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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다

글 | 하주희 주간조선 기자 2017-07-07 14:54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始發)역인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풍경. 전시용 옛 열차(왼쪽 아래) 앞에 열차 탑승객이 대기 중이다.
듣던 대로였다. 질긴 빵 사이에 말린 대구와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 기내식 매니아들 사이에서 오로라항공의 기내식은 유명하다. “오로라에서 생선이 아닌 햄치즈 샌드위치가 나오다니, 운이 좋은 날이다”는 유의 고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오로라항공은 사할린에 본사를 둔 러시아 지방항공사다. 러시아 국적기 아에로플로트가 지분의 51%를 보유하고 있다.
   
   비행시간은 약 1시간40분. 북한 영공을 통과한다면 30분가량 단축될 터다. 그래도 한국 항공사보다 비행시간이 짧은 편이다. 동해상에 걸쳐 있는 북한 비행정보구역(평양 FIR)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모든 노선은 평양 FIR을 통과하지 않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이어진 5·24조치 때문이다. 같은 구간 기준 한국 노선이 러시아 항공사보다 1시간 이상 더 걸리는 이유다. 북한 영공과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하는 노선을 운용하는 비행사는 세계 모든 항공사를 통틀어도 10여개에 불과하다. 러시아 항공사와 UPS, 페덱스, 폴라항공 같은 화물운송사가 대부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 도착했다. 반팔티 아래 팔뚝에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얇은 긴팔 옷을 꺼내 입었다. 6월 21일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겨울에는 역시 추워진단다. 항구 연안이 얼지만 쇄빙선으로 깰 수 있는 정도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불리는 이유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다.(1709만8242㎢) 8개의 관구로 이루어져 있다. 모스크바가 있는 중앙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속한 북서 연방관구, 볼가 연방관구, 시베리아 연방관구, 남부 연방관구, 우랄 연방관구, 북캅카스 연방관구, 극동 연방관구다. 이 중 극동 연방관구의 면적이 가장 넓다. 616만9329㎢, 남한 면적의 60배다. 60배라 하지만, 상상이 잘 안 되는 숫자다. 극동 연방관구는 다시 9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이 중 하나가 바로 프리모리예 지방, 한국에선 연해주로 불리는 지역이다. 이 연해주의 주도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다. 블라디는 ‘정복’을, 보스토크는 ‘동방’을 의미한다.
   
   이번 여정은 극동 대륙에 남아 있는 한민족의 발자취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한반도미래재단과 함께했다. ‘북방열차’라는 이름으로 3박4일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를 방문했다. 일정엔 탈북 청년 3명이 함께 했다. 모두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출신이다. 구천서 회장이 이끄는 한반도미래재단이 2011년부터 진행해온 프로그램이다. 북한 출신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함께 통일에 대비해 공부한다. 올해까지 13기 600여명이 거쳤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꽤 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대한항공, 현대호텔, 우리은행, 대우인터내셔널 등이다. 아그로상생(대순진리회), 유니젠(남양알로에), 아로프리모리예(인탑스), 호롤아그로(현대자원개발) 등의 영농기업 8개도 진출해 있다. 6월 기준 총 22개사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의 곽기동 영사에게 물어보니 연해주 전체를 통틀어 고려인을 포함 약 3만명의 한국 동포가 살고 있단다.
   
   러시아에는 총 네 곳의 한국 공관이 있다. 모스크바에 대사관이,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이르쿠츠크에 총영사관이 있다. 이석배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와 둘째 날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이 총영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과의 경제 협력 기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이석배 총영사는 한국 외교관 중 러시아어가 가장 유창한 사람이다.
   
   
▲ 하바롭스크 시내의 레닌광장.

