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스고이! 북알프스” 백패킹 여걸들의 북알프스 도전기!

글 | 민미정 백패킹 여행가 2018-12-14 10:26

다테야마~야쿠시다케(2,926m)~오리다테 42㎞, 악천후로 야리가다케 정상 포기

야리가다케槍ヶ岳(3,180m)는 야리槍라는 이름에 걸맞게 창처럼 뾰족한 산세다. 마치 북알프스 연봉을 호위하듯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야리가다케를 중심으로 칼바위 능선인 다이키렛토大キレット를 지나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3,190m)에 오르는 종주 코스는 북알프스에서 손꼽히는 인기 코스다.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산세로 일본인들은 물론 매년 한국인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종주 코스다. 76㎞를 7박8일 일정으로 가는 동안 가급적 산장에 묵지 않고 야영하기로 했다.
 
나는 2011년 처음 북알프스에 오른 후, 그 매력에 빠져 매년 야리가다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이어진 우라긴자裏銀座와 동쪽으로 이어진 오모테긴자表銀座를 종주하곤 했다. 세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찾은 산은 역시 북알프스였다. 백패킹 장비 전문매장 매니저이자 절친한 후배인 김혜연씨와 함께 북알프스를 찾았다. 알펜루트의 다테야마立山에서 시작해 우라긴자를 거쳐 야리가다케까지 가는 종주에 나섰다.
 
본문이미지
다테야마 연봉에 둘러싸인 무로도 고원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지고쿠다니의 유황가스가 떠나는 등산객에게 손짓하듯 배웅하고 있었다.

늦은 밤 도야마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야마역에서 가까운 호스텔에서 잠깐 눈을 붙인 후, 다테야마로 가는 첫차에 몸을 실었다. 부족한 잠 때문에 눈꺼풀이 내려왔지만, 다테야마에 가까워지면서 밝아진 차창 밖으로 노랗게 익은 벼와 산을 휘감은 구름이 장관을 이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다테야마역에서 케이블카와 버스를 갈아타고 무로도 터미널에 도착했다. 해발 2,450m의 다테야마 무로도立山室堂 고원의 쾌청한 하늘엔 싸늘함이 감돌았다. 전망대에 올라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캠핑장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지옥계곡 트레킹이었다.
 
본문이미지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한 라이초사와 캠핑장의 정적과는 달리, 다테야마 연봉 위로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은 가을을 재촉하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본문이미지
한눈에 담아내기 벅찰 만큼 광활한 다테야마 연봉을 바라본다. 능선을 넘나드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천상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본문이미지
해질녘의 라이초사와 캠핑장 주변 야생화 초원.

미쿠리가 연못과 하얀 유황 가스를 뿜어내는 지옥계곡地獄谷의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 라이초사와雷鳥沢(2,240m) 캠핑장에 도착했다. 북알프스 해발 2,400m 이상 고산에 서식하는 라이초(천둥새)는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야가 좋지 않을 때 활동을 한다. 안개와 천둥이 칠 때 주로 활동하기에 라이초를 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설이 있다.
 
캠핑장에 텐트를 설치하고, 바로 벳산別山(2,880m)에 올랐다. 2개월 동안의 파키스탄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문제가 없었지만, 고산에 익숙하지 않은 혜연이는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걷되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능선에 올라서자 안개가 짙어져 캠핑장이 보이지 않았다. 반대쪽은 파란 하늘이 펼쳐져 극과 극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내일 오를 츠루기다케剣岳(2,999m)에도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벳산을 오르는 길은 잔돌과 바위로 이뤄진 가파른 너덜길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야 했다.
 
바람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은 느린 걸음에도 지루함을 잊게 해주었다. 마사고다케真砂岳(2,861m) 정상은 온통 뿌옇고 혜연이의 두통이 심해져 하산하기로 했다. 한참을 내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캠핑장이 보였다. 초원 위로 긴 털을 늘어뜨린 야생화가 석양을 머금고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나 볼법한 환상의 초원이었다.
 
텐트로 돌아오자 어둠이 찾아왔다. 캠핑장에는 텐트 몇 동이 더 있었지만, 비 소식 때문인지 북알프스에서 항상 봐왔던 형형색색의 텐트로 빼곡한 캠핑장 모습은 아니었다. 텐트에 불을 밝히고 조촐한 저녁식사를 했다.
 
