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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나는 달린다

글 | 유슬기 기자 2019-01-28 11:00

‘저 사람은 집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하정우가 TV를 보면서 종종 하는 생각이다. 근엄한 모습의 정치인, 딱 부러지는 전문가들은 ‘집에서도 저런 모습으로 앉아서 저렇게 이야기할까?’, 하정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아주 자연스럽고, 자기다운 모습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인물을 떠올릴 때, 평면적인 인물이라면 궁금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가진 다면성이 얼핏 비치기 시작할 때 그는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 필모그래피를 합치면 ‘1억 명’이 본 배우 하정우가 여전히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유다.

하정우는 집에서도 분주하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직접 국과 찌개를 만들어 밥을 먹는다. 최근에는 에어프라이어를 사서 요리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생각이 많아질 것 같으면, 차라리 운동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선다. 걷다 보면 별일이라 생각했던 일들도 ‘별일 아닌’ 게 되고, 마음을 짓누르던 고민의 무게도 점점 가벼워진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따뜻한 물로 씻고 나면, 다시 곤한 잠에 빠져든다.

그럼에도 요즘 그를 붙잡고 있는 고민은, 흥행이다. 지난해 12월 〈PMC: 더 벙커〉가 개봉했다. 그는 이 영화의 주연이면서 제작자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5년 전 〈더 테러 라이브〉를 함께 만든 김병우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군사분계선 아래로 깊은 땅굴이 있다는 이야기 많이들 하잖아요. ‘그 땅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생겼죠.”

두 사람은 상상력을 더해갔다. ‘지하 벙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남한과 북한의 중요한 사안이 이곳에서 결정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시나리오 작업만 3년 넘게 걸렸다. 군인이라는 설정만으로는 보여줄 수 있는 게 애국심과 전우애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 자본이 들어온다면 인물의 내적 갈등은 더 증폭되지 않을까 싶었다. 김병우 감독은 한국에는 없는 PMC(Private Military Company, 사설 군사기업)를 알기 위해 관련 서적만 수십 권을 읽었다. ‘전쟁도 비즈니스’라고 말하는 PMC 블랙리저드의 캡틴, 에이헵은 그렇게 탄생했다.


배우이자 제작자, 연기하는 사람이자 걷는 사람

영화 〈PMC: 더 벙커〉스틸.
에이헵의 이름은 소설 《모비딕》에서 따왔다. 허먼 멜빌이 쓴 소설 《모비딕》의 선장 에이헵은 선원들과 함께 흰고래를 잡으러 갔다가 한쪽 다리를 잃고, 선원들도 모두 잃는다. 하정우의 에이헵도 그 처지가 다르지 않다. 육군 공수부대 출신인 그는 동료를 구하려다 낙하산 사고로 다리를 잃고, 동료를 잃고, 불명예 퇴역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불법체류자로 살면서 그의 생계는 민간 용병이 되어 목숨을 걸고 ‘대리전쟁’을 치르는 일로 유지되고 있다.

“가장 에너지를 쏟은 건 총싸움이나 액션이 아니라 영어였어요. 7년이란 기간 동안 미국에서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목표점은 원어민에 가깝게 하는 거였는데,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어요. 12개국의 용병이 모인 팀의 리더인데, 적어도 대사 때문에 현장에서 정체되는 일은 없어야 했죠.”

그는 영어 대사를 통째로 외웠다.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상대방의 대사도 외웠다. 영화 속에서 에이헵의 말들은 표준어라기보다는 뒷골목 어디에선가 들을 수 있는 거친 말들이다. 영화의 긴장도가 높아질수록, 그의 말과 마음은 다급해진다. 한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핸디캡과, 점점 더 조여드는 총격전 중에 영어로 상황을 지휘하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4중고를 겪은 셈이다.

“그러다 윤지의(이선균)를 만나 한국어를 들으니, 살 것 같은 기분이더라고요. 마치 핀란드 여행을 하다가 중국집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이야~ 이제 내 입맛에 맞게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 그런 안도감이오.”