   우수리스크에서 만난 것들
   
▲ 옛 발해성터가 발굴된 곳. 명마의 고향 솔빈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블라디보스토크공항을 나와 곧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북쪽으로 112㎞, 버스로 약 1시간30분 거리다. 우수리스크는 ‘늪지대’란 뜻이다. 한민족과 여러 모로 인연이 깊은 땅이다. 우수리스크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점점 고풍스러워졌다. 거리의 여성들은 최선을 다해 차려입은 듯했지만 어딘가 어색했고, 신·구 시가지 상점들 간에 시간의 격차가 상당해 보였다. 1980년에 개봉한 러시아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버스는 초원으로 접어들었다. 발해 유적지가 발견된 벌판. 유적지라 해도 표지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없다면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됐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다. 228년간 존속하고 926년에 멸망했다. 멸망의 이유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백두산 폭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설명은 다르다. 송 교수는 제도권 학자로는 거의 유일하게 발해사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지난 5월에도 연해주 답사를 다녀왔다. 기자는 연해주 방문 후, 발해가 멸망한 이유를 그에게 물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기록이 있다. 내분 때문에 거란이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발해에는 15부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중 솔빈부가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솔빈부는 명마의 고향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1000여년 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초원 바로 옆에 강이 흐른다. 라즈돌나야강으로 불리는 이 강은 이전엔 수이푼강으로 불렸다. 솔빈의 발음이 변해 수이푼이 되었다. 금나라 때에는 이곳을 휼품로라 불렀다. 역시 솔빈의 변형 발음이다. 초원 근처엔 말을 기르는 작은 목장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맨눈으로는 자취를 찾기 힘들지만 이 부근에서 발해성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해자(垓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해자에는 집 몇 채가 들어서 있단다. 직접 보진 못했다.
   
   1000년 전 제국의 땅, 낮은 구릉이 간간이 자리한 초원지대에 발을 디뎠다.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지평선이 보였다.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지평선이 낯설어서는 아니었다. 중국 신장성의 사막이나 호주 중부의 평원에서는 느끼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발해의 터라는 설명을 듣고 보니, 별안간 애국심이 들끓어서도 아니었다. 풍경이나 토양, 바람의 결이 낯설지 않았다. 한반도와 이어져 있는 땅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한국인의 기원’을 쓴 이홍규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유전자를 분석해 보니 70~80%가 북방계, 20~30%는 남방계, 그리고 일부 유럽인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맞다면 한국인의 DNA에는 끝도 없는 이 초원지대의 기억이 담겨 있을 터다.
   
   멀지 않은 곳에 수이푼강이 보였다. 강변에 보재 이상설(李相卨) 선생 유허비가 있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이 이상설 선생의 시신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웠다. 유허비(遺墟碑)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뜻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로 활동한 보재의 유허비가 수이푼강가에 있는 이유는 이렇다.
   
   보재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가지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된 인물이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외교권이 없는 조선의 특사는 회의에 참석조차 못 했다. 뒷배경엔 일본의 로비가 있었다. 7월 9일 이들은 각국 기자단 앞에서 일제의 불법 침탈을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일로 보재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고향 땅 충청도 진천을 가보지 못했다.
   
   보재는 연해주의 항일전선에 합류했다. 의병부대인 13도의군과 성명회를 결성했다. 권업회를 만들고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 선생이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도령(正都領)을 지냈다. 정부 수반에 해당하는 자리다. 간판만 세워놓은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연해주와 간도에 3개 행정구역을 설치해 다스린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러시아는 어제까지 적(敵)이었던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전면 금지됐다. 보재는 결국 1915년 상하이로 옮겨가야 했다. 박은식 선생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만들었다. 상하이 독립운동 시대를 연 셈이다. 1917년 3월 보재는 병환으로 눈을 감으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 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유언대로 보재의 유해는 수이푼강에 뿌려졌다. 수이푼강의 유속은 매우 세 보였다. 흘러흘러 동해로 이어진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들렸다. 해외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이었고, 해외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은 보재의 구상이 시대를 잘 만났다면 연해주의 풍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으리라.
   
   
▲ 최재형 선생의 우수리스크 생가. 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한국 정부가 구입했다.

