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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별세, 아내 엄앵란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이야기

영화배우 신성일이 폐암으로 투병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한국 영화사의 한 시대를 풍미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많은 사람이 배웅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배우로서의 삶부터 곡절 많았던 가정사, 정치인으로서 보낸 시간까지 그의 인생을 되짚어봤다. 아내 엄앵란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이야기도 전한다.

글 | 임언영 여성조선 기자

‘배우의 신화 신성일 여기 잠들다’

지난 11월 7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의 볕 잘 드는 앞마당에 배우 신성일의 묘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신성일이 지인의 추천으로 2008년부터 한옥 주택을 짓고 살면서 지내온 공간이다. 생전 그는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에 ‘신성일 묻히다’ 한마디만 적어놓으면 세상 떠나도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고 했다.

아내 엄앵란은 신성일의 유언 같은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성일이 이곳에 잠들고 나서 다시 보니, 남편이 말한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남편의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올린 엄앵란은 “여보, 이제 곧 여기 밑에서 만나”라는 말을 남겼다. 남편이 너무 바빠서 같이 베개를 베고 자기도 힘들었는데, 독방에서도 많이 잤는데, 나중에는 아주 싫증나게 남편 옆에 붙어서 영면하겠다는 마음도 전했다.

이날 경북 영천 성일가에서는 배우 고 신성일의 추도식이 진행됐다. 가족과 친지, 주민, 팬 등 5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였다. 생전에 예술을 사랑했던 고인을 위한 추모 공연도 이어졌다. 경북도립교향악단이 고인이 평소 좋아한 베토벤의 가곡 ‘그대를 사랑해’를 연주했고, 가수 김명상 씨는 기타 연주와 함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불렀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의연하게 장례식을 마치고 추도식에 임한 엄앵란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음악이 흐를 때였다.

“평소에 우리 영감이 여기에서 영면하겠다고 해서 ‘왜 산에 와서 그래, 나는 안 할 거야’ 했는데, 오늘 와서 보니까 너무 따뜻한 자리예요. 더군다나 오래간만에 남편하고 같이 누워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뜨듯해요. 영원한 강신성일과 엄앵란의 전설이 묻혀 있는 영천을 만들고 싶습니다.”

고 신성일이 살던 한옥 자택 옆 공터에는 신성일기념관 건립이 추진될 예정이다. 고 신성일의 공동추도위원장을 맡은 최기문 영천시장은 “고인이 영천에서 제3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면서 “유족이 동의한다면 고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 모두가 즐겨 찾는 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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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 3기로 항암치료
요양병원에서 투병하다가 별세

11월 4일 오전 2시 25분,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한 고 신성일의 사망 원인은 폐암이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혼란을 일으킨 해프닝이 있었다.

고 신성일이 폐암 사실을 처음 안 것은 지난 6월이다. 몸에 이상이 느껴져 집과 가까운 병원에 들러 건강검진을 했는데 결과가 폐암 3기였다. 워낙 자기 관리에 철저한 데다 평생 건강관리를 잘해온 터라 불과 5개월 만에 들려온 별세 소식에 많은 사람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암이라는 큰 병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에너지가 넘쳤다. 항암치료를 막 시작할 무렵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그는 씩씩한 모습을 보였었다. “내가 아주 건강하다. 방사선 치료도 할 만하다. 부작용도 크지 않다. 의사도 내가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 응원해달라”면서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를 들려줬다.

투병 생활에 접어들었다고 배우로서 행보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10월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수트 차림으로 참석해서 눈길을 끌었다. 영화인으로서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 자리에 얼굴을 비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작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장호 감독과 함께 준비하던 영화는 <소확행>이다. 장인과 사위가 화해해가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로 신성일이 나이 든 장인을, 안성기와 박중훈이 그의 두 사위를 연기할 예정이었다. 고 신성일은 폐암 투병 중에도 직접 기획과 각색, 주연을 맡아서 의욕적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장호 감독은 “내년 봄께 촬영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서 황망하다”며 애통해했다.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보이면서 활발한 행보를 보인 터라 그를 보낸 안타까움이 크다. 팬들은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 졌다” “한 시대가 저물었다”면서 국민배우의 별세를 안타까워했다. 영화인들은 고 신성일의 장례를 영화인장으로 치르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영화인장은 한국영화의 발전에 공헌한 예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장례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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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맨스 빠빠>, <아낌없이 주련다>, <맨발의 청춘>, <만추>

#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이름 ‘신성일’
세기의 커플에서 동지가 된 엄앵란

본명이 강신영인 신성일은 1957년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을 통해 배우로 발탁됐다. 신성일은 당시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이다. 두 사람은 평생 각별한 인연을 주고받으면서 많은 작품을 함께했다.

