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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필이자 황실 사진사 김규진 후손들

1907년 문을 연 ‘천연당사진관’은 한국 최초의 사진관

⊙ 명승고적과 고루(高樓), 거찰(巨刹)에는 반드시 김규진의 필적이 남아
⊙ 김규진이 1905년 찍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 미국에서 발견
⊙ 김규진의 아내(김진애)는 새문안교회 여전도회 초대 회장
⊙ 아들 청강 김영기, ‘동양화’ 명칭 대신 ‘한국화’ 쓰자고 주장
⊙ 손자 추강 김경식, 그래픽디자이너에서 늦깎이 화가 입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 1933)은 구한말 가장 먼저 단발(斷髮)을 한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친왕의 서화(書畫) 스승으로 궁내부 시종원 시종장에 올랐던 인물로 글과 그림이 당대 가장 빼어났다.
 
  오늘날 명승고적과 고루(高樓), 거찰(巨刹)에는 반드시 그의 필적이 남아 있다. 삼보(三寶) 사찰인 해인사·송광사·통도사는 물론 건봉사·마곡사·쌍계사·전등사 등지에 그의 글이 걸려 있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새겨진 19m가 넘는 큰 글씨 ‘미륵불(彌勒佛)’과 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린 〈만물상 추경〉 〈총석정 해경〉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실 전속 사진사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1905년 찍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미국에서 발견, 지난 2015년 10월 6일 자 《조선일보》 1면에 게재됐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종 어진은 여러 개지만 한국인이 찍은 어진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해강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서울 소공동(지금의 프라자호텔 인근)에 사진관을 냈다. 1907년 문을 연 ‘천연당(天然堂)사진관’은 한국 최초의 사진관이었다.
 
  해강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청강(靑江) 김영기(金永基·1911~2003) 선생이다. 청강은 해강의 뒤를 이어 대륙풍의 화조화(花鳥畫)를 즐겨 그렸으며 이화여대, 홍익대, 성균관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청강은 ‘동양화’ 명칭의 무국적성, 비주체성을 지적하며 “우리말을 국어, 우리 음악을 국악이라 하듯 우리 그림을 ‘한국화’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기자는 해강과 청강의 흔적을 더듬고 싶어 후손을 찾았다.
 
황실 사진사였던 해강 김규진이 1905년에 찍은 고종의 어진. 《조선일보》 2015년 10월 6일자 1면에 게재됐다.
  청강은 아내 민금녀(閔金女·1957년 작고)와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정림(金貞林·85)은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79세까지 55년간 치과의사로 일했다. 대한여자치과의사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둘째 만식(金萬植)은 사망했으며, 셋째 경식(金京植·82)과 넷째 혜림(金蕙林·80)은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수소문 끝에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살고 있는 해강의 손녀이자 청강의 장녀인 김정림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명석했고 감성이 풍부했으며 해강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할아버지 해강 선생은 제가 태어나던 해(1933년)에 돌아가셔서 뵌 적은 없지만 할머니(金眞愛·1949년 작고), 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해강의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군입니다. 당시 이북 출신은 무관으론 기용해도 문관 벼슬은 안 주던 시절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안 되겠다 싶어 친구분이랑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해강은 10년 가까이 중국의 북경, 천진, 남경, 상해, 소주, 항주, 낙양 등지를 찾아 당대 예술가들과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남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해강은 외숙인 이희수(李喜秀)에게 한학과 서화를 배우다가 18세 때(1885년) 중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중국 서화의 명가(名家)를 직접 찾아가 진·한·당·송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셨다고 해요.”
 
 
  1월 1일 하루 동안 내·외국인 1000여 명 촬영
 
서울 소공동(지금의 서울시청~프라자호텔 사이)에 있던 국내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사진관’. 최초의 화랑인 ‘고금서화관’도 함께 운영했다.
  김규진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 산촌에서 밭농사와 길쌈을 하며 해강을 키웠다. 비록 신분의 변화가 컸던 개화기였지만 사대부의 전유물인 학문과 서화의 길을 걷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강은 혹독한 노력과 천부적 자질로 예가의 길을 열었다. 김정림 여사의 말이다.
 