   고려인 영웅들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 박물관이 있다. 그 안엔 카레이스키. 고려인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작은 전시실이 있다. 건물 안을 둘러보다 잠시 일행과 떨어졌다. 두리번거리자 80대 할머니가 다가왔다. 고려인이었다. 할머니는 반갑게 손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섞인 할머니의 말은 5%가량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혹 들리는 한국어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손짓 발짓을 주고받으며 추정해 본 그녀의 메시지는 ‘박물관 전시실은 원래 무료이니 입구의 러시아인 안내인에게 돈을 내면 안 된다’는 요지였다. 주승현 기전대 군사학과 교수가 다가왔다. “할머니가 함흥 말을 쓰신다.”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출신인 주 교수는 탈북 후 한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딴 경우다.
   
   뒤늦게 전시실 행렬에 합류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부터 1937년 스탈린 통치 시대 강제이주의 역사, 고려인들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최재형 선생(최 표트르 세묘노비치·1858~1920). 최재형 선생은 극동 지역 고려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알려져 있는 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팩션’ 바람이 고구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쓸고 간 판에, 왜 지금까지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제작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 고려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그의 일대기는 이렇다.
   
   1860년 노비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의 어린 시절은 가난 그 자체였다. 그의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로 옮겨갔다. 굶주림은 여전했다. 11세에 가출을 결행했다. 포시예트라는 도시에 도착해 부둣가에서 그만 실신한다. 마침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아이를 발견했다. 자식이 없었던 부부는 선생을 아들처럼 기른다. 양부모의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러시아어와 무역을 배운 선생은 성인이 된 후 무역업과 군납으로 거부가 됐다. 그 재산을 그 후 연해주 독립운동에 바친다.
   
   1896년 5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선생은 한인대표로 참가했다. 황제로부터 예복도 하사받았다. 여기에서 조선의 특사로 참석한 민영환을 만난다. 갓을 안 벗겠다며 러시아 궁정 관리와 옥신각신하고 있던 민영환의 눈에 가슴에 훈장까지 단 최재형 선생이 어떻게 비쳤을까. 선생은 민영환을 통해 박영효를 만난다. 그때 조국 독립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연해주로 투신해오는 독립투사들을 선생은 묵묵히 뒷바라지한다. 1909년 ‘대동공보’라는 신문을 인수한다. 주필은 바로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선생. 당시 최재형 선생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사랑방이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도 선생의 집에 머물렀다. 대중들에게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시 안중근의 직업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7번의 총성을 내뿜은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도 안중근이 바로 최재형 선생에게서 받은 총이었다.
   
   이후 선생은 이상설·홍범도 등 독립투사들과 권업회를 만들었다. 연해주 한인들을 교육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단체였다. 앞서 썼듯, 러·일 동맹이 맺어지며 권업회는 해산된다. 항일 독립운동은 음지(陰地)로 숨었다. 선생은 항일 빨치산 활동에 투신했다. 두 아들도 함께였다.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마을을 둘러쌌다. 고려인들이 모여 산 마을, 신한촌이었다. 그날 밤 한인 30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스러졌다. ‘4월 참변’. 선생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수리스크의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에 잡힌 선생은 그 이튿날 처형됐다.
   
   우수리스크 시내에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생가는 그 규모가 꽤 커 보였다.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최근까지도 러시아인이 살고 있던 것을 2014년 한국 정부가 구입했다. 2014년은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기에 최재형 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는 표지판만 붙어 있는 상태다.
   
   
▲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수이푼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강제이주열차의 시발점에서
   
   우수리스크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라즈돌리예라는 작은 역을 찾았다. 화물열차를 위한 역이다. 80년 전인 1937년 8월 어느 밤 고려인들이 이유도 모르고 끌려온 바로 그곳이다.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짐처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18만여명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뀐 현장이다. 역 앞에서 음료수와 주전부리 따위를 파는 백인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왜 화물열차 역을 둘러보는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가기 전 극동 연방대학에 들렀다. 극동연방대학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이다. 동아시아를 다루는 학과가 여러 개 개설되어 있다. 수준도 높아, 러시아 대학 순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2012년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캠퍼스 면적은 약 396만7000㎡(120만평). 서울대의 12배다. 100여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재학 중이다. 재학생 김모군은 “수업 분위기가 매우 자유롭다”고 말했다. “토론식 수업 시간엔 별 얘기가 다 나온다. 한반도 통일을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이런 말을 하더라. ‘통일이 되면 북한 영토를 러시아와 중국, 남한이 3등분해 나눠 가져야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더라.”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했다. 얼핏 용산역보다 작아 보이는 역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다. 나란히 걷던 김민서씨가 중얼거렸다. “청진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김민서씨도 탈북자 출신이다. 통일지도자아카데미 출신으로 지금은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 중이다. 개발이 덜 된 함흥에서만 살다가 처음 번화한 도시 청진에 나왔을 때가 떠오른단다. 민서씨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추측할 순 있었다. 특유의 ‘동구권스러운’ 풍경, 철도역이나 건물 등 북한의 많은 것들이 러시아를 표본으로 해 만들어진 탓일 터다.
   
