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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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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물소리와 뜨거운 바람 소리만 그날의 아우성을 삼키고

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를 가다1 동서문명의 격전지 탈라스평원

글 | 허우범 실크로드 전문 여행칼럼니스트

“배낭에 폭탄이 있다고 확인해 보잡니다.”
“무슨 소리야, 폭탄이라니? 공항의 레이저 검색대도 통과했는데.”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갈 수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검문소 앞은 이른 아침부터 차량이 길게 줄을 지어섰다. 국경검문소는 아침이 붐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일로 물건을 사고팔거나 업무를 보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급한 사람들과는 달리 국경검문소의 군인들과 세관원들은 전혀 바쁜 것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통관 업무를 핑계로 꼬투리 잡는 것에만 공을 들인다. 이러한 풍정은 지난밤 늦게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겪었다.

타슈켄트 공항의 좁다란 입국 수속실은 창구가 두 개뿐인데 사람들은 줄을 서지 않고 너나없이 새치기만 했다. 각자의 짐도 많아서 카트마다 산더미였다. 그런데 수속 담당자의 업무처리는 함흥차사였다. 좁고 무더운 수속실은 혼잡한 사람들의 열기까지 더해져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두 시간이 다 되어서 내 차례가 되었다. 담당자가 여권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없이 사라졌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돌아온 담당자가 다른 동료와 이야기를 하더니 같이 자리를 비웠다. 다시 10여 분이 지나고 돌아온 담당자는 러시아어인지 우즈베크어인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영어는 통하질 않았다. 다시 또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30분이 훌쩍 지나고 나의 인내심도 고갈되어 갔다. 옷은 땀으로 흥건하고 입가엔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나온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몇몇 서양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수속 절차를 마치고 공항을 나오니 착륙한 지 어느덧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핵심이라는 우즈베키스탄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어제 공항서 느끼셨겠지만 돈 달라는 얘기예요.”

그렇다. 어제 입국 수속 때, 내 뒤에 있던 한 무리의 한국인들은 골프채와 함께 뒷문을 통해서 먼저 공항을 빠져나갔다. 알고 보니 급행료로 백 달러를 준 것이다. 그들은 아쉬울 것이 없는지라 일정이 급한 외국인 관광객과 시간싸움을 벌여 돈을 뜯어내는 것이다. 갑자기 어제의 짜증이 함께 밀려온다.

“다 열어보라고 해. 없는 것이 확인되면 할 말이 없겠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팩소주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폭탄이 아닌 것은 확인되었으니 이제 국경을 넘어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세관원이 배낭을 넘겨주지 않는다. “코리안 위스키 베리굿!”만 떠들어댄다. 팩소주 두 개를 주었더니 엄지를 치켜세우며 배낭을 돌려준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았으니 만족인 것이다. 50m쯤 나아가니 군인들이 다시 검문을 한다. 총까지 들고 있으니 자못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안내인이 잠시 이야기를 하고 들어오더니 검문이 끝난다. 안내인에게 그들과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잘 알기는요. 보드카 한 병 마시라고 했지요.”

거리가 100m 정도인 국경을 통과하는 데 한 시간을 넘게 허비했으니 더 이상 버티다가는 일정만 어긋나기 때문이다. 지체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낸다. 울퉁불퉁한 길은 편안한 감상을 허락지 않는다. 마치 말고삐를 꽉 잡고 초원을 달리는 듯하다. 길가의 염소는 자동차가 무섭지도 않은지 뿔을 들이밀며 달려든다. 겁 없는 염소는 자동차를 처음 본 것인가. 탈라스전투지를 보러 가는 길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염소까지 길을 막을 줄이야.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주민들.
얼마 지나지 않아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는 검문소가 보인다. 좀 전의 과정을 다시 또 밟으려니 걱정부터 앞선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안내인에게 이번에는 편하게 통과하자고 했다. 안내인이 웃으며 대답한다.

“벌써 반은 배우셨네요. 이상하시겠지만 여기서는 가장 편안하고 빠른 방법이지요.”

국경을 통과하자 탈라스전투 장소를 안내할 에밀 나르보다예프(37)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마나스박물관 연구원이다. 나를 안내해주기 위해 특별히 나와 주었다. 탈라스는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에 위치한다. 마음은 곧장 달려가고 싶지만 점심 때가 훌쩍 지났다. 안내인은 근처에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며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둘러보자고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든든히 먹어야만 넓은 전쟁터를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다.

“개장국 드실 줄 아세요?”

“개장국? 여기서도 보신탕을 파나?”

“네. 주인이 아버지에게서 배웠답니다.”

이역만리 고려인 식당에서 만나는 보신탕. 갑자기 힘이 솟는 듯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나온 개장국은 멀건 국물에 고기 몇 점이 전부다. 양념은 소금과 후춧가루가 전부다. 맛은 어떨까. 요리법이 너무 간단한 까닭인가, 그야말로 한 번 먹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맛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60여 년이 지나 고려인 4세가 만드는 음식이니 맛이 같을 수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맛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지대인 아만바에브. 이곳이 1300여 년 전, 당나라의 고선지군과 아바스왕조의 이븐 살리히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국 당나라의 안서절도사가 되어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지배했던 장군이다. 이곳은 그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며 치렀던 마지막 전투 장소다. 우리에게 탈라스전투로 잘 알려진 곳이다.


