군중의 무리에 있다가 뛰쳐나가며, 맨앞의 노인에게 권총을 네 발 쏘았다. 하지만 확실치 않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세 발을 더 발사했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 잠깐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피격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졌으나 이내 절명했다.
   
   의사는 이토의 죄목을 낱낱이 열거하며 법정 투쟁에 들어갔다. 법정은 그가 원한 또 다른 전쟁터였다. 그에 대한 대우는 비교적 후했다. 이 사건이 워낙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또한 의사의 의연함에 상당수 일본 관리들이 감복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이 의사의 글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의사는 그중의 일부와는 진심 어린 친교를 나누기도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그를 찾아온 빌렘 신부의 성사(聖事)를 받고 “꿈과 같고 취한 것 같아 기쁨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의사의 모친은 수의(壽衣)를 손수 지어 보내며 당부했다. “당당히 죽음을 택하여…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 항고를 포기한 의사는 ‘안응칠 역사’를 탈고하고, 이어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가 3월 26일 순국했다. 아내에게는 큰아들을 사제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의사의 집안은 본래 왕조에 충성을 다한 유학자 가문이었다. 그래서 의사도 동학당 토벌에 앞장섰다. 하지만 왕조는 그를 배신하며 점차 일제에 예속되어갔다. 의사는 기독교에 귀의하고 교육계몽운동을 펼치다가 곧이어 무장투쟁의 길에 투신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조선독립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동양평화였다.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평화를 염원하고 생명을 사랑했다. 심지어 이토를 저격하는 순간에도 억울한 희생을 염려할 정도였다.
   
   감동적인 회고록이 없는 사회는 척박한 사회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자랑스러운 선조가 계시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부피는 작아도 무게는 천근이다. 순국 109주년, 영전에 술을 한 잔 가득 부어 올린다.
주간조선 2550호
등록일 : 2019-03-28 09:52   |  수정일 : 2019-03-2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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