‘윤지의’는 북한에서 킹을 진료하는 주치의로, ‘윤리적이고 지적인 의사’라는 의미의 딱 이름 같은 인물이다. 생사의 경계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에이헵에게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니”라며 인간성을 일깨운다. 서로를 ‘북한’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두 사람은, 총탄이 쏟아지는 지하 벙커에서 뜻밖의 우정을 나눈다.

“준비 기간 5년을 함께하다 보니 제 역할이 에이헵이었다가 윤지의였다가 배신자인 마쿠스까지 갔었어요. 결국 제가 에이헵을 맡고, 이선균 배우가 윤지의를 맡았는데 형이 가진 ‘묵직하고 든든한’ 느낌이 좋더라고요.”

두 사람이 작품에서 만난 건 처음이지만, 전작 〈더 테러 라이브〉에서 이선균의 부인인 전혜진 배우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던 터라 김병우 감독과 하정우, 이선균에게는 공통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군도〉를 마친 다음 뒤풀이에서 어떤 슬픈 예감이 들었는지(일동 웃음) 선균 형이 다가와서 ‘너무 잘 봤다. 고생했다’고 해주더라고요. 그땐 그냥 많은 응원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서 선균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니까 그 격려가 다시 와 닿았어요.”

이미 〈신과 함께〉로 쌍천만 영화의 주역이 되었고, 최연소 1억 관객 동원 배우가 되기도 했지만 그에게 모든 영화는 긴장의 연속이다. ‘부디 귀엽게 봐주시길’ 바라면서도, 관객 한 명 한 명이 느낄 감상에 대해서는 궁금한 마음과 떨리는 마음이 교차한다. 도리어 보는 이들이 “관객들은 하정우 씨가 하는 모든 것에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격려할 정도다.


아는 만큼만, 느끼는 만큼만

문득 궁금했다. 그는 그림을 그려도, 영화를 찍어도,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어도 대중과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는다. 보는 이들은 이미 그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늘 가혹한 평가나 과분한 찬사를 받으며 냉온탕을 오가는 대중문화예술인의 숙명에서 비켜난 이례적인 일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건 아마 제가 ‘아는 만큼만’ 보여주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잘 몰라도 일단 열심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다 티가 나더라고요. 그 후로는 ‘아는 만큼만 보여주고 느끼는 만큼만 표현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고민은 또 생겨요. 자기를 복제하고 있는 건 아닌가 검열하게 될 때도 있고요.”

하정우는 그래서 걷는다. 최소한의 원초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서 걷는다. 추울 때는 추운 길을 움츠리며 걷고, 더울 때는 더위에 헉헉대며 걷는다. 그러지 않으면 “느끼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많아지면서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어요. 영화 제작을 병행하는 건 그런 목마름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예요. 원래는 〈PMC〉가 제가 제작하는 첫 영화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싱글라이더〉가 그보다 먼저 제작되어서 첫 영화가 되었죠.”

〈싱글라이더〉는 한 남자의 고독한 뒷모습이 마음에 남는 영화다. 그 짙은 남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어깨와 등에 담긴 작은 한숨에 카메라가 공들여 앵글을 맞추는 영화다. 올해 상반기에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이병헌과 〈백두산〉을 찍는다. 이 역시 규모가 제법 큰 영화라 감정의 이격이나 태도의 결기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배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이 마라톤 같다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에는 사점(死點)이 오기도 하고, 도저히 더는 못 갈 것 같은 순간이 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날에도 일어나서 걷다 보면 또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와요. 그렇게 가다 보면 또 가게 되더라고요.”

그의 말마따나 그는 ‘하와이 단골’인데, 지난해 12월에는 〈PMC〉의 흥행을 기원하며 이선균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에 참여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차기작 중에는 마라토너의 일대기를 담은 〈보스턴 1947〉도 있다.

하정우는 앞으로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동료와 함께. 기록이 부진하면 완주에 의미를 두면서. 완주하고 나면 또 기록을 높이자고 다독이면서. 덕분에 그의 발걸음마다 한국 영화사도 더불어 흥미롭게 쓰이는 중이다.
톱클래스 2019년 2월호
등록일 : 2019-01-28 11:00   |  수정일 : 2019-01-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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