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FUN | 공연·전시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한국적 추상...오수환에게는 우리의 어떤 전통이 작용했을까

김형국의 미학산책 〈7〉

⊙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출입하던 김환기·김병기 등이 추상화 도입
⊙ 오수환의 화풍은 서예의 좋은 감각을 서양화 물감으로 구현한 성공사례”(윤명로)
⊙ 오수환, 김정희-오제봉의 서예 전통 계승

김형국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글 |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현대 한국화단의 스타는 단연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다. 대작 한 점이 작년 말 홍콩 옥션에서 64억원에 팔렸다. 아직은 아시아권 미술시장의 평가라는 조심스런 시각도 있지만 ‘한국발(發)’ 서양화가에 대해 세계 미술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국제적 성가에 앞서 우리 애장가들의 평가, 이에 공감하는 애호가들의 사랑은 그의 때 이른 타계 이래 줄곧 상승 곡선을 그려 왔다. 우리 미술 사랑의 역사에서 취향 변화의 의미 있는 풍향계가 정말로 그 아닌가 싶다.
 
  그간 보통사람들의 그림 사랑이라 하면 서양식 풍경화나 민화풍의 화조도(花鳥圖) 같은 사실화(寫實畵) 또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해서 일컫는 구상화(具象畵) 취향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추상화라 일컫는 비(非)구상화도, 수화가 1960년대 초 이래 뉴욕에서 그렸던 것이 모두 추상화 일색이었던 점에서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수화는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추상화는 화가의 심상(心象)을 그렸거나 실제 대상을 그릴지라도 그 골격이나 이미지만을 그리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극히 간단하게 점·선·원 등으로 그리는 미니멀리즘이 가장 추상적이다.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언(Piet Mondrian, 1872~1944)이 뉴욕의 마천루 풍경을 세로와 가로의 선으로 압축해서 그렸다면, 이전에 달도 많이 그렸던 수화는 점의 무한 나열로 뉴욕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심경을 그려 냈다.
 
  1950년대 말 파리 체류 시절까지도 그곳 도시환경은 밤하늘에 달이 보였다. 한국에서처럼 계속 달을 그려 내도 자신이 납득되었다. 견주어 뉴욕은 맨해튼 고층건물의 휘황찬란한 불빛 때문에 둥근 달이 보이질 않는다. 그 지경에서 마음의 달을 점으로 압축해서 그려 낸 것이 수화의 뉴욕시대 그림이 되었다 함이 유력 일설(一說)이다.
 
  심신이 가난했던 뉴욕 시절이었던 만큼 고국에 두고 떠났던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이나 고팠던’ 수화였다. 그 인연을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며 마음의 별로, 그걸 점으로 그려 내고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이어지는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6~77)의 시구(詩句)를 따와 그림 제목으로 삼았다.
 
  수화는 추상화풍이 그곳 땅에 처음 도래할 즈음의 일본 유학생이었다. 도쿄 간다에 있던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서 추상화를 접했다. 문화학원 재학 중이던 김병기(金秉騏, 1916~)도 학원이 아닌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출입을 통해 추상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때가 1930년대 중반이었는데 얼마 뒤 일본 제국이 침략전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자 갓 뿌리를 내리던 추상화도 된서리를 맞았다.
 
  추상화를 처음 본 검열 장교가 악담을 했다. “동그라미, 삼각형을 갖고 하는 어리석은 미치광이 놀음”이라고. 그게 아니라고 그 엄혹한 군국주의 체제에서도 반박하는 자유정신이 남아 있었다. 6·25동란 때 월북한 탓에 천재성이 단절되고 만 이쾌대(李快大, 1913~1965)도 그의 자화상을 좋아했다던, 청각장애자 마쓰모토 스케(松本竣介, 1912~1948)가 한마디 했다. “그 미치광이도 다름 아닌 인간인데 다만 바닥을 친 가슴 아픈 희생자일 뿐”이라 했다.
 