  “10년 만에 중국서 돌아온 뒤로는 고종의 특지로 영친왕의 6~11세 때까지 서예와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셨고 궁내부 시종원의 시종장까지 역임하셨어요.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쯤 될까요?
 
  영친왕이 인질로 일본에 끌려가자 고종이 해강에게 ‘가서 뒤를 봐주라’고 했대요. 그래서 자주 일본으로 건너가 영친왕을 뵈었다고 합니다.
 
  그때 고종이 ‘일본에 간 김에 우리나라에 없는 기술을 도입해 오라’고 하셔서 사진 기술을 정식으로 배웠다고 들었어요. 일설에는 민비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해강더러 사진 기술을 배워오라고 했다던데, 민비의 시해 시점(1895년)과 해강이 궁내부에 임관된 시점(1896년)이 맞지 않아요.”
 
  기자는 이당 김은호 선생이 쓴 〈해강 선생을 추억함〉이란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다. 이 문장이 눈에 띄었다.
 
  〈… 선생은 소시(少時)부터 서화에 재예가 뛰어나 일찍이 중원 대륙에 들어가 견문을 넓히었거니와 서와 사군자 같은 흑화풍(黑畫風)의 문인화는 물론이고, 그 외 각종 채색세화(彩色細畵)까지도 잘하였다. …
 
  선생은 근대 사진 기술을 도입한 분이다. 내가 청년 시절에 선생에게서 저간의 사정을 들은 생각을 더듬어 보건대, 이는 사랑하는 제자 영친왕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심에, 궁중은 물론이고 그 스승이던 선생의 마음이 울적한 동시에 생활조차 어려워진 것을 안 엄상궁이 고종께 아뢰어, 선생을 일본으로 보내 왕세자를 자주 만나는 동시에 사진술을 배워오게 한 것으로 안다.…〉
 
해강 김규진의 손녀 김정림 여사. 예술가의 길 대신 치과의사로 55년간 일했다.
  그런데 영친왕 이은이 일본으로 끌려간 시점이 1907년이다. 해강이 영친왕을 만나러 일본에 가면서 사진술을 접했다지만 그 이전에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1905년 해강이 찍은 고종 어진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은 해강이 1905년 경운궁에서 촬영한 것으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사절단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현재 미국 뉴어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학계에서는 해강의 동생 김태진(金台鎭)이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갈 때(1904년) 해강도 함께 건너가 사진술을 배운 것으로 추정한다. 또 20대 시절, 중국에 머물 당시 이미 대륙에 보급된 사진술을 경험했을 개연성도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 사진술을 배웠든 표정과 색채·음영, 원근법에 능한 미술가로서 어렵지 않게 사진술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말이다.
 
  “고종이 양위하자 할아버지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의 서울시청과 프라자호텔 사이에 사진관을 내셨는데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김진애) 회고에 따르면, 그 사진관을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가 지어주었대요. 당시 장안의 민가 중 첫 이층집이었다고 해요.”
 
  당시 신문기사(《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4일 자)를 보면 음력 정월 1일 하루 동안 내·외국인 1000여 명을 촬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마어마한 인기다. 사진값은 1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품(中品) 쌀 한 가마니 값이 4원 하던 시절이었다.
 
 
  해강의 동생 김태진 이야기
 
큰 붓을 들고 있는 해강 김규진.
  ― 천연당에는 여성 전용 사진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해강의 아내였다는 설이 있어요.
 
  “글쎄요. 그런 말이 있나요? 할머니께 듣지는 못했어요. 할머니는 1922년부터 27년까지 5년간 새문안교회 여전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갓 쓴 남성들 사이에서 할머니는 당당하게 ‘제직회’ 선교활동을 하셨죠.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제 품에 모셨어요.”
 
  1887년 서울 중구 정동 31번지 한옥에 설립된 새문안교회는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에 의해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다.
 
  ― 교회 제직회가 뭔가요.
 
