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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여항산, 이 땅의 마지막 야생 표범이 살던 산

글 | 한승국 동화작가·월간山 기획위원

좌촌 3코스~정상~여항산성 하단 에둘레길 원점회귀 산행

성서에 나오는 그 옛날 노아의 홍수가 정말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 무너미고개, 배달은봉과 같은 지명이 많은 걸 보면요. 무술년 신년산행지로 다녀온 경남 함안의 여항산艅航山도 이름에서 그런 맥이 짚힙니다. 게다가 별명도 ‘각(곽)데미산’이라는데요, 전해오는 말도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올라 정상에 각(곽) 하나를 놓을 자리만큼만 남았다는 데서 얻은 거랍니다.

또 산 전체는 ‘갓을 쓴 사람이 요강에 오줌을 누는 형태’라고 해서 요강산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옛날 드론도 없이 어떻게 이런 산세를 읽을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산만으로도 흡족한데 이런저런 진기한 사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르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지기 마련이지요. 이번 여항산은 울산에 사는 고교 친구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제가 울산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이른 새벽 친구 차로 출발했지요.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 좌촌마을에 도착한 것이 오전 10시 반 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곳을 들머리·날머리로 원점회귀 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여항산 등산로는 마산합포구 옥방교 쪽에도 있습니다만 부산이나 울산 쪽에서는 좌촌마을로 오르기가 쉬워서입니다. 서쪽 마을 뒤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산이 “어서 품으로 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차장에 세워놓은 산행안내판은 실경 사진 위에 등산로가 그려져 더 실감이 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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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입니다. 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까만 산줄기 보이지요.

여항산의 동쪽 산자락 좌촌마을에서 해발 770m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세 코스가 있습니다. 그중 산을 좀더 많이 탈 수 있는 제3코스를 택합니다. 이 마을 참 특이합니다. 평일인데도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 단 게요.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함안 서북산전적지란 곳인데요, 1950년 8월 한국군과 UN군이 여항산의 남서쪽 능선 중 한 봉우리인 서북산(738.5m)을 중심으로 남강과 낙동강을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는데, 45일간 19번이나 서북산 정상을 뺏기고 뺏는 접전 끝에 적을 물리친 승전지라 주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365일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선지 동네 담장에 열린 새빨간 남천 열매들까지 그때 흘린 아군의 피처럼 느껴져 숙연해지고, 걸음걸이마저도 조심스러워집니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야생 토종 표범이 1970년 3월 마지막으로 잡힌 곳이 바로 이곳 여항산이기 때문입니다. 포수에게 잡힌 표범은 수컷으로 18살로 추정되며 몸길이 1.5m에 몸무게가 51.5kg으로 당시 가격이 70만 원쯤 됐다고 합니다. 이곳이 표범 같은 맹수가 가장 오래 살 수 있었을 만큼 생태계가 좋았다는 걸 증명하는 실화이죠.

이를 뒷받침해 주듯이 등산로로 들어서자마자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는 숲이 펼쳐지는데요, 앞서 걷는 친구가 언뜻 한 마리의 야생 표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나무들의 수령 40~50년 그러니까 6·25 때 격전지로 불타버린 산등성이에 어린 묘목을 식림한 것이 이렇게 장성했을 것입니다. 근데 의외로 길이 가파릅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싸아~ 하니 추운 날씨에 향긋한 솔향이 기분을 아주 상쾌하게 해줍니다.

아마도 이 길을 여름철에 오른다면 금방 주저앉거나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숲 중간 길가에 자그만 장승 둘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나 있어 따라가 봅니다. 가재샘이 나옵니다. 위쪽 어느 골짜기 틈에 묻었는지 가는 배관 끝으로 물줄기가 졸졸 흐릅니다. 한겨울인데도 흐르는 걸 보니 신뢰가 느껴져 친구가 받아 주는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킵니다. 여항산의 체액과 같은 물이지요. 인근의 빽빽한 소나무 숲 땅속을 흘러온 덕분인지 차지 않고 상큼한 물맛이 초반의 갈증을 싹 달래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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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70m 여항산 정상 표지석입니다.

지리산 권역을 빼면 낙남정맥 최고봉

되돌아 나와 오르는 등산로는 여전히 소나무 숲을 관통합니다. 아까보다 더 가팔라지는데 예전 같으면 ‘에구! 무슨 놈의 길이 이래?’ 푸념할 텐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신 정상이 더 가까워지겠지’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걸로요. 불평과 푸념이 일의 진척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 사이 불었을 술살을 뺄 기회로구나’ 하며 즐겁게 받아들이는 거, 이순을 넘은 산객이라면 당연 그래야지요.

