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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성(聖)스럽고 가장 속(俗)된 도시, 나폴리의 선물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나폴리 프레제페 거리에서 파는 프레제페 장식들. photo Britt-Arnhild Wigum Lindland
“카오스가 주는 자극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할 생각이다!”
   
   “나폴리에 왜 자꾸 가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2017년만 해도 3월에 이어 두 번째 여행이다. 매년 한 차례 이상 들른다. 미식의 기본 중 하나가 편식 금지와 강한 맛의 배제다. 사실 대부분의 편식은 강한 맛에 끌려 이뤄진다. 와인의 시라(Syrah) 품종이나 마늘, 카레, 설탕이 그러하듯 강한 맛은 약하고 섬세한 맛을 간단히 정복한다. 시라, 설탕의 세계에 익숙할 경우 다른 음식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치나 카레 하나면 된다. 혀끝을 마비시켜줄 강렬한 자극만 찾게 된다. 약하고 세심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이 왜 시라보다 높게 평가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강하고 강렬하고 달콤한 것이야말로 카오스, 즉 혼돈의 속성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그렇듯 그동안 믿고 추구해온 세계관을 한순간에 밀어낸다. 혀의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피자, 중독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강한 풍미의 와인,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드는 설탕 범벅 디저트…. 나폴리는 카오스인 동시에 카오스 자체를 만들어내는 도시다. 이탈리아, 나아가 유럽을 대표하는 카오스의 원점이라고나 할까. 카오스의 DNA가 그러하듯 나폴리에서의 시간은 뇌 어딘가가 중독된 것 같은 강한 기억으로 남겨진다. 한 번이라도 나폴리를 경험하면 평생 잊을 수 없다.
   
   카오스가 주는 자극과 더불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겨울 나폴리에 들렀다. 고대 그리스 신전과 나폴리 교회와의 관계다. 기원전 2000년 나폴리는 고대 그리스인이 지배하는 청동기시대에 진입한다. 로마가 들어서면서 영향권에서 벗어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야말로 나폴리의 중심 지배자였다. 로마, 비잔틴, 노르만, 아라곤, 부르봉, 나폴레옹, 합스부르크, 가리발디로 이어지는 지배자 가운데 대부(代父) 격이 그리스다. 나폴리 바로 옆의 시칠리아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고대 신전은 그리스 문명의 핵심이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 신전이야말로 그리스 문명의 출발점이자 결론이다. 나폴리는 바티칸 로마와 더불어 엄청난 수의 교회를 가진 곳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나폴리 교회 대부분이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출발했다. 제우스·아폴로·아르테미스·비너스를 기리는 신전의 터가 4세기 이후 기독교 교회로 변신한다. 크고 화려한 교회일수록 3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인기 있는 그리스 신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2000년 전의 상황을 정확히 알려주는 자료나 증거는 없다. 정확히 나폴리 어디에 어떤 신전이 있었는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공부한 것을 토대로 직접 관찰하면서 추정하는 것이 전부다.
   
   나폴리의 중심을 지키는 두오모(Duomo), 즉 마리아 승천 교회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안수식 장소로 유명하다. 교회 속의 교회라 불리는 두오모 안의 ‘산타 레스티튜타(Santa Restituta)’가 안수식 현장이다. 모자이크가 새겨진 작은 공간에 안수식이 이뤄지던 목욕시설이 들어서 있다. 주변을 자세히 실펴보면 구석에서 지하수가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역사지만 안수식 현장의 원형은 제우스와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폴리 한복판에 물이 흐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대 그리스 신전의 터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물은 고대 신전의 필수조건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리스 신전 대부분이 그대로 교회가 되었고 신전 주변의 물길은 안수식 장소로 변해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가 최근 ‘그리스 이야기-알렉산더 대왕’ 제3집을 출간했다. 유럽 문명문화사에 빠질수록 로마와 기독교의 역사, 나아가 고대 그리스를 더듬게 된다. 나폴리는 그 같은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가 뒤섞여 돌아가는 카오스의 현장이다.
   
   
▲ 나폴리 프레제페 거리.