 
  처음 조심스럽던 추상화 정착
 
윤형근, 〈무제〉, 1976~79. 아마포에 유채, 140 x 140cm(PKM 화랑 제공)
화가의 전형적인 조형방식에 따라 검은 덩어리 안료가 갈색 쪽으로 번져 나가게 한 화면처리는 화가의 장인 수화 김환기의 ‘점화(點畵)’에서 온 영향이 아닐까.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동문 김병기의 촌평이다.
  세계적으로 그림 거래가 추상화 중심인 현대 취향과는 달리, 그때 그림 감상·애호가 기껏해야 인상파 그림 수준이라 여겼던지 조국 광복에 창작 의욕도 원기백배했던 수화 등이 1947년에 결성했던 동인(同人) 활동을 조심스럽게 ‘신(新)사실파’라고 이름지었다. 추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사실파(寫實派)’라는 간판을 어떤 기미로도 앞세워야만 세상 사람들이 그림으로 봐 줄 것이라는 양두구육(羊頭狗肉)식 작명이었다.
 
  이랬던 우리 미술역사에서 한국발 추상화가 지난 몇 년 사이에 국내외에서 인기리에 아주 고가로 거래되고 있음은 놀라운 국면 전환이다. 간단한 이미지가 단색(單色)으로 반복적으로 그려진 윤형근(尹亨根, 1928~2007), 박서보(朴栖甫, 1931~) 등의 단색화가 바로 그 경우다(도판 1 참조). 서양미술이론으로 말하면 단순 형태 또는 단색조(monochrome)의 미니멀리즘이겠는데, 그게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한국발 영어 표기 ‘Dansaekhwa’가 국제통용어로 떠올랐다.
 
 
  벽면 장식만이 아닌 세상에 대한 발언
 
  단색화든 어느 유파의 추상화든 현대회화는 단지 벽면의 장식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당신 작품을 두고 말함이었겠는데, “그림이란 세상에 대한 작가의 발언”이라 했던 이는 지금 세계에서 최고가로 거래되는 추상화가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였다. 그의 그림만을 위해 지어진 미국 휴스턴의 성소(聖所)는 애호가들이 평생에 꼭 보아야 할 미술관으로도 손꼽힌다.
 
  화가들의 발언은 가지가지다. 희대의 섹스심벌이던 미국 여우 먼로(Marilyn Monroe)의 얼굴 사진 위에다 각종 색깔을 입히고는 그걸 네 화면 또는 아홉 화면으로도 그려낸 것으로 이름 났던 미국 작가 워홀(Andy Warhol, 1928~1987)도 알고 보면 사회의식형 작가였다. 색깔을 달리한 채로 먼로의 얼굴을 연거푸 보여준 것은 “기계화한 자본주의 문명을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은 내남 없이 똑같다”는 발언이었다.
 
  세종로 네거리의 랜드마크는 둘이다. 충무공 동상과 교보빌딩 외벽에 걸린 ‘광화문 글판’이다. 그리고 눈 밝은 보행자들처럼 교보빌딩 서쪽 건너편의 큰 보험회사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오수환(吳受桓, 1946~)의 1000호 크기 대작에도 눈길이 닿는다. 본디 건물이나 집의 안벽을 장식하는 게 그림인데 그 위치나 크기로 해서 건물 바깥에서도 감상할 만하니 그건 안팎 겸용 그림의 태어남이라고 특기해도 좋겠다.
 
  추상화엔 대체로 그림 제목이 없다. 이성으로 간파할 수 없는, 사람의 꿈이나 속마음 같은 불가지(不可知)의 감성세계를 그려 내겠다는 것이 추상화의 시발이었던 만큼 아주 자주 제목 없음이란 ‘무제(無題)’가 오히려 제목 행세를 해 오곤 했다.
 
  달리, 수화가 친구 시인의 시구를 그림 제목으로 가져왔듯 그림 주제 곧 화제(畵題)를 밝힘도 화가의 발언방식에 든다. 오수환도 세상에 대한 발언방식으로 화제를 붙여 온 작가로 대표적 화제 하나가 ‘곡신(谷神)’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말이다. 무척 고답적인 낱말인데 줄여서 말하면 “낮은 까닭에 물도 흘러들고, 만물도 모두 낮은 그곳으로 모여든다. 그 낮은 계곡이 바로 만물을 낳는 근원”이란 비유다. 그 계곡의 형상이 아주 특이하다. 만물이 가득 찼던 거기서 물이 빠져나가자 계곡은 잡동사니만이 남아 어지럽게 늘려 있다. 무질서의 천지가 따로 없다.
 
