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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3]
엑스레이 아티스트 의사 정태섭

“이 두근거림, 사춘기 이후 처음”

글 | 김민희 주간조선 차장대우

▲ 엑스레이 아트 ‘와인을 마시는 여성’ 앞에서. 40장을 찍어 합성했다. 매고 있는 넥타이도 그의 작품이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이 두근거림, 사춘기 이후 처음 느껴봅니다. 인생이 줄곧 내리막길 느낌이었죠.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서는 좀비에 가까운 삶이었어요. 살아남기 위해 밤을 새워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위해 영혼은 점점 굳어져갔어요. 계속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런 두근거림은 다시 없었을 겁니다.”
   
   연세대 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태섭(63) 교수. 그는 영상의학과 분야 명의로 손꼽힌다. EBS 명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에겐 멋들어진 타이틀이 하나 더 있다. 최초의 엑스레이 아티스트. 그는 이 타이틀을 갖게 되면서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며 흥분했다. 엑스레이 아티스트는 엑스레이로 사물을 찍은 후 색을 곱게 입혀 작품으로 만드는 작가를 말한다. 그의 작품은 초·중·고교 미술교과서 7종과 초등 4학년 과학교과서에도 수록됐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아 프랑스·러시아·미국 아트페어에 초청됐고, 소버린예술재단의 ‘2013년 아시아 아트 프라이즈 30’에 선정됐다. 국내에서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작품 4점이 등장하면서 화제가 됐다.
   
   지난 2월 초 서울 양재동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정태섭 교수의 표정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여기가 제 놀이터입니다.” 흰 벽마다 꽉 들어찬 작품이 반긴다. 엑스레이를 통과한 꽃잎들은 겹겹 모양으로 하늘거린다. 파스텔톤으로 은은하게 색을 입힌 꽃잎들은 꽃의 가녀림과 생명성을 소리 없이 뿜어내는 듯했다. 차가운 기계로 꽃의 생명성을 기막히게 표현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스튜디오 입구에는 폭 2m는 족히 돼 보이는 대형 피그먼트 프린터가 있다. 엑스레이 작품을 인쇄하는 프린터다. 거실 중앙의 널찍한 작업대에는 온갖 신기한 도구들과 조막만 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소라고둥 스피커, 비타민 음료 뚜껑으로 만든 손톱만 한 공예작품, 넥타이와 가방, 스카프…. 그는 스무 가지가 넘는 취미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날 매고 있는 넥타이도 직접 디자인했다.
   
   “이 작품이 첫 작품입니다.” 정 교수의 손끝이 해골 모양의 작품을 가리켰다. 작품명은 ‘입속의 검은 잎’. 자신을 엑스레이 아티스트로 만들어준 바로 그 작품이다. “2006년 10월 늦은 밤이었어요. EBS TV에서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을 소개하는데, 순간 ‘이거다, 이걸 엑스레이로 찍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잠결에 벌떡 일어났죠. 입속의 검은 잎은 관념이니 시각으로 표현할 길이 없잖아요. 엑스레이로는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온 집안을 뒤져 쇠로 만든 꽃 모양 브로치를 찾아냈다. 진짜 꽃잎과 나뭇잎은 밀도가 낮아 엑스레이로는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 다음 날 아침, 그는 꽃 브로치를 입에 물고 엑스레이 촬영대 앞에 섰다. 후배에게 부탁해 입속에 잎을 문 자신을 찍게 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농도 조절에 문제가 있는 데다 충치 치료를 받은 흔적이 영 눈에 거슬렸다. 충치 없는 건치 후배의사를 섭외해서 다시 찍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찍은 후 합성 과정이에요. 여러 장을 찍어 합성해야 하는데, 한 장처럼 보이려면 아주 섬세한 작업이 요구됐습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적게는 수시간부터 많게는 수백 시간에 이른다. 와인 마시는 여성의 전신 작품을 위해서는 무려 40장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와인에는 엑스레이에 잘 나오도록 하는 약품을 탔다. 덕분에 와인이 식도를 타고 쪼르르 내려가 위와 십이지장을 지나는 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와인의 붉은색은 포토샵 작업을 통해 별도로 입힌 것이다.
   
   
   ‘되면 한다’가 아니라 ‘하면 된다’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내내 정 교수는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신나세요?”라는 질문에 그는 “해보면 알아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50세가 되면 인생이 드라이해져요. 이때 인생의 태엽을 다시 감는 기분이랄까요? 힘 빠진 태엽이 다시 드르륵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생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음 날 연세대 동문을 대상으로 특강이 예정돼 있다고 했다. 주제는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이 살고 싶다.” 얼마 전에는 이 제목으로 책도 냈다. “한번 보실래요?” 하면서 대형 스크린에 PPT 화면을 쏘고 즉석 리허설을 했다. “이거 보이시죠? 보통 30~40대에 열심히 살다 보면 50세에 피크가 옵니다. 인생이 일모작일 경우예요. 그런데 이거 보실래요? 40~50대에 또 다른 삶을 준비하면 60대 이후에 피크가 한 번 더 옵니다. 두 번의 피크가 찾아오는 겁니다.”
   