고소로 힘들어하는 혜연
 
본문이미지
무로도 고원 너머로 드러난 웅장한 벳산의 산줄기.

본문이미지
라이초사와 초원의 야생화는 부드러운 깃털을 나부끼며 바람 따라 춤 추는 요정 같았다.

다음날 아침, 잿빛 하늘에 식욕마저 사라져 차와 초콜릿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밤새 내린 비에 젖은 텐트를 철수하고 산장지기에게 날씨를 물었다. “비 소식이 있어 츠루기다케 암벽을 오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종주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츠루기다케를 포기하고 곧장 야리가다케로 향했다. 이치노코시一ノ越산장(2,690m) 가는 길에 펼쳐진 풀잎은 노랗게 물들어 꽃을 대신하고 있다.                          
 
중간쯤 올라 뒤돌아보니, 지옥계곡에서 뿜어내는 유황가스가 구름과 어우러져 만년설과 함께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혜연이는 야리가다케까지 산행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낯선 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괜찮겠지만, 악천후에 고산증까지 겹쳐 어려운 상황이었다. 탈출로의 교통편이 좋지 않아 중도 포기도 고민했지만, 그녀는 계속 걷고 싶어 했다. 결국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다소 느리지만 크게 문제될 것 같지 않았다.
 
오르막이 길게 이어지며 경치가 시원하게 터졌다. 웅장한 연봉의 경사면은 거인의 손으로 거칠게 긁어내린 듯 산꼭대기에서 바닥까지 흙무더기들이 흘러 있었다. 능선 위에는 운치 있게 자리한 산장이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오르막의 끝에 다다르자, 유럽 알프스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평원 위에 평화로이 자리한 고시키가하라五色ヶ原산장(2,500m)이 보였다. 평원 주위로 성난 파도가 일렁이듯 구름이 차오르더니 이내 산장을 덮어버렸다. 위험한 바위구간은 사다리와 체인으로 이어져 있었다.
 
비가 쏟아졌다. 사다리에 몸을 옮기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가파른 바윗길은 낙석 위험이 있어 헬멧을 써야 했다. 몇 개의 고개를 넘어서야 데크가 놓인 평원이 나타났다. 그 끝에 빨간 지붕의 산장이 있었다. 캠핑장은 10분 정도 내려가야 했다. 텐트도 젖었고 긴 거리를 이동한 터라 산장에서 묵기로 했다. 난방은 없었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산장에서 만난 일본인 야기八木 할아버지는 여성 둘이 백패킹으로 종주한다는 게 신기한 듯 소등 될 때까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수년간 무역회사에서 일본 담당으로 일해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다음날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평원에는 노란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급경사로 산행이 시작됐다. 도중에 야기 할아버지와 친구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본문이미지

엣츄자와다케越中沢岳(2,592m)의 오르막에 들어서자 안개를 헤치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쉼 없이 걸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거운 배낭을 벗어 던지고 앉아 따뜻한 햇살을 만끽했다. 며칠간 내린 비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엣츄자와다케를 넘어서자 험난한 바윗길이 시작되었다. 기계처럼 바위에서 바위로 몸을 옮겼고, 비가 내릴 무렵 가까스로 스고노리코시산장スゴ乗越小屋(2,370m)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숲 속에 위치한 이 산장을 지나치지만, 시간 여유가 많은 우리는 하루 머물기로 하고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본문이미지
자욱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야쿠시다케로 이어진 능선이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등을 곧추 세우고 나에게 덤비려는 공룡의 등골처럼 위협적으로 나타나, 순간 움찔했다.

룽다(불교 경전을 적은 오색 깃발) 등 네팔을 연상케 하는 소품들과 따뜻한 난로가 있는 식당은 여행을 좋아하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산장지기 부부의 취향과 지친 여행객을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식사 시간이 되자, 미국인 키스Kieth씨와 야기 할아버지 일행이 나타났다. 언어는 모두 달랐지만,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된 화제로 식사가 끝나고 소등할 때까지 자리에 머물렀다.
 
식사만 산장에서 하고 잠은 텐트에서 자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아늑한 산장을 두고 축축한 텐트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혜연이는 조심스럽게 “하산하고 싶다”고 말했다. 비와 안개 때문에 풍경도 없이 하루 종일 걷고 축축한 텐트 안에 피곤한 몸을 눕히는 것이 괴로울 만도 했다.
 