이렇게 소나무 숲길을 1km 넘게 올라왔나요. 근래 올라본 그 어느 산보다 크고 적당히 잘 조림된 송림 같습니다. 이어 참나무 같은 일반 활엽수들이 자라는 구간, 즉 능선 길로 올라서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먼저 온 남녀 한 팀을 앞서 보내고, 등산로 초입에서부터 이날 같은 코스로 오르는 유일한 등산객인 부자 팀을 맞습니다. 같은 출발에 자꾸만 뒤처지는 게 고등학생 같은 아들이 힘들어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들은 군대를 다녀온 성년이고 산도 잘 타는데, 아버지가 힘들고 걸음이 더뎌서 그렇답니다.

지레짐작한 선입견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새해엔 선입견 금지! 해법은 조심스레 확인하는 것. 궁금한 거 많은 여항산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리고 즐겁게!’로 마음가짐을 바꿉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해지는 게 선입견입니다. ‘내가 다 겪어봤는데’ 하는 자만심으로 오해나 곡해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 삐치고 화가 나 언성을 높이곤 하는데 이게 사실은 착각이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정답은 없다,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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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후 조성된 송림인데요, 얼마나 울창하던지요! 제가 걸어본 송림 중 가장 크고 가파르기도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또 한 해 그 늙음의 길을 걷는 데 금과옥조로 삼을 사항입니다.

능선 길도 가파르긴 마찬가집니다. 다른 건 이제부터는 건너편 산등성이와 아랫마을이 조금씩 조망되는 점입니다. 6·25 때도 불타지 않았다가 최근 고사한 거대한 소나무 고목지대를 통과하고 한 구간 나무 데크 계단 길을 올라서니 조망하기 좋은 바위가 나타나 친구를 모델로 사진을 찍습니다. “이거 월간山에 나오는 거냐?”라며 멋쩍게 포즈를 취해 주는 친구는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하고도 10년 넘게 현역을 뛰고 있는 능력자입니다.

느낌으로 정상부 능선이 가까워진다 싶은데 흐트러진 돌밭이 나옵니다. 너덜겅지대도 아닌데 싶어 자세히 보니 산 어깨를 둘러쌓은 산성 터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가야 또는 신라 신라시대 때 왜침을 대비한 석축으로 정상 동쪽 50~60m 아래에 750m가량 흔적이 남아 있고, 배넘기도랑(배능재) 위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높이 3.2m, 폭 4.3m의 협축석성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지러이 흩어진 성벽 돌들을 밟고 올라서니 바로 정상부 능선. 헬기장이 나타납니다. 이정표를 보니 좌촌마을에서 2.5km, 미산령에서는 1.5km를 올라온 지점입니다. 여항산 정상은 불과 300m. 이제까지 동에서 서로 오르던 산행 방향도 여기서부터는 북에서 남으로 꺾입니다. 한켠에 먼저 온 네 명의 산객이 점심상을 편 헬기장은 생각보다 넓고 아주 잘 조성돼 있습니다. 쉴 의자에 평상까지 갖춰 작은 공원을 연상케 합니다. 남서쪽으로 마치 평지에서 솟아오른 듯 봉긋한 산 고스락은 앞서 언급한 ‘갓을 쓰고 요강에 오줌을 누는’ 전체 형상 중 갓에 해당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봉성저수지가 요강인 셈일 테고요.

역광 속에 신비롭게 느껴지는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좌우가 천애 벼랑인 길입니다. 나무 데크 길도 지나 도착하니 아까 본 남녀 한 쌍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지역 산악회 간부들로 사전 답사 산행을 왔다고 합니다. 저에겐 그림 같은 사진을 위해 꼭 필요한, 더없이 반가운 진객이라 하겠습니다.

여항산은 지리산 영신봉(1,651.9m)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이 삼신봉(1,289m)을 타고 진주와 고성을 거치며 고도를 낮추다가 치솟은 산으로, 지리산 권역을 빼면  낙남정맥 최고봉입니다. 마침 그리 청명하진 않지만 북서쪽 멀리 낀 운무 위로 낙남정맥의 시발점인 지리산 자락과 우뚝한 천왕봉이 조망됩니다. 낙남정맥은 다시 남서쪽으로 반원형으로 에두르는 능선을 따라 서북산(738.3m), 대부산(649.2m)을 지나 봉화산(674m)을 거쳐 한치로 내려섰다가 다시 광려산(752m)과 대산(726m)을 지나 무학산(760m)으로 이어지지요. 오늘은 흐릿하지만 진동 앞바다 작은 섬들까지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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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산 정상부 헬기장에서 바라본 좌촌마을 방향인데요, 저 아래가 보이는 물이 바로 봉성저수지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이 산산첩첩. 해발 800m도 안 되면서 이렇게 공중에 우뚝 솟아 지리산과 남해를 낀 조망까지 가능한 산이라니 여항산이 다시 보입니다. 이름의 연원에 대해 쓴 글은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안 됐는데 정상에 서니 여기서는 눈 닿는 어디든 다 섬 같고 배만 타면 가 닿을 수 있겠다 싶은 게 이름 때문인가 싶습니다. 새해를 맞아 헤쳐 나가야 할 것들. 그 출발점이 여기고 사방에 보이는 산봉들이 기항지들 같기도 하고요.

