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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 소녀 파리 가다…아크로밧 임재연 대표

글 | 황은순 주간조선 차장

15년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 날, 임재연(34) 아크로밧 대표는 노점용 리어카를 끌고 거리로 나갔다. 친구들이 해방감에 들떠 있을 때 그는 노점을 시작했다.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앞이었다. 진즉부터 그가 점찍은 곳이었다. 성형외과가 몰려 있는 곳이라 젊은 여성층 유동인구가 많았다. 국제시장에서 리어카 한 가득 떼어온 빈티지 옷은 매일 완판을 기록했다.
   
   오는 9월 말 그가 디자인한 수제 신발 ‘아크로밧’이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 무대를 누빈다. 파리 패션위크는 세계 4대 패션 컬렉션으로 패션 관계자들과 전 세계 셀럽들이 참가한다. 아크로밧은 걸그룹들이 신는 신발로 패션 바닥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뉴욕, LA, 홍콩의 유명 편집숍에도 입점해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 알리바바그룹이 운영하는 오픈마켓 타오바오의 ‘티몰’에도 입점했다. 심사가 까다로워 진입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파리행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패션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 계한희(30)씨와 협업으로 이뤄졌다. 계한희씨는 세계 3대 패션스쿨인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의 최연소 입학·졸업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웬만한 유학파도 살아남기 힘든 패션계에서 고졸 출신 임재연 대표의 성공은 이례적이다. 부산 노점상 소녀가 세계 패션의 중심 무대에 서기까지, 그의 도전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닥부터 시작해 몸으로 부딪히면서 ‘스펙보다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크로밧’ 매장이 있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만난 임재연 대표는 긍정 에너지가 넘쳤다.
   
   “아크로밧은 아직 작은 브랜드입니다. 이런 브랜드가 패션의 중심인 뉴욕 매장에 진출하고, 세계 패션 피플들 앞에 선다는 것은 한국의 신발 기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장인들을 못 쫓아간다? 환경은 훨씬 열악하지만 우리 신발 장인들의 기술은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장인들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기업이 많이 나와야죠.”
   
   그는 아크로밧처럼 국내 기술로 만든 작은 브랜드들을 키우는 것이 제조업체를 살리는 길이라면서 말했다. “우리도 프라다처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나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종잣돈 5만원의 시작
   
   그의 좌충우돌 성공기를 들어보자. 그는 미대 진학을 준비하던 명랑 여고생이었다. 책가방에 사복 넣고 다니면서 방과 후면 거리 패션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다. 고3 때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았다.
   
   집안을 돕자는 생각으로 수중에 있는 5만원을 들고 평소에 자주 가던 국제시장 구제옷집에 갔다. 티셔츠 한 장이 3000~4000원에 불과했다. 각각 다른 패션의 3벌이 완성됐다. 친구에게 입힌 다음 사진을 찍어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반 친구들에게 돌렸더니 주문이 쏟아졌다. 3벌을 팔아 25만원을 손에 쥐었다. 그 돈을 들고 다시 국제시장으로 달려갔다. 옷 보따리 몰래 나르느라 새벽같이 등교를 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모범학생이 됐다. 선생님 눈을 피해 옷을 팔아 몇 개월 만에 5만원을 200만원으로 만들었다. 대학 입학금이나 벌어 부모의 힘을 덜어주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는 대학 대신 창업을 택했다.
   
   “힘들기보다는 신났어요. 노점 1년 만에 돈 벌어 국제시장에 1평(3.3㎡)짜리 가게를 얻었습니다.”
   
   가게 이름은 ‘재동씨’. 시장 사람들이 씩씩한 그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었다. 1평짜리 가게는 4평(13㎡)으로 커졌고, 2호점에 이어 홍대에 3호점을 내면서 서울까지 진출했다. 온라인 쇼핑몰 하루 방문자가 하루 4000~1만명에 달했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의 삶은 오히려 편하고 여유로웠을 것이다.
   
   의류와 함께 구제 구두도 함께 팔았는데, 웬걸 구두는 내놓기가 바쁘게 팔렸다. 주로 유럽 쪽에서 들어온 구두로 편하고 디자인도 독특했다. 구제 물건이다 보니 똑같은 디자인이 없었다. 공급이 달렸다. 직접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중국 OEM 생산을 했다. 생산단가 1만원짜리를 4만~5만원대에 팔았는데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불량 반품이 많았다. 디자인만 흉내 내서 만들다 보니 신발에 구조적인 문제들이 많았다.
   
   “신발은 건강과 직결되는데 그대로 팔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 제작을 중단했어요.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의류 구입을 위해 유럽을 다니면서 수없이 구두를 신어봤다. 우리는 왜 이런 구두를 못 만들까. 착화감이 좋은 구두를 직접 사와 뜯어보고 연구했다. 그때 사들인 신발이 족히 200~300족은 될 것이다. 서양인 발에 비해 동양인은 발볼이 넓은데도 불구하고 앞코가 좁고 굽이 뾰족한 스틸레토힐이 대부분이었다.
   
   ‘워커처럼 편하면서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자!’ 목표를 세우고 성수동 신발골목의 장인들을 찾아나섰다. 장인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100% 망할 것을 장담했다. 생산단가를 따지면 성수동 수제화와 중국 OEM은 비교가 안 됐다. 장인들은 그동안 협업하자고 찾아온 기업들에 뒤통수를 한두 번 맞은 것이 아니었다. 샘플만 만들고 중국, 베트남으로 생산공장을 옮기기 일쑤였다. 시간만 나면 성수동으로 달려가 장인들 옆에 붙어 앉아 심부름 하면서 1년여를 설득했다.
   
   2011년 ‘아크로밧(Acrobat)’ 론칭의 배경이다. 초기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듣보잡’ 브랜드의 10만~30만원대 구두를 선뜻 집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이니 개발비, 제작비가 만만치 않았다. 10여년 벌어놓은 돈 쏟아붓고 집 보증금까지 빼는 바람에 두 달여 찜질방을 전전했다. 아크로밧을 살린 건 고객들의 입소문이었다. 에이핑크, 씨스타, 트와이스 등 걸그룹이 무대에서 격렬한 춤을 출 때 신는 신발로 화제가 되고 디자이너 김민주, ‘푸시버튼’ 디자이너 박승건 등이 협업을 제안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는 아크로밧을 토털 패션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이다. 그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은 가족이다. 남동생 임종헌(33)씨는 별도법인으로 만든 브로이스터를 맡고 있고, 온라인 쇼핑몰 ‘재동씨’는 올케인 최연우씨가 맡았다. 캐주얼 가방, 신발을 만드는 브로이스터는 최근 신라면세점 입점계약을 맺었다. 바닥부터 한 계단씩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는 9월 파리 패션위크 무대를 또 한 번의 기회로 만들려고 한다. 아직도 버는 돈은 아크로밧 연구·개발비에 쏟아붓고 있다는 그가 당차게 말했다.
   
   “유행에 기대 반짝 떴다 사라지는 브랜드들은 역사를 만들기보다 돈을 만드는 기업입니다. 당장 눈앞의 돈을 좇기보다 100년 가는 브랜드로 키울 겁니다.”
등록일 : 2017-09-07 09:03   |  수정일 : 2017-09-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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