다음날 일정을 묻는 야기 할아버지께 야쿠시토게薬師峠(2,294m) 캠핑장까지 간 다음, 하루 묵고 하산할 예정이라고 하니 본인들도 그쪽에 차를 세워뒀다며,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본문이미지
벳산 정상에는 산신령을 모신 작은 사당이 있었다. 지붕이 날아가지 앉도록 돌로 눌러놓은 것과 부서진 정상 표지판은 이곳의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본문이미지
몇 개의 험준한 봉우리를 넘어선 후 나타난 고시키가하라 산장. 지친 하이커를 위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본문이미지
360도 카메라로 담은 고시키가하라 평원. 왜곡된 사진 속 길을 걷는 내 모습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

본문이미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올 것만 같은 독특한 분위기의 스고노리코시산장에서 꿈결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산장지기의 잘 가라는 인사에 비로소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 듯 했다.

본문이미지
9월의 북알프스는 여름이 지나 간 뒤였다. 무로도 고원에는 노랗게 변색된 초원의 풀이 꽃을 대신해 하이커들을 반기고 있었다.

건조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젖은 텐트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혜연이는 하루만 더 버티자며 파이팅을 외치고 씩씩하게 앞장섰다. 앞서가던 혜연이가 “이거 블루베리 아니에요?”하고 물었다. 스위스에서 트레킹할 때 많이 따먹었다던 그녀는 용케 블루베리를 알아봤다. 유럽 오뜨루트Haute Route에서 먹을 게 부족해 블루베리로 허기를 달랬던 게 생각났다. 블루베리를 입안에 넣자, 보라색의 상큼함이 입 안 가득 맴돌며 한결 산뜻해졌다.
 
비바람 속의 야쿠시다케 정상
 
본문이미지
거친 사면에 놓인 데크 길은 무거워진 발걸음의 피로를 잠시나마 풀어주었다.

낭떠러지와 바위로 이어진 야쿠시다케薬師岳(2,926m)로 오르는 길은 비까지 내려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바위를 좋아하는 혜연이는 거침없이 바위를 오르내렸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니 야리가다케까지 가자고 농담을 건네자 그녀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며 엄살을 부렸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자욱한 안개 너머로 야쿠시다케 정상 표식이 희미하게 보였다. 일본 100대 명산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야쿠시다케 정상은 비바람이 풍경을 삼킨 상태였다. 악천후 속에서 무사히 정상을 밟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를 때와 달리 하산 길은 평평해서 걷기 수월했다. 궂은 날씨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명산을 보러 올라오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야쿠시다케(2,701m) 산장이 나타났다. 멋스러운 풍경에 하룻밤 머물고 싶었지만, 야기 할아버지 일행과 함께 하산하기에는 거리가 멀어 예정대로 야쿠시다케토게 캠핑장까지 내려갔다.
 
비에 물이 불어난 계곡을 끼고 걷자니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되돌리려는 찰나 계곡 건너편에 붉은 리본이 보였다. 조심스레 계곡을 건넜다. 수풀을 헤치며 내려가자 탁 트인 캠핑장이 나타났다.
 
캠핑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 반가웠다. 체크인을 위해 배낭을 두고 20분 거리의 타로다이라太郎平산장(2,330m)으로 갔다. 등산객들이 마시는 생맥주를 보자 혜연이를 두고 온 게 후회됐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텐트를 다 치자 때마침 비가 그쳐, 밖에 앉아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느긋하게 식사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작정이라도 한 듯 아침까지 이어졌다. 비에 흠뻑 젖은 텐트를 배낭에 대충 집어넣고, 야기 할아버지 일행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타로다이라산장으로 갔다. 걸음이 빠른 우리는 오리다테折立ヒュッテ산장(1,356m)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먼저 출발했다. 굵은 빗줄기에 길이 미끄럽고 시야가 가려졌지만, 길이 완만해서 예상보다 빨리 하산할 수 있었다.
 
야기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역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한국에서의 재회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야리가다케를 오르지는 못했지만, 악천후 속에서 험난하고 멋진 코스를 걸었다는 뿌듯함에 혜연이와 나는 끊임없이 추억을 곱씹었다.
월간산 590호
등록일 : 2018-12-14 10:26   |  수정일 : 2018-12-14 10:26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NS 로그인
  • 페이스북 로그인
  • 카톡 로그인
  • 조선미디어 통합회원 로그인
  • pub 로그인
댓글을 입력해주세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