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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스타 덕후, ‘신화창조’ 20년 세월을 거스른 팬심

‘덕후’의 대표 분야는 연예인 덕후다. ‘게임’도 만만치 않지만 게임 덕후는 유행과 신상에 민감한 반면, 스타 덕후는 ‘한 우물’만 판다는 점에서 덕후적 특성을 오롯이 담고 있다. 국내에 스타 덕후 중 최고봉이 ‘신화창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많지 않다. 에릭, 김동완, 이민우, 신혜성, 전진, 앤디로 구성된 6인조 남성그룹 ‘신화’의 팬 ‘신화창조’는 전설적이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신화 바라기를 해오면서 스타들과 나란히 중년이 되고 있다. 20년 신화의 가장 큰 저력이 ‘신화창조’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신화창조의 한 회원이 ‘20년 신화 덕후 회고담’을 보내왔다. 지면 한계로 일부만 싣는다. 전문은 톱클래스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사진 : 뉴시스 , 신화컴퍼니

글 | 조우현 자유기고가

오빠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나도 다른 신화창조 분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나이가 ‘어른’에 가까운 쪽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신화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렌다거나, 호들갑을 떠는 시기는 지났다. 지난해 에릭 오빠의 결혼도 ‘쿨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려 오빠들과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펐는데, 시간이 흘러 나보다 어린 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기는 했다. 조금 일찍 결혼했다면 팬 하나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덤덤하다고 해서 오빠들이 덜 좋아졌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마음 한구석에 굳건히 자리 잡아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돼 버렸다.

아는 분들은 가끔 내게 “언제 적 신화냐”라고 놀리기도 한다. 또 “신화 나이 많지 않아? 춤추다 뼈가 부러지겠어”라는 사람도 있다. 신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으신가 봐요”라는 말도 들었다. 지난 3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신화 데뷔 20주년 기념 팬 파티’에 취재온 연예부 기자가 다른 동료 기자에게 “나는 신화창조한테 궁금한 게, 콘서트를 매년 하는데 똑같은 노래에 똑같은 춤만 추잖아. 여기에 비싼 돈 내면서 오고 싶을까? 너무 신기해”라고 물었다. ‘비신화창조’의 시각에선 그런 것이 궁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기했다. 이 자리를 빌려 대답해 볼까 한다. “어머 기자님, 당연한걸요. 매년 콘서트를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앞으로도 쭉 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신화,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걸요”


신화가 내 마음속에 처음 들어온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1999년 ‘T.O.P’란 곡으로 전국을 뒤흔든 오빠들의 모습은 HOT와는 다른,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고급진 아우라’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마 ‘백조의 호수’라는 클래식이 주는 위엄이었을 것이다. 신화라는 이름 또한 신비로웠다. 하지만 그때도 신화는 내게 하나의 아이돌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에서 춤을 추는 진이 오빠를 보게 됐다. 진이 오빠는 2집 후속곡인 ‘Yo’라는 곡에서 가슴에 총을 맞는 퍼포먼스를 담당했다. 그 장면을 같이 보던 친척 언니는 “저 춤이 너무 힘들어서 연습하다가 울기도 한대”라고 했다. 눈물로 완성된 춤이라니, 안 그래도 멋있는데 더 멋져 보였다. 그때부터 진이 오빠는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신화도 좋아졌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빠들은 여전히 그 멤버 그대로 앨범을 내고 콘서트를 하고, 예능에도 출연한다. 그야말로 가요계의 전설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핑클, 젝스키스, god, HOT 모두 과거의 추억이 됐는데 신화는 여전히 현존한다.

신화가 여전히 건재하기에 신화창조도 존재할 수 있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비로소 나는 신화에 대해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걸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남들 보기엔 오래 가수 한 게 ‘그게 뭐 대수냐’라고 하겠지만 내겐 상당한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내 돈으로 신화 콘서트 표 구매… 비로소 어른이 되다


2012년 3월, 신화가 4년 만에 콘서트를 열었다. 군대 갔던 멤버들이 순차적으로 제대하고 모인 첫 자리였다. 신화와 신화창조의 눈물겨운 만남의 날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변화를 실감케 해준 특별한 사건이기도 했다. 201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께 신세를 지지 않고 내 돈으로 신화 콘서트 표를 예매했다. 그 후로는 표가 매진돼서 못 살 뿐, 돈이 없어서 못 사지 않게 됐다. 부모님으로부터 ‘진짜 독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십 대에는 돈이 없으니 신화 콘서트나 팬 미팅에 가기 위해선 ‘반에서 몇 등 안에 드는 조건’을 완수해야 했다. 이제 진정한 사회인이 된 것을 우리 오빠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다른 신화창조 회원들도 마찬가지일 것다.

