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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인의 정신적 지주, ‘마나스 성지’

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를 가다 ②

키르기스스탄은 톈산산맥과 그 지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악국가다. 국토의 80% 이상이 해발 1500m 이상이고 3000m 이상도 40%나 된다. 산악국가는 평야가 없다. 하지만 계곡이 많은 까닭에 물이 풍부하다. 수자원은 중앙아시아에서는 국보나 다름없다. 물이 없는 사막과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는 톈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생긴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라는 두 개의 강이 흐른다. 이 두 개의 강이 중앙아시아 5개국을 살리는 생명수다. 이 중 시르다리야강의 발원지가 키르기스스탄이다.

글·사진 | 허우범 실크로드 전문 여행칼럼니스트

‘중앙아시아의 스위스’인 키르기스스탄 풍경.
만년설 덮인 산들이 차창을 가득 메운다. 산들이 푸른 하늘과 경계를 이루며 즐비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별칭에 딱 어울린다. 숙박 장소인 탈라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몇 굽이 산길을 돌아 오른다. 산 정상에 도달할 즈음, 한 줄기 거대한 물줄기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엄청난 포말을 일으킨다.

“우와! 장관이다. 댐이 엄청난 폭포수 같네.”

수력발전소는 좁은 계곡을 막아서 만들었는데 물살이 얼마나 세차게 떨어지는지 튀어 오른 포말이 다시 하얗게 댐을 감싸 돈다. 강한 햇살은 계곡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띄운다. 저수지 건너편에 거대한 얼굴 석상이 보인다. 한 눈에도 레닌 모습이다.

“저기 있는 석상은 레닌인가?”

“네, 맞아요. 이 댐은 구소련 시절인 1975년에 만든 것이어서 그때 같이 만든 것입니다.”

“1991년에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레닌 동상은 다 철거하지 않았나?”

“다른 곳은 그래도 저 석상만은 그대로 있어요.”

“그럼, 저수지 이름이 레닌저수지겠네.”

“아니요. 키로프저수지라고 불러요.”

“석상은 레닌인데, 저수지 이름은 키로프라고? 참, 희한하네.”


원유보다 막강한 물의 힘

거대한 포말을 일으키는 키로프 수력댐.
키르기스스탄은 물은 풍부하지만 농업이나 목축은 어렵다. 대신 그들은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하기 위하여 전국에 많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수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한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의 댐 건설은 매우 예민한 문제다. 수자원의 독점은 곧바로 국가 간에 마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비해 가난하다. 국가 간 교역도 불리하다. 때로는 국경을 봉쇄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때마다 수자원 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로 국경을 개방시킨다. 수자원의 힘이 원유보다 더 막강한 것이다.

구소련 시절에는 중앙의 통제와 배분으로 적절하게 공유가 가능하였다. 독립국가가 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수자원을 공유하는 방안을 수립하였지만 이는 유명무실하다.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언제나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나 가스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생명수인 물이 부족하면 국가 존립 자체가 흔들린다. 물이 얼마나 보배로운 자원인가를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한 번 실감한다.

탈라스는 인구 2만 명의 작은 도시다. 마치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에 온 듯하다. 안내인이 정해 놓은 호텔에 도착했다. 3층 건물인 외관은 비교적 깨끗해 보였으나 내부 시설은 철거를 앞둔 시설물 같다.

“탈라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밤 묵으실 행운의 열쇠입니다.”

안내인이 열쇠를 넘겨주며 너스레를 떤다. 방 열쇠가 우리의 조선시대 쌀뒤주를 여닫을 때 쓰던 것처럼 큼지막하다. 하지만 호텔은 열쇠가 필요 없는 지경이다. 나무로 만든 방문은 틀어지고 부서져서 제대로 닫히지를 않는다. 열쇠구멍은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휑하다. 몇 개 안 되는 다른 방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에어컨은 고장 나고 벽에는 벌레들이 설치고 다닌다.

“이곳이 그나마 제일 좋은 호텔입니다. 다른 곳은 이보다 더 안 좋아요.”

