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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 공연·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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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선태, 선과 빛으로 빚어낸, 깊은 울림이 있는 공간의 창조자

어릴 적 기억 중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후 맥락은 생각나지 않지만, 텅 빈 초등학교 교실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오후의 햇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텅 빈 교실의 고적함과 부드러운 햇살의 다사로움이 어우러지면서 가슴을 꽉 채우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글 | 이선주 톱클래스 객원기자   사진 | 김선아

지난해 12월 27일까지 서울 자하문로6길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황선태 개인전의 작품을 보면서 그 장면이 떠올랐다. 느지막한 오후일까?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이 집안 깊숙이 들어와 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앉아 있다 나간 듯 소파 위 쿠션이 움푹 패었고, 작은 탁자 위에는 커피 잔이 놓여 있다. 바깥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따뜻하고 햇살 가득한 실내가 그리워지는 요즘,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작품이다.

빛이 작품의 중요 요소라는 점에서 창가에서 햇살을 받고 있는 인물을 즐겨 그렸던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다. 실제 그 공간에 들어선 듯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색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요소로만 표현한 작품이다. 샌딩한 강화유리에 간략한 선으로 묘사한 실내 풍경을 전사하고, LED 조명을 비추어 완성했다.

LED 조명을 끄면 작품 속의 빛과 그림자가 사라지고, 실내 조감도 같은 선만 남는다. 빛이 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었음을 알 수 있다. 유리판 뒤에 간격을 두고 풍경 사진을 인쇄한 필름, 빛을 막아주는 막과 확산시키는 막 등 서너 개의 막을 설치해 입체적인 공간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전시장에서 만난 황선태 작가에게 ‘왜 작품에서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운지’ 물었다.

〈빛이 드는 공간〉, 202x87x4cm, 강화유리에 샌딩, 유리전사, LED, 2017
“의자 위에 놓인 숄, 소파 위 쿠션의 상태, 탁자 위의 커피 잔만 봐도 그곳에 어떤 사람이 머물렀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나요? 사람을 표현하려면 너무 복잡다단해집니다. 저는 최소한의 요소만 가지고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일상에서 항상 접하는 사물들의 울림과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면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풍경을 선과 빛으로 단순화해서 표현하고 싶었어요. 색, 무늬, 질감 등 수많은 요소를 동원할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소만 남기고 모두 생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빛은 핵심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빛은 정말 중요합니다. 빛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까요. 빛은 사물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빛 역시 하나의 실체이자 사물이기도 하지요. 빛을 가지고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고, 가상의 그림 속에 실제 빛을 들여옴으로써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빛이 드는 공간〉, 102x80x4cm, 강화유리에 샌딩, 유리전사, LED, 2017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할레 북 기비센슈타인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줄곧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자연과 나, 사물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연관을 가지고 있잖아요? 사물도 살아 있는 존재이고, 변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 이 탁자를 보세요. 변하지 않는 물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공기와 자외선에 의해 조금씩 변하고 있잖아요? 변화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2004년 독일에서 졸업작품전을 준비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을 빌렸다.

〈빛이 드는 공간〉, 33x43x4cm, 에폭시, 안료, LED, 2017
“사람이 살지 않으니 거미줄이 쳐지고, 벌레가 들끓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집을 보고 ‘폐가’라고 하지만, 너무 인간 중심적인 생각 아닐까요? 벌레나 거미줄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이곳을 죽은 집이라고 할까? 살아 있는 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죠. 집은 그대로 둔 채 방 세 개만 제 작품에 활용했습니다. 한 방은 벽에 문고리를 달아 서서히 아래위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벽이라는 개념, 안과 밖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장치였죠. 벽 바깥이 안이 될 수도 있다고, 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때 해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죠. 두 번째 방에는 물잔 하나를 놓아두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물잔 속의 물이 숨을 쉬듯 오르내리고 있었죠. 실제로도 시간이 지나면 물잔 속의 물이 기화하면서 줄어들지 않나요?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사물이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세 번째 방은 약간 기울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텅 빈 방에 들어가 ‘작품이 어디 있다는 거지?’ 의아해하는 순간, 기울어진 바닥 때문에 왠지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장치였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던 사물에 주목하면서 ‘절대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믿어온 나의 판단 기준이 얼마나 허망한지’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동양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으로 주목받던 그는 2005년 유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유리를 전공했지만, 한동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유리를 접목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의 한 공대 도서관에서 전시할 그룹전 초대를 받고 고심할 때였어요. 뭘 해야 할지 도대체 생각나지 않아 매일 도서관에 갔습니다. 어느 날 졸다가 일어났을 때 문득 유리 책이 떠올랐어요. 무엇인가를 투영하는 게 유리의 본질이잖아요? 생각을 투영하고 저장하는 책을 유리로 표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기술이 작업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빛이 드는 공간〉, 112x152x4cm, 강화유리에 샌딩, 유리전사, LED, 2017
이후 유리에 드로잉을 하고, 사진을 붙이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독일에서 이름을 알려가던 그는 2008년 귀국했다. 전시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고, 첫 개인전부터 작품이 꾸준히 팔렸다. 유리 작품에 빛을 도입한 것은 2010년부터다. 작업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유리판 위에 햇살이 비치는 장면을 보면서 실제 빛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작품 속 실내공간을 모형으로 만들어놓고 조명을 비추어 빛의 각도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드리우는지 연구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넣은 스케치북이나 공책을 방금 뜯어낸 듯 구불구불 굴곡이 있는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작품이다.

“기술이 제 작업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LG디스플레이의 OLED(유기 발광 다이오드) 디스플레이를 사용했어요. 유리 대신 투명 액체인 에폭시를 구워 형태를 만든 후 디스플레이를 집어넣었어요. 새로운 시도를 하니 계속 어려움에 부닥치기도 했지만, 더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빛의 효과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잠시 해를 가리면 햇빛이 천천히 수그러졌다 밝아지잖아요?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물론 기술적으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지요.”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세계 곳곳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독일,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싱가포르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거나 그룹전에 참가했고, 매년 10여 차례씩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영국의 한 갤러리는 2년에 한 번씩 그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영국의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단순하게 묘사한 공간과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은 보는 이에게 위안을 주면서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고 평했다.
등록일 : 2017-12-28 14:52   |  수정일 : 2017-12-2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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