  “일종의 교회행정 의결기관 혹은 교회 간부 모임입니다. 할머니는 망우리 과수원(지금의 경기도 구리)에서 인부들을 데리고 일하시다가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예배와 제직회 모임에 참여하셨어요. 봄에는 언더우드 박사의 별장이 있던 경기도 소사에서 제직회를 연 기억이 나요.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가 크림을 잔뜩 얹은 딸기를 먹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요. 가을에는 망우리 과수원에서 제직회 모임을 가졌어요. 할아버지 붓이 주렁주렁 매달린 큰 방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등어를 구워 최고의 밥상을 차렸어요. 새문안의 초대 여전도 회장이셨던 할머니는 정식교육을 안 받으셨지만 지혜로운 분이셨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놓으셨던 헌신적인 분이었어요.
 
  저도 유아세례를 새문안교회에서 받았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어요. 교회가 의료선교에 나설 때 가장 먼저 동참한 것도 할머니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때 무의촌에 가서 치과 환자 70명을 혼자서 치료한 적도 있어요. 하하.”
 
  ― 참, 천연당사진관은 이후 어떻게 됐나요.
 
  “할아버지는 사진관을 접고 서화 연구에만 전념하셨어요. 할아버지의 조카 김영선(金永善)이 뒤를 이어받아 평양과 부산(한국전쟁 이후), 서울에서 사진관을 열었습니다. 어린 시절, 서울 종로 보신각 맞은편에 있던 ‘천연당사진관’을 기억해요.
 
  사실 할아버지가 그분(김영선)을 양자로 삼으셨는데 아버지(김영기)가 태어나 파양(罷養)을 하셨대요. 제가 어렸을 적에 잠깐 뵈었지만 이후로 소식이 끊어졌어요.”
 
해강의 아내 김진애. 새문안교회 초대 여전도회장이었다.
  천연당사진관은 해강이 손을 뗀 뒤에도 김영선의 후손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다 1972년쯤 폐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강은 사진뿐만 아니라 한국근대미술사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처음’과 관련이 깊어요. 그래서 선각자라 불려요. 한국 최초의 화랑인 ‘고금(古今) 서화관’을 세워 서화를 전시하고 팔 수 있게 한 주인공이셨죠. 막걸리 한 잔에 그림을 사고팔던 시절, 윤단(潤單·그림값 목록)을 당당하게 제시해 서화를 상품으로, 서화가를 전문 직업인으로 자립시킨 이가 해강입니다. 당시만 해도 돈 밝힌다는 오해를 받아 욕을 먹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 윤단 덕에 (예술가들이) 지금까지 작품을 사고팔고 하잖아요?”
 
  해강 김규진의 동생 김태진(1885~ 1919)은 1901년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04년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제국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고 전해진다. 김 여사의 말이다.
 
  “해강이 고종에게 ‘동생이 있는데, 일본에서 현대 의술을 배워와 조선에 보급하면 어떨까요?’라고 청을 했다고 합니다. 고종이 승낙하셔서 김태진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1등으로 졸업했다고 집안에서 전해져요. 당시 수석졸업자에게 주는 높이 20cm, 폭 10cm나 되는 금시계를 본 적이 있어요. 경성제대 교수가 되셨는데 안타깝게도 환자한테 독감이 감염돼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김태진은 슬하에 2남을 뒀는데 차남 영창(金永昌·1917~1977)은 서울대 치대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제가 서울대 치대에 간 것도 영창이 아저씨 때문이에요. 부산 피란 시절, 서울대가 부산으로 옮겨왔잖아요. 저도 부산으로 피란 갔는데 한번은 아저씨가 집에 오셔서 치대 진학을 권했어요. 사실 저는 인문대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선생 노릇은 40대면 못 하지만 의사는 평생 한다. 미국 유학 보내준다’고 자꾸 권했어요. 그때 가기 싫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청강 김영기, 현대 중국 최고 화가 치바이스에게 사사
 
해강의 아들 청강 김영기. 뒤에 해강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해강의 장남인 청강 김영기 선생은 경기고와 중국 북경 보인대(輔仁大) 미술과를 졸업했다. 남들이 일본으로 유학 갈 때 청강은 아버지 해강의 권유로 중국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보고 느꼈던 중국 대륙을 아들이 체험한 것이다.
 