여행자가 오지 않는 마을인 까닭도 있겠지만 시설이 워낙 낙후되었다. 숙박인은 우리 일행뿐이다. 하룻밤 자고 갈 곳이라는 위안으로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불어대는 바람은 호텔 여기저기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대고 그때마다 기이한 소리들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든다. 그 소리가 바람과 어울려 마치 귀신이 우는 듯하다. 이른 아침, 식사를 하며 보니 너나없이 눈이 충혈되었다. 모두가 ‘귀곡산장(鬼哭山莊)’에서 잠을 설친 것이다.

폭염은 벌써부터 호텔 밖에 진을 치고 있다. 오늘도 더위와의 일전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호텔 밖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무줄놀이에 한창이다. 갑자기 이곳 아이들의 고무줄놀이가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고무줄을 다리에 걸고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는 것이 우리와 똑같다. 남자아이 두세 명이 길 건너편에서 이곳을 쳐다보며 무언가 속닥인다. 혹시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것까지도 똑같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냉수를 마시는 것은 뙤약볕에서는 별반 도움이 안 된다. 냉수는 마실 때만 시원할 뿐 금방 갈증만 더한다. 뜨거운 녹차 한 잔이 더위와 갈증을 푸는 데 제격이다. 이열치열인 것이다. 녹차를 마시고 호텔을 나선다. 순간, 몸이 한결 시원해진다.

“자, 마나스 성지로 출발합시다.”


중앙아시아인들을 지배하는 40이라는 숫자

키르기스인의 영웅인 마나스와 전사들을 기리는 마나스 성지.
마나스 오르도(Manas Ordo). 일명 마나스 성지는 평야를 사이에 두고 야트막한 산자락이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다.

성지는 원형의 광장과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침부터 마나스와 전사들을 참배하러 온 가족이 보인다. 할아버지부터 어린 손자까지 왔는데, 손자도 성지에 온 것을 아는 듯 엄숙한 표정이다. 저 아이도 할아버지에게서 위대한 조상의 영웅담과 노래들을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무적의 영웅들, 날랜 습격의 매들 /
조국의 땅에서 적을 몰아낸 /
우구즈인의 후예들이 행군한다.


마나스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예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영웅서사시다. 이 서사시는 마나스와 그의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친 영웅담을 담고 있는데, 마나스와 그를 따르는 전사 40명이 함께 엮어내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이는 키르기스 민족의 역사이기도 한데 길이가 무려 50만 행이 넘는다고 한다. 서양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것보다도 이십 배나 많은 분량이다. 키르기스인들은 마나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니 절대적이다. 그것은 키르기스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조국의 아버지이자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키르기스스탄 국기에는 태양이 있는데 그 빛이 모두 40개예요.”

“마나스의 40명 전사를 의미하는 것인가?”

“키르기스의 어원이 ‘40개의 오구즈인 부족’이라는 뜻이거든요.”

“아, 그럼 마나스에 나오는 40명의 전사는 결국 40개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네.”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마나스를 중심으로 모든 부족이 일치단결하여 국가를 건설했으니까요.”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40’이란 숫자를 좋아한다. 이는 행운과 희망, 민족적인 전설과 민담 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루나무 40그루를 심어 집을 짓게 하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40그루를 심어 비단을 짜게 한다는 풍속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40일이 되는 날 이슬람의 중요한 의식인 할례를 한다. 산모도 40일간 산후조리를 한다. 장례식도 고인의 영혼이 지상에 머물다 떠나는 기간인 40일간 치른다. 이처럼 40이라는 숫자는 중앙아시아인의 삶을 지배한다.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 않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도 이런 의미에서 사용했을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토대와 민족적 공감대가 국기에 반영되어 40개의 햇빛으로 빛나는 것이다.

성지의 원형광장은 마나스 동상을 중심으로 40인의 전사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 꾸몄다. 광장 중심에 서서 보니, 전사들이 뿜어내는 기상이 중앙의 마나스에게로 모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낭랑한 음성이 들린다. 악기 소리는 나지 않지만 스피커를 타고 울리는 음성은 노래하듯 가락이 있다. 입구에서 본 가족이 음성 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서서 참배를 한다.

