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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전문의 정혜신
존재가 거부당한 청년실업 세대 당신은 옳다, 늘

전문가의 본격 심리학 서적이 오랜만에 주목받고 있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 출간 한 달 만에 6쇄를 찍었고, 온라인 서점마다 종합 20위권 안에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국내 심리학 분야의 베스트셀러 저자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일색이었다. 사사로운 개인의 고백적 치유 에세이가 대세였던 최근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의 인기는 이례적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 정혜신은 7년간 절필했다. 펜을 던져두고 마음의 병으로 생사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일상 도처의 사람들은 물론, 여러 형태의 사회적 재난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신과 의사 면허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라고. 이 책은 잠재적 치유자인 이 땅의 모든 이를 향한 ‘마음의 심폐소생술’ 매뉴얼인 셈이다.

글 | 김민희 톱클래스 기자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혜신 정신과전문의에게 “책 반응이 좋아 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를 먼저 건넸다. 별 뜻 없이 건넨 인사에 그는 “나에겐 이게 책이 아니에요”라고 정색하며 말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동아줄이나 밥 같은 것이면 좋겠어요. 삶을 격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적 CPR 매뉴얼이면 좋겠어요.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이어서 온 체중을 실어서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축하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에게 청년실업률 10% 시대, 청년 세대가 느끼는 아픔에 대해, 또 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감과 위로에 대해 물었다.


2040세대가 가장 많이 토로하는 마음의 병은 뭔가요.

“이력서를 수십 번 내도 아무런 응답을 못 받는 청년이 많아요. 그림자 취급을 당하는 거죠. 면접을 봐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 사회적으로 거부당하는 경험이 쌓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집단으로 쌓이는 상처예요. 그 세대의 내면을 집단적으로 불안전하게 만들고, 심리적 지지기반 자체를 갉아먹게 돼요.”


세대의 집단 상처라는 얘기군요.

“맞아요. 그런데 집단 현상은 공유할 수 있지만 개인 상처까지 공유하기는 힘들어요. ‘왜 그렇게 됐을까’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자기 검열이 심해지죠. ‘내가 자기소개서에 뭘 잘못 썼나’ ‘면접하러 갔을 때 옷을 잘못 입었나’ 식으로. 나만 그런 것 같고, 나만 약한 것 같죠.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괜찮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모두 그렇구나’를 인식해야 해요. 세대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을 보호하는 경계가 생겨요. 부모들의 태도도 중요해요. ‘네가 못나서 그래’ 식의 언행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몰이해적 태도예요.”


‘우리 땐 먹고살기 더 힘들었어. 네가 안 되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야’라고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꽤 있는데요.

“물리적 상황이나 형편은 그때가 더 어려웠어요. 하지만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거나 삶이 그림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죠. 이웃과 동네가 살아있었고, 경사가 생기면 온 마을이 잔치를 벌였어요. 존재가 존재를 의식하고 존중하고 살았어요. 존재 측면에서 보면 지금이 훨씬 더 유해한 환경이에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환경인데 사실 산소가 부족한 상황이에요. 숨을 쉴 수 없는 사람한테 산해진미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시대의 상처도 많습니다. 폭력이 난무했고, 체벌이 흔했고, 등수로 줄 세우기가 당연했지요.

“그때가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이긴 했어요. 하지만 그런 상처를 안고도 숨을 곳이 있었고, 치유할 곳이 있었어요. 관계가 살아있었죠. 무조건 나를 인정해주고 예뻐해 주는 외할머니 같은 존재가 있었어요. 지금은 그런 구조가 없어졌어요.”


수십 번 탈락하던 청년이 취업에 성공하면 존재를 거부당했던 상처가 치유될까요.

“둘은 별개예요. 직장을 구한다고, 대기업에 취업한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은 물리적으로 해소되지 않아요.”


이 세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녀를 어떤 철학으로 키울지 궁금합니다.

“(한동안 침묵하다 안타까운 눈초리로) 가정을 안 만들겠죠.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에너지가 고갈돼요. 탈진한 상태여서 긍정적인 전망을 갖고 무언가를 하려는 여력 자체가 없어요.”


