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FUN | 피플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고미영이 떠나며 남긴 선물 ‘국립산악박물관’

글 | 이인정 UAAA 회장   정리 | 김기환 차장

전 세계 산악인들이 부러워하는 우리의 긍지이자 자랑
 
본문이미지
행사장에서 만나 이인정 회장과 기념촬영을 한 고미영, 박영석, 김재수 대장. 사진 이인정 제공

얼마 전 ‘죽음의 계곡 10동지 사고’ 50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나는 구인모씨와 함께 생존자 자격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사고를 당한 고인들이 살아계셨다면 국가 발전에 큰 역할을 했을 텐데 안타깝다. 살아남은 나는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벌써 5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내게 산은 아픈 추억이 많은 곳이다. 다행스럽게 지난해 노루목에 안장되어 있던 ‘10동지 묘역’을 이전하고 추모비는 국립산악박물관으로 옮겼다. 힘든 일을 추진한 한국산악회 정기범 회장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한다. 
 
2009년 7월, 나는 지인들과 백두산을 여행하던 도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하다 실종됐다는 소식이었다.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행을 백두산에 남겨 두고 먼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하니 그녀의 소속사인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대한산악연맹 회장이었던 나는 곧바로 과천 코오롱스포츠 사무실로 이동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고대책반을 조직하고 유족과 소속사 간 의견을 조율했다. 무엇보다도 고미영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다. 파키스탄 국경지대라 수색이 쉽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헬기를 띄워 그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김재수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목숨을 건 모험 끝에 고미영의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미영의 장례는 국립의료원에서 치렀다. 전국에서 많은 산악인들이 찾아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무총리부터 유명 정치인까지 수많은 이들이 문상을 왔다.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산악인의 장례식이었다. 나도 당시 살아 생전 가장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훨씬 많이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고미영은 스포츠클라이밍 선수 출신의 히말라야 등반가다. 한때 몸무게가 68kg까지 나갔던 그녀가 스포츠클라이밍에 입문해 감량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전업선수로 활동해 성공을 거뒀다. 그녀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등반경기대회 9연패를 달성하고, 아시아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서도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여섯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 빙벽 등반을 배운 지 3년 만인 2002년 세계 선수권대회 4위에 오르고, 이듬해 2003년 월드컵 랭킹 5위에 올랐다. 스포츠클라이밍과 아이스클라이밍 분야에서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후 산을 제대로 다녀보고 싶다고 결심하고 고산등반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코오롱스포츠와 손잡고 김재수 대장을 등반매니저로 영입한 뒤 승승장구했다. 특히 한 시즌에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3개를 연속으로 오르며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2006년 초오유 등정을 시작으로 2009년 7월 낭가파르바트에 이르기까지 8,000m급 11개봉을 오르는 데 걸린 기간은 2년 9개월에 불과했다. 이러한 세계 최단기간 등정은 유례가 없었다. 하지만 8,000m 거봉 11개를 오르고 생을 마감했다. 
 
고미영과 오은선의 경쟁도 기억에 남는다. 소속 회사가 달랐고 언론 등 주변에서도 두 사람의 경쟁구도를 부각시켰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그들은 더욱 등반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경쟁이 화제가 되어 산악계가 주목 받기도 했다. 과도한 경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고미영의 발인이 있던 날 새벽 1~2시경 당시 산림청장이던 정광수씨가 빈소를 방문했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국립산악박물관’ 설립에 대해 처음 논의했다. 
 
세계적인 산악강국인 우리나라에서도 뭔가 정부 주도의 사업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국립산악박물관’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고미영 사후 5년 만인 2014년 10월 29일 ‘국립산악박물관’이 문을 열게 됐다. 내가 늘 국립산악박물관을 ‘고미영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박물관 시설이 완성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치를 원하는 지차체가 많았지만, 결국 설악산이 보이는 속초로 최종 결정됐다. 공동묘지였던 부지에 박물관을 세우느라 속초시장과 담당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노력 덕분에 무사히 국립산악박물관이 완성됐다. 나는 기공식 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산악사에 ‘국립’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설이 처음 생긴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산악인들의 긍지와 문화, 역사가 담겨 있는 시설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고미영이 떠나며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믿는다. 
 
국립산악박물관의 시설은 현대적이지만 격조를 갖추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전시물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초기에는 내가 수십 년 동안 모은 것을 기탁해 전시관을 꾸몄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좀더 다양한 기획과 전시품 발굴이 필요하다. 
 
고미영의 장례식 때 유품을 태우려는 가족들을 내가 말렸다. 당시 유족으로부터 전해 받은 카고백 2개 분량의 유품을 가평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것도 빨리 정리해서 국립산악박물관으로 옮길 예정이다. 프랑스 샤모니나 스위스 체르마트 산악박물관에 가면 역사를 간직한 유품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 끊어진 자일과 찢어진 옷과 신발도 모두 산악운동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2015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산악연맹UIAA 총회 때, 세계 각국 산악계 대표들이 단체로 속초국립산악박물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김창호의 강의를 듣고 전시관과 체험시설 등을 돌아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작은 나라 한국에서 많은 산악인이 배출되고, 정부가 이렇게 큰 시설을 만들어준 것이 놀랍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미영의 선물’ 국립산악박물관은 한국 산악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설임이 틀림없다. 
 
본문이미지

이인정(李仁禎·74) 
아시아산악연맹 UAAA 회장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산악운동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는 산악계의 큰형님입니다. 1969년 설악산 10동지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잡지 월간<山>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1988~1998), 한국산악회 부회장(1998~2002), 한국등산학교 교장(2000~2008), 주한네팔 명예영사(2001~2006) 등 산악계의 주요 직책을 거쳤고, 2005년부터 11년 동안 대한산악연맹의 수장을 맡아 한국 산악계를 이끌었습니다. 
출처 | 월간산 2019년 3월호
등록일 : 2019-03-14 09:58   |  수정일 : 2019-03-14 09:59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