   연말연시=프레제페
   
   프레제페(Presepe)는 나폴리에 간 두 번째 이유다. 지난 3월 나폴리에서 만난 장인(匠人)에게 평생 간직할 프레제페 하나를 주문했다. 프레제페는 영어로 ‘예수 탄생 장면(Nativity Scene)’쯤으로 번역된다. 12월 25일 성탄절에 맞춰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장면을 작은 인형이나 밀랍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프레제페다. 연말 유럽에 가보면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성스러운 작품이자 그 자체가 종교의식이다. 1223년 아시시(Assisi)의 산 프란체스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뒤부터 일반화됐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인형이 아니라 직접 사람들이 예수 탄생 당시를 재현하며 성탄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상식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00년 뒤 프레제페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구교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경우 ‘연말연시=프레제페’로 통한다. 우상을 거부하는 신교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대신 들어선다. 프레제페는 대략 12월 초부터 1월 초까지 한 달 동안 전시된다. 바티칸을 비롯해 유럽 내 교회는 물론 공공기관과 가정집에도 프레제페가 만들어진다. 아기예수와 마리아, 요셉 3명으로 이뤄진 미니 프레제페에서부터 동방박사, 소, 당나귀, 양치기소년, 마을주민 모두가 경배를 드리는 초대형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 그림으로 이 모든 걸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프레제페에 등장하는 의상이나 건물을 반드시 당시 베들레헴 상황과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 프레제페가 들어서는 도시의 환경, 역사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면 된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성화(聖画)에서 보듯 짚신 신고 갓을 쓴 요셉과 한복 차림의 마리아도 가능하다. 맨발의 검붉은 토기인형으로 장식된 에티오피아 프레제페는 필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작품 중 하나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는 매년 프레제페 경연을 벌인다. 전문 장인이 만든 크고 화려한 작품들도 있지만 어린이가 만든 소박한 프레제페도 선보인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유년기 기억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 어린이들에게 프레제페는 꿈과 상상의 무대다. 가정집 프레제페는 한꺼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거리에서 파는 인형 장식물을 하나씩 모아 매일매일 손질을 한다. 가장 늦게 프레제페에 들어서는 인형은 아기예수다. 12월 25일로 넘어가는 밤 12시에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소와 당나귀 사이에 들어선다. 어린이들은 잠도 안 자고 밤을 새우면서 아기예수 장식에 나선다.
   
   나폴리에서 만난 장인에게 프레제페를 주문한 이유는 프레제페와 나폴리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전통과 역사에 매달리는 국민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인 모두가 고향의 프레제페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폴리 프레제페는 바티칸과 로마, 나아가 유럽 모두가 인정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나폴리 프레제페에 눈을 뜬 곳도 로마였다. 연말연시 로마 교회 곳곳에서 프레제페 전시가 열리는데 가끔 15세기나 16세기에 만들어진 골동품 프레제페도 선보인다. 필자의 경험이지만, 골동품 프레제페의 작가는 ‘항상’ 나폴리 사람이었다.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의미다. 왜 나폴리 프레제페가 인기를 끌었을까. 이유를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나폴리 프레제페만큼 사실적이고도 현장감 넘치는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 나폴리 프레제페 거리에서 마주한 프레제페 작품들.

   카오스의 대표 얼굴
   
   보통 프레제페는 성(聖)을 구현하고, 보여주며, 알려주기 위한 모델이자 교과서로 통한다. 파리 나무십자가소년단의 성가 같은 천상의 화음이 울리는 가운데 근엄·경건·신비를 주된 테마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나폴리는 어떨까. 성만이 아니라 속(俗)이 넘치고 넘친다. 2017년 나폴리 프레제페 경연에서 1위를 차지한 작품은 속이 95%, 성이 5%로 이뤄진 듯하다. 더불어 나폴리의 경우 프레제페 규모가 엄청 크다. 등장인물들이 성경 속의 인물만이 아니라 나폴리타노(나폴리 주민)까지 바글바글하다. 프레제페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나폴리타노는 성스러운 것이나 정결·신성·품격과 무관하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탐욕·질투·생존본능만 보이는 지저분하고 피곤한 군상들이다. 21세기 나폴리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카오스 도시 속의 진짜 나폴리타노들이 프레제페에 등장한다. 나폴리 프레제페의 인기는 바로 이 같은 현장감과 사실감, 나아가 ‘성과 대비되는 속’이란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탈리아 그 어떤 도시나 지역도 나폴리와 같은 프레제페를 연출해내지 못하고, 연출하지도 않는다. 카오스의 도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나폴리의 풍경 중 하나다.
   
