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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무섭지만, 그럼에도 뚜벅뚜벅 김혜수

배우 김혜수가 충무로에서 지니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영화 <깜보>로 데뷔해 올해 33년 차를 바라보는 그는 역할의 무게와 색깔, 작품의 성격에 상관없이 늘 기대 이상의 오라를 뿜어낸다.

글 | 김수정 tv리포트 기자   사진제공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2019-01-09 18:07

김혜수라는 이름의 사명감

데뷔 초 <어른들은 몰라요> <첫사랑>의 천진한 모습부터 <닥터 봉> <찜>으로 이어지는 섹시 코미디, <신라의 달밤> 에서 보여준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와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의 그로테스크한 카리스마까지, 그야말로 안 되는 연기가 없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타짜> <도둑들> <관상>과 같은 멀티캐스팅 영화 안에서 특유의 섹시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며 ‘김혜수’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드는 데 이르렀다.

김혜수라는 이름은 사명감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는 성공한 여성 배우가 후배들에게 어떤 식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김혜수는 이를 “연대감”이라 표현했다. 치열한 충무로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후배 배우들을 독려하고 끌어내준다. 그가 휴대전화에 무명배우 리스트를 갖고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명배우의 이름, 나이, 전화번호를 휴대전화 메모장에 빼곡하게 적어둬요. 내가 캐스팅 디렉터까지는 아니지만 기억해뒀다가 좋은 작품이 있을 때 역할에 맞는 배우가 떠오르면 추천을 하기도 해요. 메모장에 보면 70세가 넘은 분도 있어요. 보통 한 배우가 주목을 받으면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모습을 나 혼자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어? 저 배우 예전부터 좋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하고 싶어지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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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현은 카메라 밖 김혜수

영화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감독)은 IMF 협상 비하인드를 그린 작품. 김혜수는 가장 먼저 국가부도 위기를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연기했다. 굳건한 신념으로 맡은 바 제 소임을 다하는 인물로, 카메라 밖 김혜수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항상 깨어 있는 눈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엔딩 내레이션 역시 김혜수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김혜수는 “실패한 작품에서 많이 배우는 편이다. 나는 오랫동안 천천히 성장했다. 10년 이상 걸렸다. 지금도 많이 두렵고,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작품을 통해 조금씩 더 견고해지려 노력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단 한 줄에서 시작한 이야기예요. 흥미로웠죠.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어요. 화가 났어요. 충격적이었어요. 우리가 겪는 지금의 이 고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잖아요. 부디 이 영화가 반드시 만들어지길 바랐어요. 심지어 재밌게 만들어지길 바랐어요.”

<국가부도의 날> 속 기득권 남성들은 입바른 소리하는 한시현을 두고 “비서 아니었어?” “커피나 타” “이래서 여자는 안 돼”라는 폭력적 언어를 쏟아낸다. 그간 한국영화, 아니 한국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시선을 품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시현은 아랑곳 않고 제 할 일을 해낸다. <국가부도의 날>은 여성 주연의 상업영화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성’ 영화가 아닌, 진정성 담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배우, 제작진의 노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나리오만 봤을 땐 한시현이 재밌고 새로운 캐릭터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있었어요. 한시현은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소신껏 살아가며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내는 인물이에요. 그게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제작자가 여성이고, 현장 PD도 여자였어요.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이 작품을 통해 정말 멋진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염두에 둔 적 없어요. 다만, 모두가 이 영화의 목표와 진심을 놓치지 말자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죠. 마치 한시현처럼 말이에요. 저를 포함해 제작자, PD 모두 한시현이 여성임을 강조하거나 의도하지 않았어요. 너무 의도하면 의도에 매몰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왜곡시킬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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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렵고 흔들린다

김혜수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화장기 옅은 얼굴로 등장한다. 진심이 전해지는 데 방해가 될 장식적 요소는 모두 배제했다. 세계적 배우 뱅상 카셀과 함께 한 IMF 협상 장면은 그의 진심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이다. 진심이 관객에게 가닿기 위해서는 영어 대사 부담감을 줄여야 했다. 자다가도 툭 치면 툭 하고 나올 정도로 달달 외웠다. 어디 영어뿐인가. 단순 암기가 아닌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 어려운 경제 용어를 쉬운 단어로 고쳤고, 경제 공부도 놓치지 않았다.

“워낙 협상 장면이 중요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어요. 일상 영어가 아니다 보니 우리말로도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했죠. 말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야 했기 때문에 일단 경제 수업부터 들었어요. 영어는 매일 2시간씩 4개월 정도 연습했어요.”

한시현처럼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걸어온 듯한 김혜수지만 여전히 두렵고 흔들린다고 했다. 배우가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길 고민한 순간도 많다. 배우로서 기죽어 있는 시절도 길었다. 캐릭터가 아닌 김혜수만 보인다는 평이 비수로 꽂혔고, 그 고비를 넘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데뷔 초엔 어린 나이에 어른 역할을 했죠. 그러니까 주변에서 다들 우쭈쭈 하면서 칭찬해준 거야. 정작 잘해야 할 땐 제 실력을 못 보여주고 헤맸죠. 정말 감사하게도 제가 잘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많이 기다려줬어요. 사실 <타짜> 정 마담 때까지도 헤맸어요. 배우는 결국 감정 노동자거든요. 늘 외로워요.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긴 해요. 복에 겨운 이야기가 맞죠. 전 이 일을 오래 했고, 나이도 많잖아요. 그런데 지금이라도 관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계속하거든요.”

현실의 김혜수는 카메라 속 당찬 모습과 다르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연예계 밖으로 생활 스펙트럼을 넓힐 기회가 많지 않았다. 기질도 약하고 기싸움도 못 한단다. 의외의 고백이다.

“저 강하지 않아요. 기질은 약한데 체력이 강해요. 배우라는 게 집요하고 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힘들어요. 괜히 기싸움 하는 배우들도 있잖아요. 왜 그러나 몰라.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카리스마 내뿜을 필요가 뭐 있어요. 이상한 공기 내뿜으면서 주변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고.(좌중폭소) 너무 피곤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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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영화상 무대, 몸매 관리 가장 치열한 시기

인터뷰는 청룡영화상을 며칠 앞두고 진행했다. 1년 중 몸매 관리가 가장 치열한 시기란다.

“저라고 별 수 있겠어요. 저도 다이어트하죠. 정말 많이 먹거든요. 요즘처럼 사진 찍히고 일할 땐 덜 먹어서 2~3㎏ 빼요. 가끔 퉁퉁한 상태로 찍힌 행사장 사진들 있잖나. 그게 원래 제 모습이죠. 정말 죽어라 뺀 게 <타짜> 정도예요. 그것도 보기에 좋을 정도지 마른 건 아니잖아요.”

무섭지만,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뚜벅뚜벅 제 길을 걷는 김혜수다. 묵묵히 걷는 와중 눈에 띄는 후배들을 보면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한공주>의 천우희, <미쓰백>의 한지민이 남성 중심 충무로의 한계를 뚫고 활약하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함께 울었다.

“후배 여성 배우들을 보면 연대감이 느껴져요. 마음이 딱 맞는 연대감이랄까. 이입이 돼요. 얼마나 눈물 나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뿌듯하고 고마워요. 사실 친분이 없으면 작품 좋았다, 연기 좋았단 얘기를 먼저 꺼내기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제가 먼저 그런 말을 하는 건 힘든 일을 해낸 후배들에 대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성조선 2019년 1월호
등록일 : 2019-01-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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