   “되면 한다가 아니라 하면 된다.” 정 교수의 좌우명이다. “처음엔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엑스레이 아티스트라는 분야가 있는지도 모르고 시도한 겁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니 부딪혀가면서 배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해보자 했죠. 사람들은 흔히 ‘이게 될까?’ 의구심을 갖다가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 저는 무조건 하고 봅니다. 될 때까지요.”
   
   이런 도전정신은 그의 아버지 영향이 크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너는 남들이 하는 거 따라하지 말고 남이 안 한 것을 찾아서 해봐라”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의 롤모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의학과 예술에 두루 능통한 전천후 르네상스형 인간을 꿈꾸었다. 그 역시 의사이자 아티스트가 됐으니 어느 정도 꿈을 이룬 셈이다.
   
   ‘될 때까지 한다’는 철학은 일면 무조건적 성실을 강요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꾸준히 해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되돌아나올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질문하자 그는 준비된 듯한 답변을 내놨다. “전문 영역에서 성과를 내려면 만 시간이 걸린다고 하잖아요. 그 영역이 나의 전문 영역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최소 1000시간 정도는 해봐야 해요. 적어도 반년 정도. 아니라고 생각해도 걸어온 길을 잘 갈무리해서 정리해 두는 게 좋습니다. 인생 길잖아요. 다른 것을 하다가 그 일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 정태섭 교수의 취미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자신의 작품으로 디자인한 핸드백, 넥타이, 스카프, 그리고 소라 스피커와 병뚜껑 공예 등.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1000시간 법칙
   
   일명 ‘정태섭의 1000시간 법칙’이라 할 만하다. 그는 열정이 타오르면 전문 영역의 일도 더 잘하게 된다고 했다. 엑스레이 아티스트가 되면서 의사로서의 명성도 날개를 달았다. EBS 명의에 선정되고, 세계적 학술지에 연간 2~3회의 논문을 게재한 것도 엑스레이 아티스트가 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너무 재미있게 놀면 남들이 질투할까봐 일도 더 열심히 했어요”라며 웃는다.
   
   또 하나, 그는 ‘집중과 몰입론’을 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않은 이력을 쌓아오면서 터득한 이론이다. “의사로서의 삶이 집중이라면, 아티스트로서의 삶은 몰입입니다. 의사로서의 삶이 이성적인 이공 계열에 가깝다면, 아티스트로서의 삶은 인문학과 예술 계통이지요. 의사의 집중은 엄청난 에너지 소모를 요구하지만 아티스트의 몰입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됩니다. 전자는 결과와 목표 중심의 작업이기에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후자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기에 스트레스가 오히려 해소되고 에너지가 충전된답니다.”
   
   엑스레이 아티스트로서 그의 위상은 세계적이다. 지난해 5월에는 네덜란드 엑스레이 아티스트인 아리 반트 리에트와 ‘국가대표 맞짱전’이라는 주제로 나란히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 분야 거장인 영국의 닉 베세이와도 만나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셋 중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시기는 애매하다. 정 교수는 “X선을 발명한 뢴트겐이 최초의 엑스레이 아티스트일 것”이라며 웃는다.
   
   첫 전시 전, 그는 12번 퇴짜를 맞았다. 미술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작품을 들고 무작정 인사동 갤러리를 찾아다닌 결과였다. 거듭된 문전박대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모두가 퇴짜를 놓았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모지 들고 다시 찾아갔죠. 안 해도 좋으니 이유라도 가르쳐 달라고요. 금과옥조 같은 조언들이 쏟아졌습니다. 감성을 더 담아라, 지금은 너무 기계적인 느낌이다. 채색을 해 봐라. 여러 장 합성해서 큰 사이즈로 구현해 봐라 등.”
   
   정 교수의 작품은 병원 곳곳에 걸려 있다. 강남 세브란스병원 로비는 물론 신촌세브란스 병원 로비, 그의 진료실과 강의실에도 있다. 사람을 진단하는 차가운 기계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곳곳에서 선보인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취미를 구상 중이다.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 소라고둥 스피커도, 비타민 음료 뚜껑으로 만든 공예도 그가 최초라고 한다. 휴대폰 모델별 소라 스피커가 다르다. “휴대폰 모델 뭐 쓰세요?” 하더니 딱 맞는 사이즈를 내민다. 소라 스피커에 휴대폰을 꽂자 음질이 확 달라졌다. 큰 고둥은 저음을, 작은 고둥은 고음을 잘 낸다고 한다. “이걸 왜 만들었냐고요? 소라고둥을 이용해 사진을 많이 찍다 보니 소라껍데기가 많이 생기는데, 버리기 아깝잖아요. ‘재활용할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비타민 음료 뚜껑도요. 작고 예쁜 뚜껑을 버리지 않고 펜치로 구부려 모양을 내면 이렇게 예술이 되거든요.”
   
   그는 비타민 음료 뚜껑을 구부려 고양이 작품을 만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이 다양하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40가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는 거 아세요?”
등록일 : 2018-02-13 14:19   |  수정일 : 2018-02-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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