이런 사정을 알아서인지 콘서트 표 가격이 꽤 비싸다. 또 콘서트 현장에서 판매하는 일명 ‘굿즈’의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매번 매진 또는 품절이다.

나의 사춘기 시절은 온통 오빠들뿐이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조금 늦게 왔다. 관심을 보이는 이성 친구들이 있으면 “미안해, 난 신화를 좋아하거든”이라는 다소 오타쿠스러운 이유로 거절하곤 했다. 덕분에 내 관심사는 신화와 공부(?)라는 건전한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공부의 목표도 신화일 때가 많았다. ‘이번 시험을 잘 보면 신화 팬 미팅에 갈 수 있다’ 같은 것. 청소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취미는 팬클럽 활동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모든 것을 오빠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다 보니 아이디, 닉네임이 온통 신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심지어 어떤 사이트의 비번은 진이 오빠 생일이나 신화 데뷔 날짜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다른 신화창조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신화 콘서트에 가는지 궁금하다. 나는 콘서트 시작 전에 틀어주는 오빠들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특히 타이틀곡이 아닌 앨범 수록곡, 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를 때의 희열이 매우 크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낸다. 어쩌면 그것이 좋아 콘서트에 가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집의 7번 트랙 ‘소망’을 우리끼리 ‘떼창’할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각자 다른 곳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좋아했을 생각에 동질감이 배로 솟구친다. 오빠들이 이 노래를 불러주기라도 하면 ‘오빠도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빠들 노래이니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연습해서라도 부르는 게 당연함에도 그렇다. 주객전도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에 모여 있는 질서정연한 신화창조의 모습도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한다. 한 번이라도 밀침을 당해보거나, 누군가 새치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고, 쓰레기도 잘 치운다. 다년간 쌓아온 내공은 이렇게 대단하다.


노래할 수 있는 자유, 그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

‘신화산’이란 팬들이 신화를 응원할 때 쓰는 말이다. 신화 멤버들이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여주인공 ‘산’을 좋아해서 붙여 쓰게 됐다. 높고 푸른 산처럼 정상을 향하자는 의미도 있다.
동완 오빠가 그랬다. 신화는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비단 신화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빠들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다. 음반을 사고, 콘서트 표를 구매해 오빠들의 수익 창출에 일부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내 마음이 사그라지기라도 하면 이 관계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고 만다. 그 때문에 오빠들의 인생은 오빠들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들의 관계가 20여 년간 지속해 왔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진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숱한 고비를 넘겨 왔다.

이 마음에 정점을 찍은 건 가장 최근에 참석한 ‘20주년 기념 팬 파티’였다. 공연을 보던 도중, 갑자기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호사에 무척이나 감사했다.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있는 오빠들의 자유가 아름다웠다. 그 자유를 위해 감내했을 책임을 떠올리니 이 시간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올해는 신화가 데뷔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이십 대이던 오빠들은 사십 대가 됐고, 초등학생이었던 나 역시 어엿한 삼십 대가 되었다. 오빠들을 보며 “우리 오빠들 하나도 안 늙었네”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도 같이 늙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몇 해 전 깨달았다. 오빠들만 보면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요즘 아이돌과 투 숏이 잡힌 모습을 보면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단순히 ‘늙었다’는 것이 아니고, 오빠들만이 풍길 수 있는 성숙함, 관록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신화는 여전히 건재하고, 신화창조 역시 오빠들 곁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영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늘 행복할 순 없겠지만 그 어떤 ‘멘붕’이 와도 지혜롭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다. 오빠들은 신화, 우리는 신화창조이니까. 신화산!



“신화 창조라서 행복합니다”

오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긴장이 돼서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는 이제 다른 신화창조 분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나이가 ‘어른’에 가까운 쪽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 신화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렌다거나, 호들갑을 떠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그렇구나’ 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이러하기에 지난해에 있었던 에릭오빠의 결혼도 ‘쿨하게’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제가 중학생 때만 해도 제 나이가 너무 어려 오빠들과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펐었는데, 시간이 흘러 저보다 어린 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찍 결혼하셨다면 팬 하나 잃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물론 덤덤하다고 해서 오빠들이 덜 좋아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마음 한 구석에 굳건히 자리 잡아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돼 버렸습니다.