  청강은 홍익대·이화여대·성균관대 교수를 지냈고 《조선미술사》 《신라문화와 경주고적》 《동양미술사》 《중국대륙예술기행》 같은 전문 미술서적을 펴냈다. 한국미술협회 고문을 지냈으며 1997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청강의 장녀인 김 여사의 말이다.
 
  “일제강점기였지만 향후 대국은 그래도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앞을 내다볼 줄 아셨던 거죠. 덕분에 아버지는 당대 중국 최고 화가인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를 만나 현대 중국회화를 배울 수 있었죠. 해강이 치바이스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치바이스의 마지막 제자가 바로 청강이에요.”
 
  새우 그림과 초충류(草蟲類)의 명수로 유명한 치바이스는 시서화(詩書畫)에 능하며 현대 중국 미술사에서 최고 화가로 꼽힌다.
 
  “치바이스 선생이 새우 그림을 잘 그렸어요. 아버지도 새우 그림을 자주 그리셨고 화조(花鳥), 소과(蔬果)류 그림을 많이 남기셨어요. 한때는 전남 목포에 내려가기도 하셨는데 남해에 머무르며 거문도, 백도, 홍도 등을 찾아 실경미(實景美)를 담으셨어요.”
 
해강이 그린 창덕궁 희정당에 걸린 금강산 〈만물상도〉.
  ― 동양화란 명칭 대신 한국화를 주창하신 분이 청강이라더군요.
 
  “네. 해방 직후부터 문화적 자주의식에서 ‘한국화’ 호칭을 맨 먼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창했던 분이 바로 아버지셨어요.”
 
  청강의 주장에 호응하는 이들이 늘면서 1982년 한국문예진흥원 주관 대한민국미술대전 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화’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호칭만이 아니라 전통 계승의 창조적 한국화 운동에서도 청강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처음부터 실경 위주의 풍경 그림을 그리면서 원근법을 무시한 관념적 옛 법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버지 해강이 아들 청강에게 남긴 평생의 가르침은 “안고수저(眼高手低)하지 마라. 괜히 비평가적 안목만 높이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해강, 청강, 추강 등 3대 화업 길 걸어
 
김영기가 그린 〈월상월하쟁쟁진진〉(75x75cm). 새우와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서로 앞 다투어 전진하는 그림이다.
  청강의 장녀 김정림은 동료 치과의사 남궁진(南宮珍·2005년 작고, 성동구·동대문구치과의사회 회장 역임)과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두었다. 남궁진·김정림 부부는 서울 답십리(남궁치과)와 충북 제천(화신치과), 서울 창동(김치과의원)에서 의술을 폈다.
 
  큰아들인 남궁성탁(南宮成鐸·60)은 영국계 특수화학회사 빅트렉스의 아태지역 총괄 사장이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모두 공학 계열을 전공했다.
 
  둘째 남궁성건(南宮成鍵·57)은 서울여대 교수(화학과)로 재직 중이다. 딸 둘을 뒀는데 대학에서 예술 분야를 전공하진 않았지만 미적 안목과 감각이 남다르다고 한다.
 
  ― 후손에게 예술을 권하진 않았나 봅니다.
 
  “둘째(남궁성건)가 그림을 잘 그렸는데 취미로라도 말렸어요.”
 
김규진이 쓴 현판. 위가 해인사, 중간이 법주사, 아래가 송광사.
  ― 왜요.
 
  “예술가의 생활이 얼마나 고된지 몰라. 할아버지처럼 되기란 어려워요. 예술가의 아내는 고독해요. (남편이) 스케치 여행을 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잖아요.”
 
  ― 부인이랑 같이 여행 가면 되잖아요.
 
