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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의 아버지’ 필립 질레트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⑪ 서양스포츠를 전수한 선교사들

⊙ 윌리엄 레이놀즈, 조선 최초의 피겨 스케이터… 고종 주최 香遠亭 파티에도 참석
⊙ 윌리엄 전킨, 평양에 축구 傳授…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 라이벌전은 장안의 화제
⊙ 질레트, 1905년 연희전문에서 야구 가르쳐… 군산 永明學校에 야구부 설치
⊙ 스포츠 전수는 선교사들의 포교 전략… 고단한 조선 민중들에게 삶의 희망 전해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2015-07-17 09:25

1901년 YMCA국제위원회가 파송한 필립 질레트 선교사. 군산에 영명학교를 세워 1902년 야구부를 조직했다.
  〈어떤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딕시’(Dixie·남장로교선교회 서울지부가 있던 서소문 안을 일컫는 말)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인성부채’(종로5가 연못골 인근)에 있는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좁은 길을 빠져나와서 큰길로 들어서려는 찰나, 머리 위에 기름병이 가득 담긴 나무 쟁반을 이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며 걸어가고 있는 장사치 여인네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조심히 자전거를 운전하며 그 옆을 살짝 지나가려는 순간, 건너편에 있던 행인이 그것을 보고 그 여인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에 “조심하게”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바로 그때, 그 소리에 놀란 그 여인은 정확하게 내 자전거가 진행하려는 동선으로 성큼 발을 옮겨 내디뎠습니다.
 
  자전거는 피할 새도 없이 그녀와 바로 부딪쳤고, 그녀가 머리에 이고 있던 그 많은 기름병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습니다. 자전거를 운전하다 쓰러진 나는 머리, 그리고 입고 있던 외투 옷깃부터 시작해 밑자락까지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부서진 병들과 함께 내동이쳐졌던 나는 벌떡 일어나 울상이 된 여인네에게 급한 김에 지갑을 몽땅 털어 그녀의 성난 손에 쥐여주면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몸으로 사과의 말을 하고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주일 설교 말씀은 차고 넘치는, 충만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예복처럼) 설교자의 겉옷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름 향기가 온 예배당에 가득하였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경험주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웃음을 ‘우월심이 가져다주는 흥미로운 감정’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제가 이 도시 내에서 당한 자그마한 도발적 사건에 웃음을 금치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저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우월한’ 청중 여러분께 저 말고 웃음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분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향원정 스케이트 파티, 閔妃는 커튼 사이로 내다봐
 
1895년 1월 고종 주최의 스케이트 시합이 열렸던 향원정.
  매티 테이트(Mattie S. Tate) 양이 처음 조선 조랑말을 탄 것은 스케이팅 파티를 위해 한강으로 연습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옛날에 가정교육을 잘 받은 요조숙녀들이 했던 것처럼, 말을 옆으로 타려고 펄쩍 몸을 날려서 앉으려는 순간, 그만 그녀는 조랑말의 높이를 너무 높게 예측하는 바람에 조랑말의 반대 편으로 꽈당 하고 내동댕이쳐져 버렸답니다. 조선 조랑말의 높이가 너무 낮은 탓입니다. 평소 테이트 양이 항상 말타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소원이 이뤄진 순간입니다.
 
  그녀는 남부에서도 눈 구경 하기가 쉽지 않은 미주리 주 출신이었던 탓에 항상 스케이트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소원도 있었습니다. 1895년 1월, 고종 임금께서 외국인들을 초청해서 왕궁 안에 있는 향원정(香遠亭)에서 스케이팅 파티를 열었습니다. 향원정은 1만평(坪) 부지에 조성된 연못으로, 서울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야외 스케이트장입니다.
 