 
  절대 평등인 그 무질서
 
오수환, 〈곡신〉, 1991. 캔버스에 혼합 물감. 259 x 194cm.
  오수환의 〈곡신〉 그림이 바로 그런 무질서를 그려낸다. 거기에 우리가 일상에 만날 법한 형상이 있을 리 없다. 어떤 정형에서도 벗어난 부정형(不定形)이요 본디 정형 없음의 무정형(無定形)이다.
 
  그런데 무작위도 극상의 미학 하나임은 수석(壽石)의 미학이 진작 말해 왔다. 국내에도 대소 간에 수석 수집 마니아가 많은데, 돌이 사람이나 동물을 닮았다는 식으로 감탄하는 수준은 초자들의 감상 방식이다. 전혀 딴판으로, 그 아름다움의 극치는 검은 색깔의 돌이 세상 어느 것도 닮지 않음이다. 대체로 구름이 정형을 간파할 수 없는 형태라 여겨 수석을 구름의 뿌리 곧 ‘운근(雲根)’이라 비유해 왔다.
 
  오수환의 〈곡신〉 시리즈 그림은 무작위성 조형으로 뒤덮여 있다. 그걸 통해 오수환이 말하려는 깊은 뜻을 헤아리는 데는 ‘학문 중의 학문’ 물리학의 유명 개념이 도움 된다. 곧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놓으면 더운물은 차가워지고 찬물은 데워지면서 그 중간의 미지근한 물로 바뀌는 ‘동태(動態)적 평형(平衡)’이 무작위의 극치라는 설명이다.
 
  오수환의 〈곡신〉 그림 또한 세상사가 모두 극상의 평형으로 나아가 결과적으로 사회 도처에 적어도 ‘금수저’, ‘흙수저’라는 차별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무작위성의 희구(希求)로 보인다. 그게 꿈의 세계만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는 비근한 보기로 무작위성의 절대 원칙 때문에 로또 복권이 당첨 몇 사람에게 거금을 몰아 주어도 불평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천지무사(天地無私)’라는 노자의 말대로 하늘과 땅은 사적(私的)인 게 없는 까닭에 미운 이, 고운 이를 가리지 않아 더 주고 덜 주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공평 기회균등의 극치이다(도판 2 참조).
 
  무작위 미학이란 점에서 오수환은 현대추상화의 한 이정표인 미국의 폴락(Jackson Pollack, 1912~1956)과 적어도 겉모습이 아주 비슷하다. 2006년에 무려 1억4000만 달러에 팔렸던 〈넘버 5〉 같은 작품 스타일은 캔버스 위에다 붓을 사용하지 않은, 물감을 그냥 떨어뜨리거나 연속으로 흩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을 동원했는데, 거기엔 주제도, 원근법에 의한 초점도, 상하좌우의 구별도 없다. 단지 무작위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추상화에도 국적이
 
분청사기인화문 ‘김해’명(銘) 접시, 조선중기. 4.1 x 14cm.
접시 등을 만들던 옛 가마터를 발굴한 경남 김해시가 분청도자기 축제도 개최해 오고 있다. 접시 전면에 달인지 별인지 아니면 꽃인지 그런 문양이 가득 도장 새겨진 모습이 그대로 김환기의 뉴욕시대 그림을 낳았던 것일까.
  추상화의 겉모습에 국적이 있을까마는 그 출발선엔 국적 있는 전통미학이 깔려 있었다. 수화의 점화(點畵)가 바로 그랬다. 조선조 전기의 인화문(印花紋) 분청사기 기법이 원용되었다는 일설은 설득력이 있다. 국화 등의 꽃모양 도장으로 그릇 표면을 찍어 움푹 들어간 곳에다 백토를 메워 문양을 드러내는 기법이다(도판 3 참조).
 
  오수환의 경우는 우리의 어떤 전통이 작용했을까. 좋은 미술이 될지는 먼저 화가 자신이 알고, 다음이 동업자, 이어서 화상 그리고 맨 나중이 애호가라는 게 사계의 정설인데 당사자 다음인 우리 화단의 두 원로가 이구동성으로 한국의 서예전통, 그 필력이 오수환 그림의 원동력이라 했다.
 