이런 저를 아는 분들은 가끔 “언제적 신화냐”라고 놀리기도 합니다. 또 “신화 나이 많지 않아? 춤추다 뼈가 부러지겠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신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으신가 봐요”라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신화가 오래된 가수이고,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평가가 저에게도 적용되는 게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신화 팬들 사이에선 신화는 욕해도 신화창조는 욕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그래서 어떨 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게 말이냐”고 반박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생각 없는 말 따위가 우리 오빠들의 아성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지난 3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신화 데뷔 20주년 기념 팬 파티’에 취재를 오신 어떤 연예부 기자 분이 다른 동료 기자 분에게 “나는 신화창조한테 궁금한 게, 콘서트를 매년 하는데 똑같은 노래에 똑같은 춤만 추잖아. 여기에 비싼 돈 내면서 오고 싶을까? 너무 신기해”라고 물으신 겁니다. ‘비신화창조’의 시각에선 그런 것이 궁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답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조금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대답해 볼까 합니다. “어머 기자님, 당연한 걸요. 매년 콘서트를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앞으로도 쭉 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네, 그렇습니다. 저는 신화창조입니다.


“신화,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 걸요”

신화가 제 마음속에 처음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바야흐로 1999년, 〈T.O.P〉란 곡으로 전국을 뒤흔든 오빠들의 모습은 H.O.T.와는 다른,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고급진 아우라’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백조의 호수’라는 클래식이 주는 위엄이었겠지요. 신화라는 이름 또한 신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신화는 저에게 있어 하나의 아이돌 그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에서 춤을 추는 진이 오빠를 보게 됐습니다. 진이 오빠는 2집 후속곡인 〈Yo〉라는 곡에서 가슴에 총을 맞는 퍼포먼스를 담당했었습니다. 그 장면을 같이 보고 있던 친척 언니는 “저 춤이 너무 힘들어서 연습하다가 울기도 한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전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눈물로 완성된 춤이라니, 안 그래도 멋있는데 더 멋져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진이 오빠는 저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 신화도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빠들은 여전히 그 멤버 그대로 앨범을 내고 콘서트를 하고, 예능에도 출연합니다. 그야말로 가요계의 전설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핑클, 젝키, god, H.O.T. 모두 과거의 추억이 됐는데 신화는 여전히 현존하고 있습니다.

신화가 여전히 건재하기에, 이렇게 신화창조도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비로소 저는 신화에 대해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 걸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들 보기엔 오래 가수한 게 ‘그게 뭐 대수냐’라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져다줍니다. 무한도전이나 슈가맨에 나오는 옛 가수들을 보며 ‘어머 어머, 저 사람들 신화랑 같이 활동했었는데’라고 생각하며 묘한 승리감에 젖기도 합니다. 또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가수들을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도 합니다. 아마도 2001년이었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그룹은 god였습니다. 당연히 연말 시상식의 대상도 god의 몫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못마땅했는지 모릅니다. “아기 키워서 떴잖아. 가수는 노래로 승부해야지”라는 이상한 말도 서슴지 않으며 god 팬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대상~ god”라는 사회자의 멘트에 TV를 끄고 방에 들어와 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를 꼭 안아주며 “울지마, 지금은 god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 신화가 웃게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물론 이 글을 god 팬들이 본다면 기분이 나쁘겠지요. 죄송합니다.(굽신굽신) 그렇지만 저는 신화창조라서 행복합니다.(헤헤)