  이 사건은 테이트 양과 내가 함께 스케이트를 타다가 생긴 일입니다. 왕은 정자 안에서 긴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다 혹여 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너무나도 즐거워 배꼽을 잡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일이 일어나고야 만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기우뚱거리는 테이트 양의 균형을 맞추어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얼마나 힘차게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빙판 위에 이름 모를 별 자리와 은하수 자리가 순식간에 생겨났습니다. 그 ‘천문학적 사건’ 이후로 테이트 양은 스케이팅을 배우려던 야심찬 계획을 접고 정자에서 쉬는 쪽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 1929년 지리산 노고단에 9홀 골프장을 손수 설계해 건설하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맨 선교사였던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1867~1951)가 1895년 1월에 쓴 선교보고서의 한 단락이다. 레이놀즈는 버지니아 주의 햄든 시드니 대학 출신으로, 테니스와 스케이트 대표선수를 지냈고, 82세까지 스케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고종 황제가 장안의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어렵사리 주선했던 향원정에서의 스케이팅 파티였던 것이다.
 
  고종이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序賢亭) 일대를 새로 조성하면서 연못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집을 지은 것이 향원정의 유래이다. 겨울에 스케이트를 즐기기 위해 한강까지 나가야 했던 외국인들이 시내에서 용산 나루터가 있는 한강까지 왕복 10km 거리를 노새를 타고 다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 향원정같이 분위기 있고 결빙(結氷) 상태가 고운 인공 연못이 흔치 않았다. 고종은 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만족했고,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왕비 민비(閔妃)는 시종들과 향원정 정자 내 비밀 커튼 사이로 이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토록 훌륭한 리더가 이끌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이트 양의 망신스러운 꼴불견은 그날 고종과 왕비를 즐겁게 해 준 하이라이트였다. 왕비는 독일 출신의 외빈 접대 담당 미스 손탁(Miss Sontag·본명은 앙트와네트 손탁으로 프랑스 출신의 독일인)으로 하여금 내빈들에게 맛있는 다과를 베풀기도 했거니와, 향원정을 건너는 다리 취향교(醉香橋)에도 구경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영문잡지 《더 코리아 리포지토리》는 ‘연못의 얼음 상태는 아주 좋았으며, 이렇게 성대하게 손님들을 초대한 왕과 왕비에 대해 모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연못 위 향원정은 따뜻했으며, 가벼운 간식이 제공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얼음을 얼리는 특별한 기계장치도 없이 자연 빙판을 이룬 향원정이 한국 최초의 스케이트 공간이라는 역사를 갖게 된 이유이다. 스케이트에 호기심을 가져 궁에서 파티까지 베푼 왕비는 1895년 10월 8일, 스케이팅 파티가 열렸던 향원정 앞 건천궁에서 일본 낭인(浪人)에 의해 비운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소식을 민비가 들었다면 어떤 심경이었을까. 과거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환호를 간직한 향원정 연못에 핀 연꽃이 핏빛인 양 어둡기만 하다.
 
  레이놀즈의 딸 엘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는다.
 
  〈제가 지금도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일본군이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전쟁에서 발생한 소음입니다. 제 아버지는 장전한 무기로 한국인 왕을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왕은 선교사들을 신뢰하셨고, 어머니는 정성스레 싼 도시락을 왕에게 손수 만들어 보내 드리곤 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살해와 독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아버지는 명석한 두뇌로 했던 수많은 일들 외에도 대단한 운동선수였습니다. 뛰어난 테니스 선수인 데다, 아이스 스케이팅을 즐겼습니다. 55세가 되던 1929년, 아버지는 평양의 선교사 사택과 신학교를 빙 둘러 잇는 9홀 골프 코스를 직접 설계하였습니다. 우리집 뒷마당에서 출발해 언덕바지를 내려갔다가, 주변을 빙 둘러서 돌아왔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자리 잡은 우리의 여름 별장에도 한국인 인부들을 시켜 골프장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남편 존은 세상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한 달 내내 골프를 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공을 찾기 위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뿌연 새벽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레이놀즈는 1929년에 지리산 노고단과 평양 경창리 평양신학교 내에 각각 9홀 골프장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선교사였지만,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문화와 스포츠를 통해 조선인들의 자기 계발에도 항상 앞장섰던 인물이다. 삶의 조건이 열악했던 조선 말기, 서울에서 살던 외국인들은 서양에서 즐기던 자신들의 문화와 스포츠를 들여왔던 것이다.
 