  “어떻게 같이 가요? (아내는) 살림을 해야지. 예술가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오로지 자기 미술세계밖에 모릅니다. 그렇게 안 하면 훌륭한 예술가가 못 돼요. 또 재질이 보통이 넘어야 돼요. 제 할아버지라서가 아니라 해강 같은 분이 없어요. 저도 55년간을 현장에서 치과의사로 뛰었지만 의사보다 더 힘든 게 예술가의 길인 것 같아요.”
 
  청강의 아들인 추강(秋江) 김경식은 학창 시절, 미술과 관련된 상을 다 탔지만 대학은 성균관대 영문과를 택했다. 이후 산업미술 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래픽 아티스트 한홍택 교수에게 사사했다. 1973년 이민을 떠나 캐나다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근무하다 아버지 청강의 권유로 회화에 늦깎이 입문했다. 2011년 토론토 한인미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청강과 추강, 부자(父子) 화가는 토론토와 미국 LA, 서울 등지에서 5차례 합동전시회를 가졌다. 현재 토론토에 정착한 청강의 차녀 김혜림은 두 딸을 뒀다.⊙
 
구룡폭포의 석벽에 새긴 ‘미륵불’
 
  일필휘지로 쓴 19.4m의 거대 글씨
 
금강산 구룡폭포 석벽에 적힌 거액(巨額) 미륵불. 해강 김규진이 썼다.
  박연폭포(개성), 대승폭포(설악산)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인 금강산 구룡폭포 석벽에 해강 김규진이 쓴 ‘미륵불(彌勒佛)’이란 글씨가 있다. 일본인 석공이 새겼지만 글은 해강의 솜씨다. 세 글자 길이가 무려 64척(약 19.4m)에 달한다.
 
  이 거대 글씨는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임석두(林石頭·1882~1954) 화상의 청으로 쓰게 됐다고 전해진다. 조계종 종정이자 ‘판사스님’으로 알려진 효봉스님(1888~1966)의 은사가 바로 석두스님이다.
 
  다음은 ‘미륵불’에 얽힌 일화다. 석두스님이 20년간 전국의 필가(筆家)를 찾아 큰 액(額)을 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마침내 해강을 찾아갔는데 뜻밖에도 해강이 흔쾌히 승낙했다.
 
  석두스님은 해강이 쓴 거액(巨額)을 걸머지고 원산항에 갔다. 일주일 만에 배(金剛丸)가 왔는데 마음이 불안해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밤 그 배는 암초에 걸려 가라앉고 말았다. 만약 스님이 그 배에 탔다면 ‘미륵불’ 글씨도 수장됐을지 모른다.(임병목의 《금강산》 참고)
 
  이와 관련 김정림 여사의 회고다.
 
  “금강산 구룡폭포 석벽에 새긴 ‘미륵불’ 세 글자는 폭이 3.6m, 길이가 19m인데, 우연인지 구룡소 깊이와 길이가 같다더군요. 제가 치과의사들과 금강산 관광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북한 안내원에게 ‘제가 김규진의 손녀’라고 하니 굉장히 놀라면서 ‘북한에서 해강의 후손을 찾았지만 없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녀는 “지금은 ‘미륵불’ 글씨를 볼 수 없지만 남한에 있었다면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라며 이런 기억을 덧붙였다.
 
  “할머니께 들은 얘기인데, ‘미륵불’을 쓸 때 아주머니 7~8명이 둘러앉아 한꺼번에 먹을 갈았대요. 그리고 그 먹을 ‘자배기’라고 부르는 둥글넓적한 큰 대야에 가득 부으면 해강이 큰 붓을 푹 적셨다고 합니다. 천장에 닿을 듯한 큰 붓이었는데, 중국에서 특별 주문한 말꼬리로 만든 붓이었대요. 당시 할아버지 체구가 작으셔서 광목으로 큰 붓을 가슴에다 칭칭 동여매고 걸어다니며 쓰셨는데, 비뚤어진 글씨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륵불’ 글씨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당대 적지 않았다.
 
  춘원 이광수는 석벽에 새긴 미륵불에 대해 ‘대자연의 경치가 파괴된 것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월간조선 2017년 3월호ㅣ글=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등록일 : 2017-03-14 08:26   |  수정일 : 2017-03-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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