고 신성일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무려 507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1960~70년대 최고 톱스타로 군림했다. <맨발의 청춘>(1964),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면서 감독·제작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국민배우이면서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다. 정계 입문 시기는 1978년. 제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내무부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된 게 계기였다.

이후 국회의원에 수차례 도전했다. 1981년 제11대 총선과 1996년 제1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대구 동구)에서 당선됐다.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이름을 강신성일로 바꾼 것도 유명한 일화다. 선거에 출마할 때는 예명이 아닌 본명을 적어야 하는데, 유권자들이 강신영이라는 본명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결혼도 화제였다. 1964년 배우 엄앵란과 ‘세기의 커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둔 부부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가정의 그림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각자 생활 방식이 뚜렷했던 두 사람은 일찌감치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별거 원인으로는 너무 다른 생활 습관과 함께 고 신성일의 외도 때문이라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고 신성일은 지난 2011년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본인의 불륜 사실을 고백해 세상을 뒤흔든 적이 있다.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고 김영애와의 러브스토리를 전하면서 “생애 최고로 사랑했던 연인”이라는 말을 남겼다. 외국에서 주로 만났고,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했다는 사실을 공개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가 남긴 “나는 엄앵란도 사랑했고 김영애도 사랑했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엄앵란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혼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있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있지, 어떻게 교과서적으로 사느냐. 악착같이 죽을 때까지 살 것”이라면서 고 신성일과의 ‘동지애’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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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 오전 경북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에서 고 배우 신성일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 전 진행된 하관식의 모습이다.

# 엄앵란이 말하는 남편 신성일은…
“집 안에서 볼 수 없는 대문 밖의 남편”

“가정 남자가 아니야. 사회 남자, 대문 밖의 남자지 집 안의 남자가 아니야. 일에 미쳐가지고, 집안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할도 소화해내고 이런 역할도 소화해내고. 그 어려운 시절에 대히트작도 만들고, 수입을 많이 올려서 제작자도 살리고 그랬지. 그 외에는 신경을 안 썼어요. 집에서 하는 건 늦게 들어와서 자고 일찍 나가는 것밖에 없었어요. 스케줄이 바쁘니까. 그래서 늘그막에 좀 재미있게 살려고 했더니, 내 팔자가 그런가 봐.”

생전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은 부부지만, 장례식장을 지킨 건 아내 엄앵란이었다. 그는 딸을 비롯한 가족과 함께 기자들과 만나며 신성일을 추억하는 자리를 가졌다.

“우리 남편은 영화인인 것 같아요. 영화 물이 뼛속까지 들어갔어요. 까무러쳐서 넘어가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렇게 찍고, 이렇게 찍고’ 막 그러더라고요. 그걸 볼 적에 가슴 아팠어요.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사람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화려하고 좋은 영화 작품이 나오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넘어가는 남편을 붙잡고 울었어요.”

엄앵란이 말한 신성일은 천생 영화인. 죽어가면서도 영화 이야기를 할 정도로 뼛속 깊이 배우였다. 엄앵란은 신성일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맨발의 청춘>을 꼽았다.

“그 작품으로 아카데미극장도 살렸고, 흥행도 했고, 제작자 인지도를 올리는 역할도 우리 남편이 참 잘했어요.”

신성일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딸에게 아내 엄앵란에 대한 마지막 인사도 전했다.

“딸이 ‘어머니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라고 묻자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고 그래라’라고 말을 했대요.”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승에 가서도 못살게 구는 여자 만나지 말고,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재미있게 손잡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뭐 교통비가 들어요, 뭐가 들어요. 손잡고 구름 타고 하늘 타고 그렇게 슬슬 전 세계나 놀러 다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신성일의 마지막 자리를 지키면서 엄앵란은 많은 생각을 한 듯했다. 그 전날 신성일이 세상을 떠났다는 오보가 나면서 엄앵란은 전화를 많이 받았고 그것이 힘이되어 돌아왔다.

“제주도에서도 전화가 왔어요. ‘정말이냐. 살았냐, 죽었냐 확실히 해달라.’ 어떤 남자는 울기도 하고, 그런 팬들의 전화를 받고 나니까 우리 가정사나 사생활, 이런 건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이 사람들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흉한 꼴 보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록일 : 2018-11-29 11:20   |  수정일 : 2018-11-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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