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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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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0일 지리산 천왕봉 사진을 보며…

글 | 이원규 시인

강원도 인제군 가리산리 방재체험마을에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540km 정도 되니, 두 번 걸었던 ‘민족의 젖줄’ 낙동강 1,300리 길과 비슷한 거리다. 어쩌다 KTV(국민방송) ‘다정다감 마을의 귀환’ MC를 맡아 다섯 번째 방문한 마을이 인제의 가리산리였다. 2006년 여름, 엄청난 수해를 입은 마을이다. 그 아픈 상처를 딛고 새롭게 일어섰다. 이제는 다른 이웃들과 아이들에게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방재체험마을’ 1호로 거듭나 있었다.

때마침 가리산리마을이 그 유명한 원대리 자작나무숲과 가까웠다. 원대리뿐만 아니라 곳곳에 자작나무숲이 보였다. 이 방송 진행을 수락한 이유도 ‘오지마을을 돌다가 별나무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겠다’는 내심 또 다른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마을에서 그 첫 수확을 얻었다. 지난 2년 동안 강원도를 들락거리며 ‘별나무-자작나무숲’을 찍었지만 조금 아쉬웠다.

밤 9시가 넘어서자 이승용 PD와 김성웅 막내 작가에게 잠시 막걸리 한 잔 하며 쉬라고 일러두고 바이크 시동을 걸었다. 밤 기온이 뚝 떨어져 겨울용 장갑과 속옷을 챙겨 입고는 낮에 미리 봐두었던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간간이 지나가던 구름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자작나무 숲 위로 가을 은하수가 나타났다. 4월에서 7월까지가 우리나라 은하수의 절정이지만 강원도의 가을 은하수는 선명했다. 9월 말의 은하수라니! 숲이 아무리 좋아도 방향이 맞아야 했다. 여름 은하수보다 아랫부분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자작나무숲 은하수를 찍는 원 하나를 풀었다.

인제 촬영을 마치고 추억이 깃든 밤의 남한강과 북한강을 지나 곧바로 강화도문학관으로 강연하러 달려갔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인제의 권혁소 시인과는 잠시 통화만 하고 춘천의 송호필 시인과도 막걸리 한 잔 못 했다. 강화에서 화가 몽피 김경학 형의 지인들도 만났다. 함민복 시인 부부는 추석맞이 인삼 택배 때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함 시인의 어여쁜 아내가 인삼즙을 내밀었다. “바이크 타다가 지칠 때 드시라”며 ‘고려홍삼’ 한 박스까지 내주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함민복 시인은 지난 5년 동안 술을 끊고 이사한 뒤 텃밭을 가꾸며 운동을 하는 등 몸무게를 줄이고 있었다. 더 강건해 보였다. 나이 오십이 지나면서 몸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밥을 먹기도 하는 등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시를 쓰는 듯했다. ‘먼저 몸부터 바꿀 줄 아는’ 역시 멋진 시인이었다.

강화도에서 섬진강까지 달려오는 길이 행복했다. 저녁 8시30분에 출발해 쉬엄쉬엄 밤안개 속을 달려 새벽 2시에 도착했다. 2박4일 동안 가을바람의 길 삼천리를 달렸다.

살다 보면 악마와 천사의 얼굴이 뒤바뀌기도 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진 부자가 오히려 더 불행할 수도 있고, 여느 시골보다 도시 한가운데가 더 친자연적인 곳도 있다. 우리들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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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10일 지리산 천왕봉 사진. 사진 중앙 빵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분이 곽정화 선생이다. 나무 깃대가 보인다.

부산 대도심 공동체마을 행복지수 높아

부산 대도심의 한복판에서 지리산을 보았다. 투둑 투둑 알밤이 떨어지고, 산꼭대기 마을에는 집으로 가는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다. 속칭 부산 대연동의 철탑마을 ‘대연우암공동체마을’이었다. ‘마을의 귀환’ 제작팀이 농어촌 오지마을을 벗어나 처음으로 대도시를 찾아갔다.

