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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20년간 전국의 구멍가게를 그려온 화가 이미경

화가 이미경의 그림에 등장하는 구멍가게 중 70~80%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길 위에서 만났던 가게도, 그 가게를 지키던 어르신과 고목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확장된 도로와 새로 지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는 구멍가게들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라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글 | 이선주 톱클래스 객원기자   사진 | 김선아

수십 년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지닌 채 퇴락해가고 있는 구멍가게들. 한때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지만, 이제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사라져가는 구멍가게를 그림으로 되살리는 작가가 있다. 이미경 작가는 1997년부터 20년 동안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구멍가게들을 찾아내 펜화로 그려왔다. 낡고 볼품없는 구멍가게들이 그의 그림으로 재탄생하면서 애틋하면서도 따뜻한 정서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그림과 글을 담아 올해 봄 출간된 책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프랑스, 일본, 대만 등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고, 영국의 온라인 매거진 〈크리에이티브 붐(Creative Boom)〉과 BBC, 중국의 판다TV 등이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오는 8~9월 서울 이마주 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이미경 작가를 경기도 남양주시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가는 “20년 전 구멍가게를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작업에 몰두하기 어렵고 ‘이러다 개인전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떨어졌을 때 그는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린 그림도 아니었다.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그림을 그려야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아서 그렸다고 한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기 직전 결혼한 그는 첫아이를 임신한 후 붓을 놓았다. 유화물감 냄새가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이 둘을 낳은 다음에는 짬이 날 때마다 펜을 들고 뭐든 그렸다.

“1997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관음리에서 살 때였어요. 벚꽃처럼 눈이 흩뿌리던 날 오랜만에 찾은 구멍가게가 문득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적갈색의 슬레이트 지붕은 오묘한 빛을 발하고 유리창에 무심히 써내려간 ‘음료수’란 붉은색 글씨가 시선을 유혹했습니다. 손으로 뚝딱거리며 만든 것 같은 벤치는 넉넉히 쉴 자리를 제공하고, 먼 데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눈에서 삶의 혜안이 느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 가게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뛰면서 즐겁고 행복했어요.”


어린 이미경이 만난 서울의 구멍가게

〈양촌리에서〉, 80×45cm,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4
그는 구멍가게에 왜 그렇게 끌렸을까? 구멍가게는 그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는 대여섯 가구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두메산골인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구멍가게는 별천지였다. 아빠가 동전이라도 주시면 쪼르르 달려가 달고나를 사 먹곤 했다. 달고나가 국자 한가득 부풀어 오를 때 차오르던 행복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해가 저물고 동네가 어두워져도 구멍가게 앞은 가로등 불빛으로 환했고, 저녁 먹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둘 모이는 신나는 놀이터가 됐다. 그는 “유년시절의 가장 즐거운 기억들이 구멍가게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한 후 그는 시간만 나면 아이들까지 차에 싣고 전국을 돌면서 구멍가게들을 찾아다녔다. 가게에 들어가 음료나 간식거리를 산 후 수십 년 동안 그곳을 지켜온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와 그림으로 옮겼다. 붓이 아니라 펜으로 꼼꼼히 그려냈다.

“눈에 쏙 들어오는 모습이나 맛깔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구멍가게를 발견하면 흥분으로 마음이 떨렸습니다. 가게마다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이 조금씩 달라서 그 동네의 정서까지 읽을 수 있었어요. 군산상고 뒷골목 ‘석치상회’를 지키던 백발의 주인할아버지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티끌 하나 없이 쓸어놓은 가게 앞, 반질반질 잘 닦여 있는 원목 진열장이나 정갈하게 잘 정리된 물건들이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보여줬죠. 손수 쓰셨다는 반듯한 글씨체의 간판에서 할아버지의 꼿꼿함이 전해졌습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이어온 삶에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이 느껴집니다.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에 마음이 정화되면서 ‘내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구멍가게는 인격체다

〈감나무집 가게〉, 59.5×73cm,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6
그의 책에는 구멍가게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는 구멍가게를 그저 건물이 아니라 세파를 꿋꿋이 견뎌온 하나의 인격체처럼 그린다. 사람의 주름을 그리듯 오랜 세월 지나오며 색이 바랜 차양, 깨진 벽돌, 수시로 드나들었을 출입문의 얼룩까지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그려나간다. 솜씨 좋기로 유명해 대소사가 있는 집마다 불려 다니신 외할머니, 양장점을 운영하신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 꼬질꼬질 꼼꼼하게 그리는 작업이 잘 맞는다고 한다.

“중심이 되는 이미지를 중앙에 배치한 후 자잘한 사물들로 아기자기하게 화면을 구성합니다. 날카로운 선을 촘촘하게 중첩시켜 형상을 만들면서 배경은 하얗게 남겨 여백의 미를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몸을 낮춘 채 비바람과 모진 세월을 견뎌낸 구멍가게를 작지만 단단하게 그리려고 해요. 왜 좀 더 근사한 건물을 그리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보통의 삶에 깃든 소소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더 끌립니다.”

그의 그림 속 구멍가게 옆에는 동백나무, 자목련과 백목련, 벚나무, 매화나무, 산수유, 감나무, 대추나무, 버드나무 등이 서 있다. 활짝 핀 꽃이나 푸르른 잎사귀, 곱게 물든 단풍을 달고 있는 나무들 덕에 작고 초라한 가게도 아름답게 보인다.

“살림집을 겸하는 구멍가게를 지을 때 보통 나무 한 그루도 같이 심었습니다. 오래된 가게일수록 나무도 크죠. 구멍가게와 나무가 함께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 동네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본 구멍가게를 그리긴 하지만 100% 똑같은 모습은 아니에요. 집과 나무의 배치를 바꾸거나 지붕 색깔을 바꿔 좀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줄 때도 있죠.”

〈봄날가게-자목련〉, 100×100cm,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구멍가게 그림이 어느 정도 쌓였을 때 그는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이미지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 그림 이미지가 모르는 사람들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퍼져나갔다. 개인전 한 번 하지 않고도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07년, 10년 동안 그려온 구멍가게 그림들로 첫 개인전을 연 후 전시 초청이 이어졌다. 홍콩, 일본에서 열린 아트페어에도 참가했다. 그림을 사겠다는 요청이 쏟아져 개인전을 할 때만 그림을 판매하기로 원칙을 정해놓을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은 너무 쫓겨요. 전시를 앞두고 하루에 15시간씩 작업하고 있습니다. 작업실로 올라오는 길이 온통 벚나무인데, 이번 봄에는 벚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어요. 무엇이 중요한지 놓치고 사는 거죠. 쉰 살이 다 되어가니 ‘건강을 해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삶의 균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제 하루에 8~10시간만 작업하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아이들을 옆에 끼고 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구멍가게 중 70~80%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길 위에서 만났던 가게도, 그 가게를 지키던 어르신과 고목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확장된 도로와 새로 지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는 구멍가게들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라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다”고 한다.
등록일 : 2017-08-07 09:56   |  수정일 : 2017-08-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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