내 돈으로 신화 콘서트 표 구매…비로소 어른이 돼다

2012년 3월, 신화가 4년 만에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군대에 갔던 멤버들이 순차적으로 제대를 한 후 모인 첫 자리였습니다. 신화와 신화창조의 눈물겨운 만남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인생의 변화를 실감케 해준 특별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201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한 저는 처음으로 부모님께 신세를 지지 않고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신화 콘서트 표를 예매했습니다. 그 후 취직을 해서 돈을 번 다음부터는 표가 매진 돼서 못 살 뿐, 돈이 없어서 못 사지 않게 됐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진짜 독립’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10대 시절에는 돈이 없으니 신화 콘서트나 팬 미팅에 가기 위해선 ‘반에서 몇 등 안에 드는 조건’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조건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진정한 사회인이 된 것을 우리 오빠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 다른 신화창조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우리의 사정을 알아서인지 콘서트 표 값이 꽤 비쌉니다. 또 콘서트 현장에서 판매하는 일명 ‘굿즈’의 가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매번 매진 또는 품절입니다. 역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수요 공급 곡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비싸도 신화 마크가 새겨진 휴대전화 보조 배터리는 늘 욕심이 나니까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다른 신화창조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신화 콘서트에 가시는지 궁급합니다. 저는 콘서트 시작 전에 틀어주는 오빠들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타이틀곡이 아닌 앨범 수록 곡, 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를 때의 희열이 매우 큽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낸다고 할까. 어쩌면 그것이 좋아 콘서트에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2집의 7번 트랙 소망을 우리끼리 ‘떼창’할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각자 다른 곳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좋아했을 생각에 동질감이 배로 솟구칩니다. 오빠들이 이 노래를 불러주기라도 하면 ‘오빠도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빠들 노래이니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연습해서라도 부르는 게 당연한 것임에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주객전도라고 하지요. 흠흠. 아무튼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에 모여 있는 질서정연한 신화창조의 모습도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한 번이라도 밀침을 당해보거나, 누군가 새치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고, 쓰레기도 잘 치웁니다. 다년간 쌓아온 내공이란 것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우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신화창조이니까요.


신화를 만들어준 사람들…고맙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이루어진 꿈도 있고, 그러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사정은 다양하지만 결국 두 가지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을 덜했거나, 재능이 없거나. 반면 목표를 달성했을 땐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력, 재능, 운 같은 것이 합을 이뤄 완성한 것일 테니까요. 여하튼 인생의 고비에는 늘 이런 것들이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이치(?)를 깨닫게 된 후부터는 오빠들의 1집 노래를 듣는 마음가짐이 겸허해졌습니다. 가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연습생이라는 기간을 거친 오빠들이 가졌을 그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섰을 때 18~19살 오빠들이 느꼈을 두려움, 잘하고픈 마음, 설렘 이런 것들이요. 더군다나 그렇게 만든 1집 앨범이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느꼈을 허망함을 떠올리면 아찔합니다. 아마 눈물을 머금고 와신상담하며 다음 앨범을 준비했겠지요. 2집 〈T.O.P〉라는 곡으로 대중들의 인정을 받기까지 감내했을 노력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마 지금도 많은 가수들의 희비가 이런 식으로 엇갈리고 있겠지요. 이렇게 쓰고 보니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나는 치열하게 살고 있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오빠들의 마음 역시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처음과는 다른 마음으로 녹음 작업에 임하겠지요. 혹여 나태해질 때면 초심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요.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원동력에 신화창조, 그러니까 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맞습니다. 오빠들 곁엔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빠들을 만들어준 여러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 이수만 프로듀서를 악덕 업주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인터넷에선 그런 소문들이 횡행했었으니까요. 그 중에는 사실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이수만이라는 사람이 고심해서 신화라는 그룹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수만은 신화라는 그룹의 이미지, 멤버들의 캐릭터, 노래, 춤 등을 프로듀싱한 예술가이자 기업가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신화는 없었겠지요. 이 점을 인지하고 나니, 이수만 프로듀서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빠들 역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마음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빠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노래연습을 시켜줬을 선생님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오빠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물론 말을 안 들었다고는 하지만) 인도해준 매니저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여전히 오빠들 곁을 지켜주는 분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께는 더욱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저희 신화창조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빠들은 신화창조가 있었기에 오빠들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쯤 되니 신화가 먼저인지, 신화창조가 먼저인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화’가 되어주고 있으니까요.


