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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에코 트레일 | 17~18구간 역사문화]
낮아서 높이 이름난 고개 추풍령!

글 | 신준범 월간산 기자   사진 | 주민욱 기자

용문산기도원과 효곡재사로 본 종교 변천사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시골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추풍령에서 개머리재에 이르는 낮은 백두대간 줄기를 설명한 말이다.
 
허나 대동여지도를 보면 200m대까지 낮아지는 이 산줄기를 굵은 선으로 표시했다. 낮은 야산을 굵은 선으로 강조한 고산자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백두대간의 가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낮은 언덕에 가까운 산줄기지만, 이 능선을 경계로 서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은 충남의 젖줄인 금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은 경상도의 젖줄인 낙동강이 된다. 야산에 불과한 낮은 산줄기가 오랜 세월 인간 생명의 근원이었던 물길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의 산맥론에서는 하등 가치 없는 구릉성 산지이고, 현대인의 눈에도 평범한 시골 뒷산인 이 산줄기의 가치를 우리 선조들은 수백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을 가르는 이 산, 즉 백두대간의 흐름이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영역을 가르고 문화와 언어까지 가르는 중요한 분류체계였다.
 
이번 구간의 시작 지점인 추풍령은 연배가 있는 은발의 등산인들에게는 가수 남상규의 ‘추풍령’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랫말처럼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은 아니다. 해발 200m대에 불과한 낮고 희미한 고개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런 노랫말이 생겨났고,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을까.
 
추풍령의 무게감은 대관령이나 한계령같이 압도적 높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추풍령은 낮아서 높이 이름난 고개다. 조선시대의 추풍령은 문경새재(조령)처럼 영남과 서울을 오가는 이들로 붐비던 고개가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부터 붐비는 고개가 되었다. 가파르지도 않고, 터널을 뚫을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기차가 지나기 좋은 조건은 없었다.
 
여기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추풍령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개가 되었다. 이때부터 통일신라 때 9주의 하나로 큰 고을이었던 상주는 추풍령을 낀 김천보다 한갓진 도시가 되었다. 조선 성종 때 전국을 8도로 정리하면서 ‘경상도’라 칭했을 때 그 이름은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었다. 도로 하나가 고을과 고개의 지위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역사·지리적으로 보면 이번 구간은 추풍령에서 용문산까지를 제외하면 상주의 권역에 속한다. 따라서 신라에서 조선에 걸쳐 군사적 요충이자 영남의 대읍이었던 상주의 영향력과 문화적 파급력이 크게 미친 영역이었다. 대간은 상주를 관통해서 북진하는데 동쪽은 상주시내 방면이며 넓은 평야가 있어 많은 마을이 발달했다. 상대적으로 대간 줄기의 서쪽은 산지로 에워싸인 좁은 분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 권역에 비해 마을 수도 적고 발달이 더딘 편이었다.
 
이곳 대간 줄기에선 유교의 산 역사와 개신교의 산 역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용문산 기슭의 용문산기도원과 상주 공성면 효곡리의 효곡재가가 그것이다. 용문산기도원은 평안북도 박천군 출신인 나운몽 목사가 1947년 ‘애향숙’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기도원으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나운몽 목사는 신비체험을 바탕으로 부흥회를 주도했으며, 구국기도를 접목한 용문산기도원 운동을 벌였다. 1955년 기드온고등성경학교를 설립했고, 잇달아 기드온신학교와 기드온수도원을 창설했다. 1960년대에는 학생과 신도 700여 명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300여 가구 1,000여 명이 상주했으며, 비교적 최근인 2010년에는 200여 명이 상주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신도 3만여 명이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북진통일’을 한다며 신학생 300여 명이 김천에서 대전까지 무임승차하는 사건, 신학생과 수도사 등 400명이 ‘멸공통일’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향해 행진하면서 미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지나친 신비운동을 막았던 기존 개신교로부터 논란이 벌어져 이단 논쟁 시비가 일기도 했다.
 
1978년 정부에서 교단 없는 기도원을 철거하려고 하자 나운몽은 미국 오순절성결교회와 제휴해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라는 교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미국 본 교회로부터 ‘오순절성결회’라는 명칭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처분을 받았다.
 
나운몽은 감리회에 소속되려고 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따로 교단을 만들자고 반대했다. 나운몽 목사는 2009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2014년 감리교로 편입되었다.
 
회룡재에서 백학산으로 이어진 대간 줄기에는 효곡리가 있다. 지명의 유래가 된 것은 효곡서원이다. 선조 때 충신이며 학자인 우곡愚谷 송량宋亮 선생에게 제사를 올리고 자재를 훈육하기 위해 증손인 송영이 효곡서원을 창건했다. 송량은 임진왜란 때 의거해 전공을 세웠으며, 왜란 당시 두 아들이 송량을 구하려다가 죽고, 두 딸도 수절했다고 한다. 도남서원을 창설(1606년)하고 향풍쇄신과 흥학육영에 앞장서는 등 효충의 표본으로 불렸다.
 
효곡서원은 정조 8년(1784)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서원의 강당 건물과 사당을 합해 효곡재사孝谷齋舍라고 칭했다. 송량은 유교를 실천한 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소곡所谷을 효곡孝谷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용문산에서 백학산으로 뻗은 10㎞ 남짓한 짧은 대간 줄기 속에 유교와 개신교, 서로 다른 가치관과 종교관을 가진 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백두대간 줄기에는 능선의 오르내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와 근대사의 정신적 혹은 종교적 변천을 보여 주는 굴곡 또한 담고 있다.
출처 | 월간산 588호
등록일 : 2018-10-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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