  그 관장이기도 한 최종태(崔鍾泰, 1932~) 조각가가 한국 현대조각의 비조(鼻祖)를 기리는 서울 평창동의 김종영 미술관 초대전 자리에서 한마디 적었다. 〈오수환의 그림을 일러 선의 유희라 해서 어떨는지 모르겠다. 지난 40년간 그가 줄기차게 시도하고 있는 붓의 연습. 그 붓의 놀이가 지금도 여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론에도 밝은 추상화가 윤명로(尹明老, 1936~)도 마음먹고 말했다. “오수환의 화풍은 서예의 좋은 감각을 서양화 물감으로 구현한 성공사례”라 했다.
 
  이들의 지적은 그의 공부배경을 살펴보면 한결 납득이 간다. 오수환은 가학(家學) 덕분에 10대 때 이미 국전 서예부문에 입선했다. 가학이라면 경상도 일대에서 방명이 드높았던 서가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을 말함이다.
 
김완당, 〈부작란도〉, 19세기. 종이에 먹, 54.9 x 30.6cm.
〈부작란도(不作蘭圖)〉 제목은 김정희의 제시(題詩)에서 따왔다.
  한국 서예가 치고 김완당(金阮堂, 김정희, 1786~1856)을 사표(師表)로 삼지 않은 이가 없는데 청남도 꼭 그랬다. 이 연장으로 완당의 절대 미학은 오수환에게도 피와 살이 되고도 남았다. ‘난초 침(寫蘭)’을 두고 말함이었는데 “법은 있어서도 안 되고, 또한 없어서도 안 된다(不可有法 亦不可無法)”고 했다. 창작에 대한 만고 진리가 이 아닌가.
 
  오수환이 그 인격을 따랐던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도, 붓글씨도 특출했던 조각가 김종영(金鍾瑛, 1915~1982)도 완당을 깊이 배울 바라며 나름으로 입장을 밝혔다. 장욱진은 완당의 만년작 〈부작란도〉에 착안했다.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라고 시작하는 난초 그림에 붙인 ‘부작란(不作蘭)’ 글귀가 ‘붓장난’으로 읽힌다며 무릇 조형예술이란 유희정신의 소산이라 역설했다(도판 4 참조). 김종영은 잘된 글씨의 특장인 ‘끊어질 듯 이어지는(筆斷意連)’의 리듬감에 더해서 완당은 입체파 서양화처럼 구조적 감각이 보태진 경지라 했다.
 
 
  구름 잡으려는 오수환
 
법정, 〈白雲山房(백운산방)〉, 2000년 경. 한지에 먹, 47.8. x 71.0cm.
오수환의 집운봉 화실을 찾았던 기념으로 스님이 즉석에서 휘호했다.
  ‘구름 잡는 소리’란 속담은 허황된 말이란 뜻이다. 구름은 흘러갈 뿐이어서 정체도 정처도 없다. 그럼에도 미술창작은 보통사람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을 모아서 어엿한 것으로 만들어 놓으면 마침내 그게 “또 다른 자연이네!” 하고 애호가들이 동감하고 감탄하는 노릇일 것이다.
 
  오수환은 당신의 작업이 그런 ‘구름 붙들기’라 여겼음인지 서울 수유동 화실을 ‘집운봉(集雲峰)’이라 진작 이름 지었다. 화실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서울 북한산의 백운봉 주변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구름을 ‘어디 한 번 거두어 보자’는 그런 집념의 다짐이라 싶었다.
 
  오수환의 그림은 이미 피카소, 마티스 등을 거래했던 세계 정상급 프랑스 화랑 매그(Maeght)가 눈여겨본 뒤 제작도 지원했다. 나라 안에서는 눈썰미가 비상했던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그의 그림을 사랑해서 화실 당호를 ‘白雲山房(백운산방)’이라 지어 주었다(도판 5 참조).
 
  화실 창 너머로 북한산 백운봉이 바라보인다 해서 지어진 작명만은 아닐 것이다. 김완당이 남겼던 ‘흰 구름은 기쁜 뜻!’이란 ‘白雲怡意(백운이의)’ 단구(短句)를 기억해서 오수환의 그림을 통해 우리 삶의 터전이 더욱 아름답고 착한 세상이 되라는 축원으로 들렸다.⊙
등록일 : 2017-05-10 08:29   |  수정일 : 2017-05-10 09:45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