우리들의 신화 vs 대중들의 신화

다만 저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벅찬 신화이지만, 우리 오빠들의 매력을 더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하고픈 마음 때문입니다. (※주관적 느낌 주의) 솔직히 말하면 지난 2013년 봄, 신화와 조용필이 동시에 앨범을 발매했을 때 “왜 신화는 조용필 같은 노래를 만들어내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화와 조용필 모두 옛 가수의 귀환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언론에서 관심 있게 다뤘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의 〈바운스〉와 〈헬로우〉는 제 친구들에게도 화자가 될 만큼 노래가 대중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빠들의 〈This Love〉은 우리들만의 노래였던 느낌이 강했습니다. 저야 오빠들의 노래가 좋지만, 신화창조만 오빠들의 노래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This Love〉은 각종 음악방송에서 수차례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끌고 있었음에도 어쩐지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조용필과 신화는 스타일이 다르고, 구성원도 다르기에 같은 결과를 내기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신화창조만의 신화가 아닌 대중의 신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노래든, 예능에서의 캐릭터든 더 많은 사람들이 “역시 신화야!”라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무언가가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중에게 사랑받을 노래라는 것도 사실 모든 가수들이 꿈꾸는 것인데 쉽지 않은 것이지 않습니까. 때문에 저도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난하게 문제만 던져놓고 대안을 찾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번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또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별 걱정을 다 하네”라는 공격이 들어올 것 같지만 그래도 적어보겠습니다. 만약에 제 자녀가 특정 가수나 연예인의 ‘빠순이’를 자처한다면 그것을 제가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을지 여부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 자녀가 없습니다. 제 경우를 돌아봤을 때, 저의 사춘기 시절은 온통 오빠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조금 늦게 왔습니다. 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성친구들이 더러 있었지만 “미안해, 난 신화를 좋아하거든”이라는 다소 오타쿠스러운 이유로 거절하곤 했었습니다. 덕분에 제 관심사는 신화와 공부(?)라는 건전한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공부의 목표도 신화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시험을 잘 보면 신화 팬미팅에 갈 수 있다’ 같은 것이요. 그래서인지 청소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취미는 팬클럽 활동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 자녀가 그런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을 100% 용인해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정말이지 망설여집니다.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에 따른 폐해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것을 오빠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다 보니 아이디, 닉네임이 온통 신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이트의 비번은 진이오빠 생일이나 신화 데뷔 날짜가 포함돼 있기도 합니다. 또 나와 다른 가수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배척하는 정신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친구의 취향을 이해하고 다양성은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어린 마음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로 자녀의 취미생활을 반대하는 것은 ‘꼰대스러운’ 것이겠죠. 아마도 아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빠순이’를 할 수 있게 인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내공이 강한 신화창조 출신 엄마일 테니까요.


노래할 수 있는 자유, 그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

동완오빠가 그랬다지요. 신화는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비단 신화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제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습니다. 철저히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요.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오빠들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습니다. 음반을 사고, 콘서트 표를 구입해 오빠들의 수익 창출 일부에 기여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내 마음이 사그라지기라도 하면 이 관계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말 것입니다. 때문에 오빠들의 인생은 오빠들만이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저는 우리들의 관계가 20여 년 간 지속돼 왔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숱한 고비를 넘겨 왔습니다. 일탈한 팬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빠들 역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우리는 여전히 이 자리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입니다.

이 마음에 정점을 찍었던 건 가장 최근에 참석한 ‘20주년 기념 팬 파티’ 때였습니다. 공연을 보던 도중, 갑자기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호사에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있는 오빠들의 자유가 아름다웠습니다. 그 자유를 위해 감내했을 책임을 떠올리니 이 시간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가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김정은 외에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범죄 행위에 해당했겠지요. 오빠들 역시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만 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르고픈 노래를 부른다는 것, 누군가를 좋아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값진 자유입니다. 한참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별 생각을 다하네’ 하고 다시 공연을 즐겼습니다.


나아가 언제까지나 신화

올해는 신화가 데뷔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살이었던 오빠들은 40살이 됐고, 초등학생이었던 저 역시 어엿한 30대가 되었습니다. 오빠들이 언제까지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저는 언제까지 그런 오빠들을 응원할 수 있을까요. 여담이지만 저는 오빠들을 보며 “우리 오빠들 하나도 안 늙었네”라는 생각을 종종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도 같이 늙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몇 해 전 깨달았습니다. 오빠들만 보면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요즘 아이돌과 투샷이 잡힌 모습을 보면 세월의 힘이라는 것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단순히 ‘늙었다’는 것이 아니고, 오빠들만이 풍길 수 있는 성숙함, 관록미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빠들 역시 우리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겠지요. 파릇파릇한, 그래서 싱그러운 요즘 아이들이 느끼지 못할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어른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진짜 어른들이 듣는다면 “네가 뭘 알겠니” 하실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신화는 여전히 건재하고, 신화창조 역시 오빠들 곁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영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늘 행복할 순 없겠지만 그 어떤 ‘멘붕’이 와도 지혜롭게 극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빠들은 신화, 우리는 신화창조이니까요. 신화 산!
등록일 : 2018-08-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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