60여 년간 대를 이어 살아오던 마을이 20년 전에 청천벽력 같은 철거 위기를 맞았다. 말하자면 남의 땅(부산외대) 위에 집을 짓고 살아온 지상권만 있는 ‘불법주택’ 마을이었다. 그때부터 마을주민들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우후지실雨後地實이라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더욱 더 내실 있는 공동체 마을로 거듭났다.

합법적인 땅 한 평 갖지 못했지만 이 도시 속의 산마을은 엄연히 그들의 삶터였다. 주말마다 마을 대청소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마을회관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마을 공동 텃밭을 일구고 길가에는 벚나무를 심은 지 20년, 이제는 봄날이면 온 동네가 환하게 꽃대궐이 되었다. ‘마을이 아이들을 키운다’는 말 그대로 이 동네의 아이들에겐 모두가 ‘작은 엄마’였고 ‘큰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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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9일 첫 산행을 시작하며 김밥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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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법계사에서 1박을 했다. 억새지붕과 두 보살이 보인다.

가난했지만 이 동네 아이들은 자라면서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다고 했다. 부모가 학교나 경찰서에 불려간 적이 없었다. 폐지와 빈병, 헌옷들을 모아두었다가 고물상에 내다팔아 마을기금을 만들고, 공동텃밭에서 나오는 와송(바위솔) 술을 담가 팔고 있다.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지만 온 동네 주민들이 밥상공동체가 된 지 오래였다. 기초자치단체의 지원이 전혀 없는 마을이다 보니 관官 지원 없는 주민주도형 공동체를 만들어온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같이 밥을 해먹으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주민들의 필요 물품도 거의 공동구매로 해결한다. 웬만한 먹거리는 텃밭에서 키우지만 과일이며 돼지고기 등이 필요할 경우 믿을 만한 생산지를 직접 물색한 뒤 주문을 받아 공동구매하니 훨씬 싼값에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다.

올해의 세계 행복지수를 보면 노르웨이(7.537)가 1위, 한국은 56위(5.838)라고 한다. 그런데 몇 년 전 대연우암공동체의 행복지수를 어느 기관에서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무려 7.48 정도의 높은 점수가 나와 재조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틀 동안 함께 지내보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동체가 잘 살아 있는 농어촌마을이나 네팔과 부탄 사람들의 환한 미소를 닮아 있었다.

이 마을에서 내려다보면 부산 시내의 바벨탑 같은 불야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주 가까운 곳들은 어느새 재개발 아파트 열풍으로 이 마을은 마치 ‘포위된 섬’처럼 남아 있다. 방송 마무리 멘트를 이렇게 남겼다.

“부산 대도심 속에 섬이 있다. 초록의 섬, 생명의 섬, 산꼭대기에 밥상공동체 섬마을이 있다. 비록 내 땅은 아니어도 대를 이어 살아온 우리 땅, 우리 산, 우리 하늘. 벚꽃이 피고, 알밤이 떨어지고, 마을 텃밭엔 무 부추 와송이 자란다. 산 아래 바벨탑 고층 아파트보다 행복지수가 훨씬 더 높은 섬 사람의 마을에 더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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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중봉 사진. 큰 나무의 그루터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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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다중노출촬영 사진인가, 1961년 지리산 천왕봉과 눈밭 사진이 저절로 합성돼 있다.

1961년 당시엔 천왕봉을 상봉이라 불러

추석연휴가 지나고 하동군 옥종면을 찾아갔다. 딸기로 유명한 곳이다. 옥종면 중에서도 마을 곳곳에 꽃밭을 일구며 공동체가 잘 살아 있는 법대마을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났다. 10월에 딸기하우스엔 꽃이 피고, 벌들이 날아다닌다. 11월 중순이면 빨간 딸기가 익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마을은 늦가을에 봄꽃을 피우고, 겨울 내내 눈밭에 딸기가 익어가는 곳이다. 전설 속의 ‘설산의 산딸기’를 날마다 볼 수 있는 ‘청학동’이자 ‘무릉도원’인 셈이다.