“혹시 저 음성이 서사시 마나스인가?”

“네, 맞아요. 이곳에서는 24시간 마나스를 들려줍니다.”

“녹음테이프 분량이 상당하겠네.”

“녹음한 것을 들려주는 게 아니고, 마나스치가 직접 들려주는 거예요.”

“하루 종일 들려준다고?”

“네, 서너 명의 마나스치가 교대해 가면서 합니다.”

“정말 대단하네.”

마나스는 반주 없이 개인이 음송(吟誦)한다. 음송자는 ‘마나스치’라고 부른다. 마나스치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 탄생한다.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와 가락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마나스치는 즉흥적인 연기도 뛰어나다. 마치 우리의 판소리 명창과 같다. 뜻은 모르지만 가락은 장쾌한 것이 마나스와 그 전사들이 적들을 무찌르는 장면이 연상된다. 마나스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광장 왼쪽에 있는 박물관을 들렀다.


전장의 여인

마나스 박물관.
박물관에는 서사시 마나스와 마나스치에 관련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다.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동서 문명의 최초 격전지였던 탈라스전투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탈라스전투 장소에는 많은 쿠르간(무덤)이 있는데 예산이 없어서 발굴을 못 하고 있어요.”

안내인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 있는 것이어선지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설명한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며 유물들을 살펴본다.

유물은 대부분 쿠르간에서 발굴된 것들인데 그중에 특별한 것이 눈에 띈다. 여자 목걸이가 있는 목관이 그것이다. 목걸이는 아주 고급스럽다. 병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장수의 부인이거나 연인이었으리라. 여인이 전쟁터인 탈라스까지 함께 동행할 정도라면 둘의 사랑은 얼마나 각별하였을까.

“하루도 못 보면 안 되는 사랑이기에 전쟁터까지 함께 왔겠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예요.”

“진정 사랑하는 사이라면 혼자 사는 게 더 싫을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진실한 사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 죽음까지도 마다 않는 여인의 사랑은 얼마나 고귀하며, 이러한 사랑을 받는 주인공은 어떤 사나이였을까. 남녀 간의 사랑이 역사에 한시도 빠진 적이 없지만 죽음조차도 함께한 그들의 사랑 앞에 그 어떤 인스턴트 사랑이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나스 성지 전경.
박물관을 나오는데 독특한 모자와 복장을 한 할아버지 두 분이 보인다.

“멋진 모자를 쓰신 분이 마나스치입니다.”

“아, 아까 스피커에서 나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

“네, 맞습니다. 다른 분과 교대하고 잠시 쉬러 나오셨답니다.”

마나스의 영묘(靈廟)는 박물관 뒤에 있다. 시신은 없지만 민족의 영웅인 마나스를 숭모하는 장소다. 우리의 사당과 같은 곳이다. 영묘를 돌아 성지의 언덕에 올랐다. 푸른 초원이 성지 주위를 에워싸고 마나스치의 낭송이 성지 너머 초원으로 울려 퍼진다. 유목민족인 키르기스인은 초원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이토록 멋진 초원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송두리째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키르기스인은 마나스와 40인의 전사들이 지켜낸 이 터전과 그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후세에 전해주는 것에 대단한 자긍심을 느낀다.

2009년, 마나스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키르기스스탄이 아니라 중국의 것이 되었다. 중국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키르기스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이유로 자국의 명의로 등재 신청을 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은 1995년에 이미 서사시 마나스 10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토록 오래전부터 노력해 온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온 국민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들인 사업이 국력의 차이에서 밀린 것이다. 문화가 국력인 시대에 문화마저 빼앗긴 키르기스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들의 허탈한 심정을 헤아리며 언덕을 내려온다. 마나스의 운율도 애잔하게 들려온다.
등록일 : 2017-09-01 09:08   |  수정일 : 2017-09-0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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