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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미술관 고갱전(展)에서 발견한 것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설교 후의 계시’는 고갱이 문을 연 상징주의 화풍의 출발점이다.
시카고를 방문한 것은 6개월 만이었다. 한 대학 저널리즘 학회 참석차였지만 진짜 욕심은 딴 곳에 있었다. 시카고미술관(www.artic.edu)에서 열리는 ‘폴 고갱 특별전’이다. 6월 25일부터 9월 10일까지 열리는 ‘역대 최대 규모’ 고갱 전시회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다. 아웃사이더(Outsider). 고갱 특별전이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떠오른 단어다.
   
   시카고는 동부의 뉴욕에 대항해 만들어진 후발 이민자들의 도시다. 뉴욕이 일찍 미국에 자리 잡은 영국·독일·네덜란드 출신 이민자들의 도시라면 내륙의 시카고는 한발 늦게 건너온 동부유럽 출신자들의 무대쯤 된다. 늦게 온 만큼 뉴욕의 시선으로는 아웃사이더로 비쳐진다. 개신교보다 가톨릭이나 그리스정교 신자들이 더 많다. 늦게 미국에 온 만큼 항상 동부의 뉴욕을 의식하면서 도시 건설에 나선다. 약간 과장하자면 뉴욕 기득권층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카고 특유의 강한 생존력이 키워졌다고 볼 수 있다. 정치계의 아웃사이더에 속하는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같은 인물이 시카고를 배경으로 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갱을 아웃사이더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젊을 때 일확천금도 만져 보지만 결혼과 동시에 한순간 몰락한다. 평생 조국 프랑스와 거리를 두다가 남태평양에서 객사(客死)한다.   19세기 말 수많은 화가들이 주목한 예술세계의 테마는 파리의 전경, 신문명, 세기말 부르주아지 등이었다. 하지만 고갱에게는 전혀 무관한 세계다. 본 적도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남태평양 작은 섬 주민들의 일상사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추구한 고갱의 관심사다. 고갱은 그 같은 ‘외계의 얘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후세에 남긴 예술가다. 그림만이 아니라 대리석과 목재를 이용한 조각과 가구, 중국풍의 판화와 신발까지 예술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그림 한 분야에 특화된 아티스트(Artist)를 뛰어넘는다.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종합적·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구현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아티잔(Artisan) 영역에 속하는 전천후 예술가다.
   
   
   고갱은 아웃사이더
   
   2017년 시카고는 거의 전쟁 상태라 봐도 될 만큼 살벌하다. 도심부는 평화롭지만 10㎞ 떨어진 외곽의 흑인 거주지로 가면 ‘완전히’ 달라진다. 지난해 4331건의 총기사건이 발생해 762명이 사망했다. 하굣길에 갱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여학생도 있었다. 덕분에 시카고에 가기 전 친구들로부터 “방탄조끼를 착용하라”는 농담도 들을 수 있었다. 총기 관련 사고 1위가 마피아 알 카포네를 배출한 도시 시카고의 이미지다. 2위와 3위를 기록 중인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의 총기사건 규모는 시카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시카고미술관 주변은 총성과는 무관한 평화 그 자체다. 바깥쪽은 태풍으로 난리지만, 중심부는 정적에 휩싸인 태풍의 눈처럼 느껴지는 이색공간이다.
   
   시카고미술관은 미국 내 미술관 가운데 인기도 1, 2위를 차지하는 곳이다. ‘트립어드바이저’에 따르면, 2016년 인기도 1위 미국 미술관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들어서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오픈 10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긴 행렬의 사람들로 붐빈다. 미술관 측은 ‘익스프레스 라인’이란 것을 만들어 일반 대기줄과 이원화하고 있었다. 5달러 더 내면 빨리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시카고의 방만한 시정(市政)을 읽을 수 있었다. 티켓 자동판매기로 해결하면 될 문제를 수많은 직원을 동원해 수작업으로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덕분에 입장하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즉시 ‘고갱 특별전’으로 향했다. 시카고미술관에서 가장 큰 공간인 ‘레겐스타인(Regenstein)홀’이 특별전 무대다. 특별전 타이틀은 ‘연금술사(Alchemist)로서의 예술가 고갱’이다. 마술 같은 신비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창조한 예술가라는 의미 부여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티스트가 아니라 아티잔으로서의 고갱에 주목하는 전시회다.
   
   
▲ 시카고미술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 인기 문화공간이다.

   스코틀랜드서 온 작품
   
   ‘설교 후의 계시(Vision after the Sermon)’는 특별전에서 가장 주목한 작품이다. 고갱이 40세 때 그린 작품으로 원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이다. 특별전을 위해 시카고까지 날아온 것이다. 위스키도 있겠지만 ‘설교 후의 계시’는 언젠가 스코틀랜드에 가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예술이나 문화 관련 평론과 소개가 활발하지만 현장의 공기와 무관한 소개라는 점이 아쉽다. 인터넷이나 컬러판 화보를 보면서 작품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음식을 먹어 보지도 않고 인터넷으로만 본 뒤 판단하는 식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예술은 현장에 가서 직접 느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과 같은 오감(五感)을 통한 관람법이다. 특히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 분야는 오감, 아니 육감까지 필요로 하는 정신 영역이다. 적어도 평론이나 소개를 하려면 예술작품이 들어선 바로 ‘그 장소’에 가서 실감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다. 마룻바닥의 울림, 자연광으로 치장된 천장, 배경이 되는 벽면의 색상, 맞은편이나 주변에 들어선 다른 작품들과도 비교하면서 오감을 전부 동원해 천천히 체득하면서 전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설교 후의 계시’는 고갱이 40세 때 머물렀던 프랑스 북서부 브리타니(Brittany) 지방에서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당시 고갱은 경제난으로 인해 싼 집을 찾아헤매다가 마침내 다른 화가들과 함께 오지(奧地) 브리타니까지 떠밀려왔다. 그림은 당시 브리타니 여성들이 입었던 모자, 옷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그림은 성경의 창세기 32장22절부터의 얘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야곱이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한 끝에 비로소 신의 축복을 얻어 이스라엘의 시조(始祖)가 된다는 얘기다. 적(赤)·백(白)·흑(黑) 삼색을 통한 대조가 선명하다.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눈이 조금 비뚤어진 것이 아닐까 착각할 듯하다. 원근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된 테마가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다.
   