바로 이 마을 옥종면 법대리에서 <월간 山> 정기구독자를 만났다. 1945년생 정연호 어르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리산을 뻔질나게 오르고 설악산 등 명산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정연호 선생의 옛날 얘기를 들으며 얘기를 나누던 중 동네 어르신 한 분이 함께했다. 어쩌다 그분의 집으로 따라갔다가 ‘뜻밖의 횡재’를 했다. 아주 오래된 앨범을 보여 주는데 무려 56년 전에 찍은 지리산 천왕봉 등정 사진이 있어 깜짝 놀랐다.

1940년생의 곽정화씨. 명문 진주농고를 졸업한 뒤 대를 이어 집안을 지키느라 고향에 정착한 뒤 농협조합장 등을 지내는 등 지역사회에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78세의 바로 이 어르신이 1961년 4월 9일부터 3박4일 동안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주인공이다. 그 당시에는 천왕봉을 그냥 상봉上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상봉에 아무런 글자도 없이 나무 깃대 하나만 서 있을 때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천왕봉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친구인 정원춘씨(작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는데, 당시의 카메라는 ‘로꾸 로꾸’라는 일명 ‘목침 카메라’로 가로 세로 6×6cm로 찍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59년에 일본에서 생산된 ‘젠자 브로니카Zenza Bronica’가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핫셀블라드’를 모방해 120롤 필름을 사용하는 6×6판 1안 리플렉스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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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면 법대리 곽정화 어르신. 1961년 3박4일 동안의 지리산 천왕봉 등정 사진을 잘 간직하고 있다. / 하동군 옥종면 법대리에서 만난 <월간山> 정기구독자 1945년생 산꾼 정연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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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꽃무리와 소나무 숲에 아침 안개가 몰려왔다.

숯굴서 숯굽다 도끼·톱 찾으러 천왕봉 등정 

동네 친구와 선배들 7명이 2박3일의 일정으로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을 오른 뒤 중봉으로 내려와 대원사까지 하산할 계획이었다. 등산안내도가 없던 시절이니 길안내는 써리봉과 조개골의 ‘숯굴’에서 숯을 굽던 한 살 위의 형인 신상균씨, 성금태씨가 맡았다. 당시 깊은 산속에서 숯을 굽는 일은 불법이었는데 어쩌다 단속반이 나오면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둘 다 지리산을 훤히 꿰고 있었다. 사실 이 최초의 무모한 산행 계획도 숯굴에서 도망치느라 두고 온 도끼와 톱 등을 찾으러 가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신상균씨는 키가 180cm가 넘는 거구의 장사였다. 공업용 에틸알코올을 물에 타서 마시고, 50kg 쌀가마 두 개를 번쩍 들 정도로 힘이 좋았다.

사진을 보며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들의 산행 루트는 옥종면에서 출발해 중산리(김밥 점심)-법계사(1박)-천왕봉(점심)-유평리 가랑잎여관(2박)-대원사(폭우로 3박) 코스였다. 앨범의 6×6cm의 흑백사진 아래에는 만년필로 쓴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산행 첫날 김밥을 먹는 사진 아래에는 ‘집에서 준비해 간 김밥을 괄세 못 해. 4294년 4월 9일 1시’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단기 4294년은 1961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상봉, 그러니까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한 시간은 1961년 4월 10일 점심 무렵이었다.

사진 속의 법계사 풍경은 억새로 지붕을 인 새집이었는데, 거기에 머물던 두 보살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아마도 두 보살은 당시 사오십 대의 한청화 보살과 손 보살(?)인 것 같다. 법계사에서 하룻밤 자고 천왕봉에서 점심을 해먹었다. 천왕봉 바로 아래 산소옥山小屋이 있었고, 정상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는 나무 깃대만 서 있었다. 이 깃대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은 뒤 중봉 정상에서는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큰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써리봉 지나 조개골 계곡에서 세수하다 코피를 쏟기도 했다. 숯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유평리 ‘가랑잎 여관’에서 2박을 했다. 다음날 대원사로 하산했는데 당시의 주지가 그 유명한 일엽 스님이었다. 봄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는 바람에 계곡을 건너지 못해 대원사로 돌아와 3박을 해야 했다. 일정이 지체되다 보니 먹거리도 다 떨어졌다. 당시 대원사는 증축공사 중이었는데 그 공사를 하던 목수들의 방에서 잤다. 때마침 대원사로 막 출가한 옥종마을의 숫처녀를 만나 김치 등을 얻어먹었다.