낮은 결혼율의 근본적 문제는 존재 자체가 거부당한 상처에서 비롯됐다는 얘긴가요.

“그렇게 봐요. 이건 일자리를 주고 안 주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자식이 둘 있는데, 첫째는 변호사, 둘째는 취준생(취업준비생)이라고 치죠. 취준생을 다그치면서 ‘형을 봐라. 너는 도대체’ 식으로 대하면 존재 자체로 봐주지 않는 거예요. 성과와 성취에 따라 자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을 줘요. 그런 시선에 기성세대가 물들어 있어요. 공부 잘하면 예뻐하고, 못하면 무시하는 시선이 문제이지, 취준생이면 어떻고 변호사면 어떤가요. 자식이 막노동꾼이어도 부모가 ‘네가 이렇게 애쓰는구나. 열심히 산다’ 식으로 인정해주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트렌드코리아 2019》에 한국 사회를 읽는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감정대리인’이 제시됐지요. 내 감정을 이모티콘이나 관찰형 예능 등 대리인을 통해 표출하고 해소한다는 거죠. 왜 그럴까요?

“먹방이 대세인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먹어주세요’라고 청하잖아요. 자기감정이 마비돼 가고 있어요. 감정은 존재의 핵심인데.”


감정이 없는 것보다는 감정의 대리인이라도 두는 게 낫지 않나요.

“밥 이야기를 백날 한다고 허기가 면해지나요.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지요. 감정의 대리인을 두면 잠시는 넘어갈 수 있어도 한계가 있어요. 나중에 심리적 대가를 치르게 돼요.”


요즘 젊은 유튜버들을 보면 자기표현이 분명한데요.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SNS에서도 자기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진짜 ‘나’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내가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유사 자기표현이죠. 진짜 자기는 빠져있어요.”


아랫세대와 윗세대가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 주려면 누가 키를 쥐고 있을까요.

“소통이 안 되는 건 무조건 부모 책임이에요. 어린아이일수록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아요. 아이에게는 아빠가 과장이든 차장이든 상관없어요. 그냥 아빠니까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윗세대는 어떤가요. 기대에 어긋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식으로 존재를 부정해요.”


어른도 한때 아이였는데, 어느 단계에서 변했을까요.

“엄마는 이러이러한 존재여야 한다,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성이 덧씌워지면서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이도 다 알아요. 그 마음만 알아주고 읽어주면 잘 자라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각자의 ‘다움’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부모다움, 학생다움 같은. ‘다움’의 당위와 있는 존재 그대로 봐주는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 듯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충돌하지 않아요. 따끔하게 이야기하는 건 거의 불필요해요. 마음만 잘 알아주면 스스로 그 마음을 알고 받아들여요. 공감이라는 건 그 사람의 존재에 눈을 맞추는 것이고, 마음에 봄을 불러오는 거예요. 내가 수고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 마음에 봄이 오면 모든 게 녹아요. 흉악범도 마찬가지예요. 범죄를 저지른 그 마음을 알아주면 스스로 여죄까지 고백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얼마 전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이 있었지요. 범인을 만나면 먼저 무엇을 물어볼 건가요.

“그때 네가 밖에 나갔다가 다시 와서 그랬는데, 몹시 화가 났나 보다. 나갈 때 어떤 마음이었니? 싸웠는데 어떤 일이 있었니? 무엇 때문에 화가 났니?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물어보겠어요.”


원인을 묻는 건가요.

“그것과는 달라요. ‘왜 그랬니’가 아니에요. ‘네가 화가 났을 때는 이유가 있었다’는 거죠.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몰라요. 논리적으로 설명하라는 건데, 자기가 왜 그랬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주목해주면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렇다고 살인을 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마음을 알아줘야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거죠.”


심리적 CPR의 핵심 질문이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했지요. 이 질문이 왜 중요한가요.

“‘네 마음이 어떻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이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의 반응이 대번 달라져요. 꺼져가는 심장에 CPR을 가하면 박동이 돌아오듯, 그 질문을 받으면 멈칫해요. 마음을 주목하고 궁금해하는 질문이니까. 존재의 핵심은 마음이고, 감정이라는 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
등록일 : 2018-11-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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