   크게 그려져야 할 천사와 야곱은 브리타니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구석에 밀쳐져 있다.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여성의 모습도 얼굴 반쪽만으로 처리해 밀쳐둔 상태다. 기묘한 스타일의 여성들이 쓴 모자만이 크게 와닿는다. 고갱 생전에 ‘설교 후의 계시’를 본 프랑스인이라면 아마도 심한 거부감을 가졌을 듯하다. 예수의 조상인 야곱의 얼굴은 아예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화(聖畵)의 이미지와 전혀 무관하다. 후에 고갱이 교회에 그림을 팔려고 했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설교 후의 계시’는 후기인상파는 물론 이후 상징주의로 이어지는 화풍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고갱은 그 어떤 화풍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화가이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서 나만의 세계에 몰입한 예술가다.
   
   예술가의 삶에 대한 추적은 오감 관람법과 더불어 명작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안이다. 배경을 통해 중심으로 들어가는 식이다. 파리나 아를르를 방문해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았던 집이나 자주 들렀던 카페, 미술재료 상점을 찾아가면 130년 전의 흔적을 일깨울 수 있다.
   
   하지만 고갱은 삶의 추적을 통한 관람법에서 크게 벗어난 예술가다. 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고갱이 남긴 흔적을 발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고흐·드가·르누아르·모네·마티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고갱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이다. 이들의 흔적은 파리는 물론 프랑스 지방도시 어디에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도 간혹 접할 수 있다. 고갱은 다르다. 필자의 경우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고갱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없다. 굳이 찾아나서자면 있겠지만 파리의 길을 걷다가 쉽게 만난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왜일까. 고갱의 무덤이 남태평양 프랑스령, 히바오아(Hiva Oa)에 있다는 것이 답의 단초가 될 듯하다.
   
   
   고갱의 자화상들
   
   고갱은 유년기부터 아웃사이더로 자란다. 저널리스트 출신 아버지가 급사하면서 남미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를 따라 페루에서 7살까지 살다가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후 13살 때부터 배를 타고 다니면서 조사원으로 세계 전역을 여행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도 항해 중 알게 된다. 25살이 되던 1873년, 덴마크 여성 소피 가드와 결혼을 하면서 파리에 정착한다.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면서 큰돈도 만져 본다. 그림은 중개인으로 일하는 동안 취미로 배운다.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고갱이지만, 1882년 파리 금융시장 폭락과 함께 불행이 시작된다. 돈에 쪼들리면서 파산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가족과도 이별을 한 채 쫓기듯 외국으로 나간다. 1890년 타히티(Tahiti)를 시작으로 남태평양 프랑스령 섬들을 전전한다. 고갱의 삶의 흔적을 파리나 프랑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다. 현지에 머무는 동안 원주민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에 주목한다. 미(美)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전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다. 덴마크로 간 가족을 다시 만나려는 목표도 있었다. 그러나 1903년 55세 삶의 마지막까지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고도(孤島) 히바오아에서 소송을 벌이던 중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마약남용이 원인이었다.
   
   ‘설교 후의 계시’는 고갱의 비극적 삶에 대한 진혼곡, 아니 진혼화(鎭魂畵)로 느껴진다. 19세기 말 기준으로 보면 당시 고갱의 삶은 ‘인간 실격’ 그 자체다. 개인파산으로 가족조차 부양하지 못한 것은 물론 남태평양을 돌아다니는 동안 10대 원주민 여성들과의 ‘관계’도 일상화된다. 현지에서 낳은 자식도 엄청 많다. 생의 마지막은 프랑스인에 대한 무고죄로 감옥행이 예상됐다. 만약 급사하지 않았다면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을 듯하다. 예술에 매달리는 동안 스스로는 물론 주변의 모두를 엉망으로 만든 인간이 고갱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으로부터 장자권(長子權)을 훔친 비열한 인간이다. 그러나 신은 축복을 내린다.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까지 장자권을 지키려는 야곱에게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됐지만, 예술 하나에 매달린 고갱에게 신은 어떤 계시를 내렸을까.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예술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필수조건이 아닐까 싶다. 고흐도 그렇지만 고갱만큼 자화상을 많이 남긴 인물도 없다. 자화상이 반드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증거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다지기 위한 주문으로서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일지 확신일지 여부에 관계없이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결국 혼자라는 점이다. 고흐가 그랬듯이 고갱도 철저히 홀로 서서 세상에 맞섰다. 죽음조차도 혼자서 맞이한, 독백의 삶이 나르시시스트의 운명이다.
등록일 : 2017-08-29 10:27   |  수정일 : 2017-08-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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