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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마지막 숨결 담긴 ‘달궁’

글 | 신준범 월간산 기자

만복대~정령치 능선을 지정학적 요충지로 이용, 성삼재·팔랑재 유래 낳아

마한의 마지막 혼이 남은 땅이다. 백두대간이 노고단에서 북쪽으로 방향 꺾어 흘러가는 지리산 서북능선에는 마한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마한 왕조는 만복대와 정령치로 이어지는 대간 자락 동쪽 기슭의 달궁계곡에 은거지를 마련했다. 1000고지가 넘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를 천연 요새로 이용한 것이다. 이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는데, 남쪽은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해 ‘성삼姓三재’의 기원이 되었다. 서쪽은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을 배치해 정령치, 동쪽은 황 장군을 배치해 황령, 북쪽은 8명의 장군을 배치해 팔랑재가 되었다.

달궁은 구전 속의 전설로 전해 오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흙이 씻겨 나가 달궁 터와 유물이 드러나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일본 순사들이 가져간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구전과 유물 외에 서산대사가 황령 아래에 있던 절 황령암에 대해 적은 <청허당집>에도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 왕이 지리산에 왔으며 장수의 성을 따서 고갯마루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달궁의 도성이 72년간 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세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에도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정령치에서 큰 고리봉으로 이어진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 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볼 수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큰 고리봉 정상 부근 암벽에는 마애불상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된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다. 12구의 불상으로 되어 있다고 하나 훼손이 심해 3구만 알아 볼 수 있게 남았다. 이 중 가운데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 솜씨도 가장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이렇게 규모가 큰 불상군은 무척 희귀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각 양식이 고려 초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곳에서는 예부터 마한장군상이라 불렸다. 구전에 따르면 구한말의 포수들도 마한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짐승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만큼 마한 왕조가 머물렀던 72년의 세월은 지명과 유물로 주민들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산골 중에서도 가장 깊은 오지산골에 마한의 왕과 군사들이 70년 넘게 궁궐을 짓고 살았으니, 조용한 산골주민들에게는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전해온 얘깃거리였을 것이다. 
 
마한은 BC 1세기부터 AD 3세기에 전라·충청·경기 지방에 분포한 나라로 5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마한에 관한 구체적 역사기록은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보면 서기 8년 백제군에 의해서 마한의 수도가 함락되고 이듬해 4월 멸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삼국사기>에 ‘마한과의 전투가 있었다’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이 존속된 듯하다.

마한의 잔여세력이 멸망 후에도 계속 항거하거나 유랑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으로 볼 때 달궁達宮, 月宮마을에 일종의 망명국가로 쫓겨 들어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한 부족국가도 이 유랑의 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확실한 것은 지리산 서북능선 역사의 첫 페이지는 마한이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고, 구전을 통해 200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백두대간 3~5구간은 성삼재에서 사치재까지 줄곧 남원 땅을 가로지른다. 남원에는 2개의 큰 물줄기가 있는데, 그것을 가르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대간을 기준으로 왼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요천이 되고, 오른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강은 운봉, 산내, 마천, 산청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만수천이 된다.

만수천의 발원지 덕산저수지 옆에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이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마을로, 비가 내려 왼쪽에 떨어지면 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는 비는 운봉으로 흘러간다.

노치마을에서 여원재, 고남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의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

이성계를 승리로 이끈 여원재 주모

백두대간 남원 구간은 지리적 여건상 군사 요충지여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싸움이 잦아 산성이 많은데,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대표적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정유재란 때의 만인의총, 근대에 들어서는 동학농민전쟁, 현대에 와서는 6·25 때의 빨치산 등 전란이 유난히 많았다.

운봉을 지나 인월로 조금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마을이 있다. 비전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과 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이곳에서 섬멸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그때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이 크게 이길 수 있었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백두대간 여원재에도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여원재에서 주막을 꾸려가던 여인이 있었는데 고려 말 혼란을 틈타 이곳까지 침략했고, 치욕을 당한 여인은 자결했다고 한다. 이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한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남원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은둔 포교지이자 수행지이기도 하다.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은 최제우가 동학경전을 편 곳이며, 이곳에 기거하면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동학이라 고치고 유·불·선, 인내천人乃天을 주창했다.

백두대간은 남원 땅을 가르며 수많은 계곡을 풀어내어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허나 양면성을 띠고 있어 천혜의 군사요충지로서 많은 피바람을 몰고 왔다. 사람을 살린 것도 대간이고, 죽인 것도 대간이었다. 지금은 등산인들을 품어주는 건강한 산행의 요람이 되었으니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출처 | 월간산 583호
등록일 : 2018-05-1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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