고선지 장군의 마지막 전투장

쿠르간에서 발굴된 장수의 투구와 병사들의 무기.
당 제국은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을 차지하며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였다. 그리고 이를 더욱 확장하고자 서역인 중앙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8세기 이슬람 권력을 장악한 아바스왕조도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동진을 하였다. 그리하여 두 왕조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51년 7월, 톈산(天山)산맥을 넘어온 고선지 장군의 7만 연합군은 탈라스평원을 바라보며 전선을 구축했다. 노도처럼 푸른 초원을 내달릴 기세였다. 이븐 살리히가 이끄는 30만의 이슬람군도 탈라스강을 배수진으로 계속 동진할 태세였다.

두 군대는 5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선지의 운이 다했음인가. 연합군에 가담한 카를루크족이 이슬람과 내통하여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고선지군은 치명타를 입고 궤멸하고 만다. 2만 명이 포로가 되고, 후퇴한 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그해 7월 탈라스평원은 피비린내가 가득하였으리라.

그동안 탈라스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안내인은 일본 NHK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차 탈라스를 찾았을 때에도 위치를 알 수 없어 탈라스강만 안내했다고 한다.

안내인이 탈라스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최근에 와서야 당시의 전투지를 발견하였는데, 우리가 그 현장을 방문하는 첫 번째 손님이라고 한다.

순간 가슴이 설렌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처녀지를 찾아간다는 뿌듯함이 비장함과 함께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탈라스 강변 다리 밑에 홀로 핀 붉은 꽃은 당시 산하를 물들인 병사들의 피를 보는 듯하고, 강물 속을 세차게 구르는 자갈 소리는 죽음을 뚫고 돌진하던 병사들의 아우성으로 들려온다.

탈라스평원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바람만이 간간이 풀꽃을 흔들 뿐 아무도 없다. 톈산산맥이 내어 놓은 길목으로 흙길이 곤두박질치며 내달리고 그 오른쪽 모서리로 물길이 자리를 잡았다. 산맥은 내달린 자식들이 안쓰러워 양팔을 보듬듯이 나란히 달린다.

이토록 산천이 애지중지하니 나그네의 눈에도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즉, 탈라스의 장악은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손안에 넣을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탈라스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무덤인 쿠르간.
안내인을 따라서 탈라스 대평원의 한 곳에 이르니 10~13m 정도 되어 보이는 타원형 모양의 언덕들이 보인다. 이곳은 탈라스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의 무덤인 쿠르간이다. 쿠르간에는 양국의 병사들을 함께 묻었다. 현재까지 20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조사가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쿠르간 1기에 100여 구 정도가 묻혔는데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일부만 묻은 것이 이 정도라니 당시 쌍방의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쿠르간 주위는 돌을 둘러 쌓았는데, 대평원에서 흔치 않은 돌을 구한 것도 의문이지만, 고구려 적석총 모양의 쿠르간을 만들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곳에서 발굴된 화살촉과 투구, 검과 갑주 등은 마나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고선지는 탈라스전투에서 패했지만 오히려 더욱 알려졌다. 전투에서 패배한 전쟁포로들이 서양에 제지술을 전파하여 유럽 르네상스의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설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탈라스에서 사마르칸트까지의 거리는 수백km이다. 실제로 가는 길은 더 멀었을 것이다. 특히 2만 명의 포로가 가려면 기간도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5개월 후인 12월에 사마르칸트에서 종이를 만들었다니, 너무 빠르지 않은가.


유럽으로 건너간 종이, 화약, 나침반

일반적으로 점령지에는 군인과 관련자들이 주둔하며 치안 유지에 힘쓰고 정보 수집 결과 등을 문서로 만들어 본국에 보고하기 마련이다. 고선지 장군은 이미 740년 달계부(페르가나), 750년에 갈사국(사마르칸트)과 석국(타슈켄트) 등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었던 국가들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서역 경영에 필요한 정보 수집과 승전보를 알리는 장계 등 여러 가지 업무적인 필요에 의해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탈라스전투 이전부터 이들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종이를 제작하였을 것이다. 탈라스전투의 패배로 당의 서역경영이 실패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 또한 포로 아닌 포로가 되었다. 고선지의 지배 아래 비밀리에 제작되었던 종이 제작기술이 탈라스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이들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종이가 ‘사마르칸트지’다.전리품은 또 있다. 화약과 나침반이 그것이다.

전쟁의 패배는 영토의 축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고급 인력과 자원, 각종 보물 등 수많은 것을 잃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은 서역경영의 실패로 영토의 지배력과 경제적 이익마저 잃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귀중한 일급비밀도 송두리째 빼앗겨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유럽은 사마르칸트지의 보급으로 그때까지 써오던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대체하였다. 사마르칸트는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카이로를 거쳐 지중해 연안의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 마침내 전 유럽으로 이어지는 종이의 서구 전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국은 서역경영권을 탈환할 의지가 없었을까. 의지는 강렬했지만 그보다 더 화급한 일이 생겼다. ‘안사의 난’이 터진 것이다. 실크로드의 번영을 구가하던 당 제국은 고선지의 서역경영 실패와 안사의 난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역사는 언제나 교훈을 준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며, 몰락의 시작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평원은 오후임에도 햇살이 누그러지지 않는다. 쿠르간 주위로 피어난 노란 꽃들이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한들거린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초록 융단은 쓸쓸함과 애잔함만 묻어난다. 동서양의 격전지인 탈라스평원을 떠나자니 마음이 아리다. 각자의 가족과 조국을 위해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며 마나스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글쓴이 허우범 님은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직장도 인천이었고 지금도 인천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여행과 책을 좋아하여 틈만 나면 책 한 권 들고 훌쩍 떠난다. 평생 실크로드를 화두로 삼고 있다. 올해 초, 여행과 글 쓰는 일을 하고파 30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났다. 요즘은 10년 만에 삼국지 여행기를 다시 정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3권의 책을 냈다.
등록일 : 2017-08-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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