 
  평양에 축구를 전한 전킨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한국 축구의 아버지다.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축구를 보급했다.
  레이놀즈와 함께 1892년 선교사로 조선 땅에 온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1865~1908)은 평양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최초로 축구를 보급했다. 당시 평양에서 축구는 수천 명의 관객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인기종목이었다. 특히 춘계 운동회 경기 중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신학교 학생 간의 축구 라이벌전이 온통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전킨 선교사가 한국에 소개한 축구는 즉시 큰 호응을 얻어, 육적·영적으로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운동이었다. 평양 봄 운동회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목격한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평양신학생들 간의 축구경기였다.
 
  만능 스포츠맨인 레이놀즈에게 있어 개인적으로 축구가 마냥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킨의 뒤를 이어 경기를 관장하며, 38세의 청년인 그가 마치 18세 소년같이 뛰어다니며 공을 차다 근육통으로 며칠 동안 드러누워 68세 노인처럼 절뚝거리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그리도 즐겼던 레이놀즈도 축구라는 공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1884년 시작한 기독교 전래로 선교사들은 초기에 서울 도심지 정동(貞洞)에서 살았다. 덕수궁 담 너머 이웃사촌처럼 살던 선교사 촌은 원래 강노(姜魯) 정승 소유의 집이었다고 한다. ㄴ자형 토지에 ㄷ자형 사랑채를 포함 세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정승 집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구입하여 선교사 촌으로 만든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 오늘날의 연식 정구장을 만들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모든 학교에 정구장이 세워졌다. 선교사들과 각별한 우의를 가졌던 고종은 서양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호기심을 가졌다. 선교사들의 집단 주거지역이었던 담 너머 이웃 정동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하루는 선교사들이 정구를 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것을 보고 “아니, 저렇게 힘든 것을 하인들을 시키면 될 것을 왜들 힘들여 뛰어다니는가”라며 몹시 안쓰러워했다. 시의(侍醫)였던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 박사가 타고 온 자전거를 친견(親見)하면서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는지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무료한 조선에서의 일상생활 속에서 서구 문화가 몸에 익었던 선교사들이나 화려한 궁중 법도에 매여 살던 고종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골프와 정구, 스케이트 진흥에 끼친 윌리엄 레이놀즈의 공헌은 각별하였고, 윌리엄 전킨이 축구 보급에 일조한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질레트, 10년간 YMCA 총무 맡아
 
1907년 YMCA국제위원회가 기부한 4만 달러로 질레트 선교사는 3층 양옥을 지었다. 1908년 12월 낙성식 설교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맡았다.
  한국에서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받는 야구는 1905년,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e·1872~1938)가 연희전문학교에서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하와이 대학생과 연희전문 학생들 간의 친선게임에서 연희전문 학생들이 야구의 본고장 출신 미국 대학생들을 이긴 일이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나 학교 등을 통해 기독교 선교기관이 우리나라에 소개한 운동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01년 9월 조선에 온 것으로 알려진 질레트의 여행기록을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는 1901년 9월 20일 미국을 떠나 유럽과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일반 선교사들이 밴쿠버에서 고베를 거쳐 들어오거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로 들어오는 데 비해, 유럽과 모스크바를 여행하면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하여 10월 말에야 조선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1903년 10월 28일 창설된 YMCA의 초대 총무직을 1913년 5월까지 맡았다. 그가 조선을 떠나 중국 난징으로 옮겨가기까지 10년간 YMCA 조직의 기초를 다졌다. 애당초 YMCA는 세상속의 교회를 세우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1899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장로교와 감리교의 두 교파 선교사들과 150명의 한국청년들이 YMCA 국제위원회에 설립 청원서를 냈고, 1901년에는 YMCA 국제위원회가 전문가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때 파송되어 온 사람이 질레트였다. 질레트는 한때 이승만(李承晩)을 청년부 간사로 채용하여 함께 일하기도 했다. 질레트는 1904년에 현재 종로에 있던 서울 YMCA의 대지를 사들여 가건물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다. 1907년부터는 YMCA 국제위원회가 기부한 8만 엔(4만 달러)으로 3층 양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낙성했다.
 
  이 낙성식에서 레이놀즈가 설교를 맡았던 일은 운동 좋아하는 레이놀즈와 질레트가 여러 모양으로 얽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매천야록(梅泉夜錄)》의 저자 황현(黃玹)은 종로에 우뚝 선 YMCA의 모습을 보고 “그 집은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種峴·명동)의 천주교당과 함께 남과 북에 우뚝 마주 서서 서울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평했다.
 