정상 아래는 곧바로 내리꽂는 암벽구간입니다. 저 아래서 보면 이 구간이 칼날 능선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나무데크 계단을 내려서니 키는 정상보다 작지만 하체는 더 길어 뵈는 또 하나의 바위가 반겨줍니다. 곧바로 좌촌1코스로 내려가는 갈림길(1.8km)입니다. 우리는 무시하고 능선 길을 좀더 전진해서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합니다. 곧이어 길가에 북한산 사모바위를 살짝 닮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게 여항산 사모바위인가 싶습니다.

또 하나 지그재그로 된 큰 나무 데크 계단을 내려섭니다. 맞은편에 ‘위험 구간이니 우회하라’고 써놨는데요. 그래서 우회해서 내려가 반대편에서 올려다보니 로프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아마도 모르고 내려선 사람들을 위한 걸까요? 여기서 점심을 들려고 자리를 펴니 아까 정상에서 만난 남녀 한 쌍이 이 암릉으로 건너오더니 로프를 타고 내려옵니다. 마치 암벽 하강 시범을 보이듯이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지’ 자위하며 ‘새해 첫 산행에서 만났으니 이름이나 압시다’ 했더니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어 휴대폰에 입력합니다.

어느 산악회인지 올 한 해도 ‘안산’ ‘즐산’하길 빌어 줍니다. 여기서 보니 여항산의 서쪽 면이 잘 올려다 보입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날카로운 암릉들이 작은 용아릉입니다. 이제부터 능선을 따라 서북산까지 갈 것인가가 다음 미션인데요. 시간이 1시가 넘어 한 30분만 더 가보기로 합니다. 여항산의 서쪽 진전면으로 흘러내려가는 몇 갈래 능선과 계곡들도 보통이 아닙니다. 그 방면으로는 대도시를 끼고 있지 않아선지 자연 파괴가 덜돼 보입니다. 그 지역 주민에게는 죄송하지만 그쪽으로는 더 이상 개발은 없길 간절히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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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항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펼쳐지는 서북산 가는 능선입니다. 몇 군데 이런 나무 데크 계단이 설치돼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었지요. 2 여항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는 능선 길의 한 암봉인데요, 전후에 위험 구간이라 표시해 놨지만 실제로는 이런 로프를 설치해 놓고 그래도 오르내릴 사람은 안전하게 이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3 여항산 정상 남동쪽으로 돌아나오는 길에 만난 너덜겅지대입니다. 재미있게 쌓아놓은 돌탑과 저 아래 봉성저수지 경치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무술년 새해 어떤 어려움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서북산을 1.5km쯤 남겨놓은 지점,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가면 바로 마당바위를 만날 수 있는 지점에서 돌아섭니다. 여항산 정상이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일 만큼 왔으니 그만 가도 되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하산지점으로 택한 곳이 ‘좌촌 3.1km’란 이정표가 걸린 능선 갈림길입니다. 아까 1.8km 거리에 1코스를 만나는 곳보다 훨씬 먼 곳입니다. 길이 능선에서 아주 완만하게 여항산 정상 쪽으로 고도를 낮추는데요, 이번에 오른쪽으로 서북산 정상부 능선이 눈높이에 걸립니다.

왼쪽 여항산 정상 아래 가슴팍을 에두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고 푹신한 흙길이라 좋은데, 금방 낙엽이 잔뜩 쌓인 길로 바뀌어 더 푹신합니다. 인근에 참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많이 자라고 있나 봅니다. 그러다 커다란 너덜겅지대를 만납니다. 누군가 이곳에 돌탑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부슨 염원? 저 아래 봉성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데, 돌탑과 함께 아주 멋진 풍경이 되어 줍니다. 내림 길에 만나는 의외의 경치 선물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 산에는 들꽃들이 많이 피는데 꽃피는 계절에 확인하러 다시 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새해 또 몇 달 항해를 잘해야겠지요.

좌촌1코스 소나무 숲을 만나 하산 속도를 드높입니다. 오늘 천지개벽 홍수에도 끄떡없었던 여항산 봉우리를 밟았으니 올 새해 저도 웬만한 역경에는 끄떡없을 것 같고요. 순탄하면 오히려 저항력이 떨어질 것 같아 견딜 만한 고난이라면 얼마든지 오라고 자신 있게 도전장을 던지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무술년 새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잘 이겨내고 승리하는 한 해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월간산 579호
등록일 : 2018-01-12 14:54   |  수정일 : 2018-01-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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