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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도 얼어 죽는 곳이 산이다

이인정 회장의 ‘한국 山岳史’ 회고③

글 | 이인정 UAAA 회장   정리 | 김기환 월간산 기자

설악산 두 번째 이야기,
산에 대한 두려움과 교훈을 준 1969년 ‘10동지 사고’
 
얼마 전 산악인 정광식의 비보를 접했다. 1982년 김정원, 남선우와 알프스 아이거 북벽을 오른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산악부 출신의 등반가다. 그가 1989년에 책으로 펴낸 아이거 등반기록 <영광의 북벽>은 지금까지 한국 산악인이 쓴 최고의 산악문학으로 꼽는다. 또한 그는 한국인 최초로 네팔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많은 산악인들을 먹이고 재운 인물이기도 하다. 선구적 산악운동가로 험준한 길을 걸어온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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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일어난 눈사태 사고 이후 구조작업을 펼치는 모습. 사진 이인정 제공

최초의 눈사태로 인한 산악사고
 
유명을 달리한 산악인의 소식을 듣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산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에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나에게 설악산은 이런 아픔의 진원지와 다름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눈사태로 인한 대형 산악사고 ‘10동지사고’가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사고를 당한 한국산악회 훈련대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 1969년 2월 14일, 죽음의 계곡에 눈사태가 발생했을 때 내가 속한 ‘A파티’는 대청봉에서 설상훈련 중이었다. 사고는 피했지만 동료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훈련대에 선발된 것은 나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꿈에 그리던 한산 배지를 달고, 히말라야 원정도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훈련대원으로 선발된 것은 1968년 말이었다. 한국산악회는 각 대학산악부와 주요 클럽에서 대원 2명씩을 추천받아 훈련을 진행했다. 동국대학교에서는 나와 한덕정씨가 뽑혔다. 설악산 훈련은 히말라야 원정대원을 선발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훈련대원들 모두 고 이희성 대장과 전담 훈련대장의 지도하에 열심히 노력했다. 어려운 경제사정과 조악한 장비에도 대원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추위를 피하는 훈련을 하려고 가랑잎을 덮고 자고 서양식 등반식이 입에 맞지도 않았지만, 정식 멤버로 선발되기 위해 대원들은 최선을 다했다. 노력했지만 나의 최종 평가 점수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이 약하고 깡마른 나는 사실 정신력으로 버텼다.
 
나는 훈련대에서 식량을 담당했다. 국내 최초로 수분을 제거한 빵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식 식단을 도입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서양식 식단은 우리에게 잘 맞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은 한국음식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훈련과정 역시 원시적이었다. 조악한 지게배낭에 많은 짐을 짊어지고 걸어야 했다. 포터를 선발하는 것도 아닌데, 하중훈련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했지만, 분명 효율적인 등반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한산 훈련대는 두 개 조로 나누어 운영됐다. 전 대원이 죽음의 계곡에서 설상훈련을 한 뒤, 내가 속한 팀은 스키를 메고 설벽을 지그재그로 치고 올라 대청봉으로 이동했다.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이었다. 눈사태가 일어난 뒤 남은 대원들은 구조작업에 투입됐다. 하지만 눈사태가 덮친 계곡은 이미 평평하게 변해 있었다. 설벽에 설치했던 붉은 자일의 끄트머리만 보일 정도로 많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에 묻힌 대원들은 갈비뼈가 다 부러졌고 가지고 간 스키도 부서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너무도 슬프고 무서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인생관에 큰 변화 준 사건
 
설악산 10동지사고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눈사태로 인한 대형 산악 사고였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재난에 모두 놀라고 당황했다. 어린 나이에 큰 사고를 접한 나도 인생관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그 사고 이후, 나는 죽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산을 어떻게 다녀야 할지 고민도 많았다. 결국 나는 ‘산악문화 발전’을 위해 동료들과 뜻을 모아 산악잡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월간山>이다.
 
사실 설악산에서 산의 무서움을 느낀 것은 죽음의 계곡 눈사태가 처음이 아니었다. 1968년 10월 산악부 후배들과 설악산 12선녀탕 산행을 갔을 때도 사고를 목격했다. 계곡으로 들어가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넜는데, 멀리서 어떤 사람이 허겁지겁 우리를 불렀다. 사고가 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7명이 사망한 가톨릭의대산악부 12선녀탕 조난 사고였다. 우리는 곧바로 수색에 참여해 여러 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가슴 아프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고를 경험하며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실제로 10동지사고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설악산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민간구조대가 조직되어 지금과 같은 구조시스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내외설악 구조대가 따로 생기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산을 제일 잘 아는 주민들이 구조대원으로 참가하면서 큰 도움이 됐다.
 
1969년 사고 직전 설악산을 떠나 화를 면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박찬홍 지도위원은 눈을 헤치고 설악동까지 들어갔다가 서울로 돌아간 케이스다. 박 위원의 어머니가 나쁜 꿈을 꿔서 집안에서 그를 데리러 설악산까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날 짐을 싸서 귀경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훈련대 취재를 위해 동행했던 MBC의 박채규 기자 역시 사고 전날 설악산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다른 취재 일정이 생겨 급히 이동하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기적처럼 사고를 피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는 사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다. 설동을 파고 텐트를 쳤던 편안한 자리들이 알고 보면 대단히 위험한 곳이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강의할 때 늘 “산에는 사계절이 다 있다”고 이야기한다. 더워서 죽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여름에도 얼어 죽는 곳이 산이다.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반드시 여분의 휴대전화 배터리를 챙겨야 한다. 이건 수십 년 동안 산에 다니며 많은 죽음을 본 늙은 산꾼의 진심 어린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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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李仁禎·73)


아시아산악연맹 UAAA 회장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산악운동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는 산악계의 큰형님입니다. 1969년 설악산 10동지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잡지 <월간山>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1988~1998), 한국산악회 부회장(1998~2002), 한국등산학교 교장(2000~2008), 주한네팔 명예영사(2001~2006) 등 산악계의 주요 직책을 거쳤고, 2005년부터  11년 동안 대한산악연맹의 수장을 맡아 한국 산악계를 이끌었습니다.
출처 | 월간산 582호
등록일 : 2018-04-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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