  그런 와중에 질레트는 1905년에 연희전문학교에서 야구를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다. 장비도, 시설도 한참 부족했던 시절이었지만 야구 열풍은 발 빠르게 그 지경을 넓혀 갔다. 배재와 보성, 경신학교 등으로 제2, 제3의 야구팀이 잇따라 결성되면서 학교마다 야구단 창단 붐이 일었다.
 
  신교육을 받은 남학생 치고 야구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11년 질레트는 그의 보고서에서 ‘매달 6~9회의 야구 게임이 치러졌다. 심지어 12월에도 3번의 게임이 치러졌다’고 적었다. 그가 1913년 6월, ‘105인 사건(1912년 일본 경찰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 회원을 대거 체포, 고문한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지만 않았더라면 한국 야구의 개화기는 훨씬 빨랐을 것이다.
 
 
  군산이 野球의 본고장 된 까닭
 
  그런데 필자는 앞서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에 축구를 전수하고 정기 대항전으로 정례화시킨 전킨 선교사가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에도 야구부를 신설한 것이 1902년 무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영명학교는 전킨이 1894년에 군산 선교부를 개척하면서 시작한 남자학교다.
 
  전킨 선교사가 1907년 전주 선교부로 부임지를 옮길 때까지 머무르며 그의 삶을 불태웠고, 서울에서 배재학교를 졸업한 오긍선(吳兢善)이 신간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지명 수배자 명단에 오르자 군산으로 내려와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불(W. F. Bull·부위렴)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였다.
 
  평양신학교는 계절별로 2~3개월 올라가 머물며 신학반을 가르쳤으므로, 평양보다는 군산이 전킨 선교사의 주요 거점이요, 활동 무대였다. 그는 군산 궁멀(현 구암동)에 궁멀교회를 세우는 한편, 영명학교를 남자학교로, 멜볼딘 학교를 여학교로 시작하였다.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정구를 가르치기 위해 정구 코트를 설치했고, 영명학교에는 1902년 야구부를 조직하여 선진 문물을 교육하기에 이르렀다.
 
  군산에서는 전킨이 야구를 가르친 것과, 1899년에 부임한 불 선교사가 밴드부를 조직하여 가르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불 선교사는 자신이 밴드부를 조직하여 집회에 이들을 동원하였다. 심지어는 군산교회의 조선인 목사까지 밴드를 가르쳐 멤버로 삼았다.
 
  요즈음의 유랑극단처럼 밴드를 동원하여 노랫가락을 가르치면 시골지역에서는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텐트를 세워 찾아오는 병자들에게 이도 뽑아 주고 복음도 전했다. 불 선교사는 군산에 주재하면서 주로 충청남도 지역의 조직 책임을 맡아 서천과 당진, 장항과 금산 지역을 개척했다.
 
  전킨 선교사가 목회를 하던 구암교회 양응칠 장로의 장남 양기준은 영명학교를 다니면서 야구를 했다는 기록까지 찾아냈다. 오늘날 군산에서 빼어난 야구선수들이 수도 없이 배출된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미 1894년부터 군산 개항 시기에 맞춰 이곳에 자리를 잡고 교회와 학교를 통해 씨를 뿌린 전킨 선교사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4년부터 군산에 머무르며 학교와 교회를 세웠던 전킨 선교사는 1909년, 풍토병으로 전주에서 죽기까지 17년간을 호남지방에 머무르며 젊음을 불태웠다. 모름지기 자신을 비우고 조선에 정을 주고 가슴을 내맡긴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도 존재하는 것이다.
 
  레이놀즈가 스케이트와 골프를, 전킨이 축구와 야구를, 질레트가 농구와 야구를 보급한 것 모두는 사회 속에 교회를 심으려고 했던 나름대로의 전도(傳道) 전략이었다. 비록 그들이 고단한 삶을 살던 조선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운동을 가르쳤을지라도 수많은 조선인들을 즐겁게 하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수고는 더욱 값진 것이다.⊙
등록일 : 2015-07-17 09:25   |  수정일 : 2015-07-1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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