   “나폴리 프레제페 전문 거리에 직접 가서 분위기를 읽는 것이 좋겠다. 지금이 가장 바쁠 때다.”
   
   프레제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나폴리의 한 알티자노(Altizano)로부터 들은 충고다. 이탈리아에서 알티자노라 불리는 사람들은 예술가로 통칭될 수 있지만 한 가지 예술 분야에 특화된 아티스트와는 구별된다. 원료 제작에서부터 창작, 장식과 전시, 영업에 이르는 총체적 과정에 전부 관여하는 것이 알티자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도 직접 원료를 구하러 다니는 등 알티자노의 성격이 강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 현장의 공기를 동시에 느끼면서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알티자노다. 알티자노와의 대화를 원한다면 알티자노와 같은 시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곧바로 나폴리의 대표적인 프레제페 거리인 ‘산 그레고리오 아르메노(San Gregorio Armeno)’로 향했다. 예수 누오보 교회(Ges Nuovo) 바로 옆으로 이어진, 나폴리 최고 프레제페 중심지다. 아기예수나 나폴리타노 인형을 파는 꿈의 거리다. 보통 프레제페 판매는 연말연시에 반짝하는 계절 비즈니스지만 나폴리는 다르다. 1년 365일 거래된다. 아기예수만이 아니라 나폴리타노의 일상에 관한 전시가 연중연시 열리기 때문이다. 나폴리가 프레제페의 원조이자 고향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이탈리아 내 프레제페 장인 대부분이 이 거리에 모여 있다.
   
   마침 프레제페 거리에 들른 날이 성탄을 앞둔 일요일이었다. 프레제페 거리는 초만원으로 터져나갔다. 나폴리타노 모두가 모인 듯 느껴졌다. 프레제페의 무대인 전시대에서부터 크고 작은 인형이나 장식물들이 거리 전체에 넘쳐난다. 프레제페 전시대의 바닥이나 배경은 소나무 껍질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작은 인형이나 장식물은 가격이 1유로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산이 넘칠 듯해서 물어보니 아직 고가의 장식물까지는 중국산이 잠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흙으로 구운 장식물은 나폴리의 특산물이다. 인형이나 장식물의 표정과 모습도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저가의 중국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하다. 인파에 휩쓸려 다니던 중 프레제페 전시대 제작에 열중하던 빈센초(Vincenzo)와 만났다. 나폴리를 상징하고 나폴리타노만이 갖고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빈센초다.
   
   “나폴리 프레제페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탄생 장면이다. 빛이 필요한 곳이다. 둘째는 피자 화로다.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장면을 어딘가에 넣어야 한다. 셋째는 서민을 위한 주점 오스테리아(Osteria)다. 모두 즐겁게 마시고 놀 수 있는 곳이 나폴리 프레제페의 필수 요소다.”
   
   빈센초가 설명해준 프레제페 관람법에 따라 전시된 작품들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세 가지 공통점을 전부 발견할 수 있었다. 카오스의 도시가 만드는 아기예수 성탄 장면이 먹고 마시는 곳과 오버랩된다. 예수가 행한 최초의 기적은 가나의 결혼식에서 이뤄졌다. 와인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예수는 곧바로 빈 와인병을 무한정 채운다. 다빈치가 남긴 명화이자, 교회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성화가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는 인간의 바른 삶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세속에 주목한 신의 아들이다. 그 어떤 신도 예수만큼 먹고 마시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카오스 도시의 최고 중심지가 프레제페 거리라는 사실, 카오스를 대표하는 얼굴이 나폴리 시민들이 365일 접할 수 있는 프레제페라는 사실을 예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가보(家寶)로 간직하기 위해 나폴리에서 구입한 프레제페의 제작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폴리타노의 99%는 나폴리를 뜨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차로 1시간 이상 밖으로 나설 경우 곧바로 불안해진다. 카오스가 갖는 중독성 때문이다. 바로 그 카오스의 한복판에 프레제페가 존재한다.”
등록일 : 2018-01-05 08:57   |  수정일 : 2018-01-0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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