그런데 곽정화 선생의 앨범을 들여다보다 이상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풍경과 인물들이 두 번 찍혀 있었다. 사진 설명을 보면 ‘上峰 깃대를 타면서 찍은 것과 2자 以上 쌓인 눈밭에서 찍은 것이 Double 된 것’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은 정원춘 씨가 ‘천왕봉 기념사진을 찍은 뒤 다시 필름을 앞쪽으로 돌려 눈밭에서 찍은 것이 한 장으로 합성된 것’이다.

의도적으로 찍었는지, 실수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다중노출 사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지리산 천왕봉과 눈밭이 함께 나온 사진이라니! 불과 6년 전부터 공부한 나의 다중노출기법의 사진이 이미 56년 전에 시도된 것이다. 곽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1961년 4월 10일의 지리산 천왕봉 등정 사진’은 참으로 소중한 자료다. 거기에 다중촬영 사진은 우리나라 사진계에서도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그 이전에 지리산을 종주한 이들은 확인된 것만 세 팀 정도인 것 같다. 전남 구례의 고 우종수 선생 등이 만든 최초의 등산조직 연하반煙霞伴이 1955년 노고단에 오른 뒤 다음해에 지리산 종주를 실패하고, 1957년 8월 10〜15일 화엄사-노고단-천왕봉 최초의 종주등반에 성공한다. 같은 해 8월에 한국산악회 경남지부 회원 20여 명이 엄청난 후원을 받으며 중산리-천왕봉-노고단 종주를 했다. 이때 청마 유치환의 ‘편지’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영도 선생도 함께해 산행 에세이를 남겼다. 그 다음이 고 서립규 선생 등의 서울대공대산악회원 11명이 1958년 7월 25일~8월 4일 지리산 종주에 성공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경찰 등의 호위 없이는 입산이 불가능하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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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악양면에 허수아비축제가 열렸다. 동정호에 띄운 유등에 안개가 몰려왔다.

다중노출인지 실수인지 천왕봉과 눈밭 함께 있어

그런데 연하반의 공개된 사진들 중에 1955년의 노고단-반야봉 등의 것이 있지만, 전해오는 천왕봉 사진은 아쉽게도 1965년 사진이다. 이영도 시인 등이 찍힌 1957년 사진과 서립규 선생 등 서울대 공대산악회의 1958년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사진들 속에는 천왕봉 나무 깃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등산조직이 아닌 하동군 옥종면의 곽정화 선생 팀의 사진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나무 깃대는 1958년 여름 이후에서 1961년 여름 이전 사이에 누군가 세운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리산을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1,000년 전의 고운 최치원 선생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리산, 아직도 곳곳에 백골들이 나뒹굴던 지리산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맨 처음 지리산 종주 안내도를 만들고 푯말을 만든 연하반 등의 어르신들은 이제 하나 둘 모두 떠나갔다. 전라도의 고 함태식, 우종수 선생 등과 경상도의 우천 허만수, 변규화 선생 등이 이제 전설로 남고 말았다.

그런데 전문 산악인은 아니지만 뜻밖에도 옥종면에 살고 있는 곽정화 어르신을 만난 것은 엄청난 위안이었다. 특히 오랫동안 잘 보관해 온 사진들은 지리산 역사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만나 3박4일 동안의 사진을 순서대로 정밀하게 찍으며 당시의 세세한 얘기들을 기록하고 싶다. 
출처 | 월간산 577호
등록일 : 2017-12-31 오전 9:06:00   |  수정일 : 2017-12-2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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