   ‘절대 열차 화장실에 갈 생각을 마라.’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선배들로부터 들은 조언이 무색했다. 열차 내부는 상당히 깨끗했다. 최근 들어 여러모로 개선됐다고 한다. 목적지인 하바롭스크까지 11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288㎞를 달린다. 여기에 중간중간 지선들이 뻗어 있다.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있는 셈이다.
   
   4인실 침대칸 한 칸, 이번 여정을 함께한 남북한 출신 학생들이 모여 앉았다. ‘아산 정주영 회장’으로 화제가 흘렀다. 열차를 타기 직전 블라디보스토크의 현대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북한 출신 심원준씨의 고향이 바로 강원도 통천이었다. 심씨는 2003년 탈북해 2010년 한국에 정착했다.
   
   “어릴 때 정 회장 얘기를 자주 들었다. 고향에선 정 회장이 통천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듣고 있던 김민서씨가 말했다.
   
   “1998년에 정 회장이 북에 가져다준 소고기를 배급받은 것 같다.”
   
   옆에서 주승현 교수가 정정해줬다.
   
   “정 회장이 몰고온 소는 군에만 배급됐다. 당시 일반 가정에 배급된 건 독일에서 들여온 다른 소고기다.”
   
▲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 건물 앞에 있는 거북 석상. 우수리스크에서 가져온 발해 유물이다.

   1997년 아산은 당시 불모지와 같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슨 생각으로 최고급 호텔을 지었을까. 소 판 돈 7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난 소년이, 80대 노인이 되어 1001마리의 소떼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행복한 동화를 현실로 만든 이가 아산이다. 현대호텔 건물은 현대 계동 사옥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모양이다. ‘왕회장’은 연해주를 제2의 본부로 삼아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려 했던 게 아닐까. 위대한 기업인이 이국에 심어놓은 정신을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마주할 수 있었던 계기도 기업인이다. 국회의원을 지낸 기업인 구천서 한반도미래재단 회장은 “유라시아를 탐방하는 북방열차 프로그램을 매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자 한복순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선생은 하바롭스크의 유명인사다. 연구나 취재를 위해 극동 지역을 찾은 여러 학자와 언론인들이 한 선생의 도움을 받는다. 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잘 알면서도 한국어가 유창하기 때문이다. 한 선생의 고향은 사할린이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끌려간 경남 출신의 부부에게서 태어난 사할린 고려인 2세다.
   
   한 선생과 함께 돌아본 하바롭스크는 두 얼굴의 도시였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군사 중심지이자, 아무르강 옆으로 고풍스러운 거리가 펼쳐진 문화도시였다. 러시아 연방군은 4개의 군관구로 나눠져 있다. 이 중 동부 군관구의 본부가 하바롭스크에 있다. 도시 곳곳에서 군과 관련한 건물을 볼 수 있다. 철도종합대학도 있다. 러시아에서 철도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철도대학 출신 중 우수 학생은 정보요원으로 키워진다고 한다.
   
   하바롭스크에는 여러 박물관이 있다. 일정상 향토박물관만 둘러봤다. 러시아의 자연과 그 위에 거주하는 28개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모아놨다. 인상 깊은 것은 나나이족의 생활사였다. 나나이족은 알타이어의 한 갈래인 퉁구스말을 하는 퉁구스족에 속한다. 나나이족은 마을에 솟대를 세우고,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등 한민족과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다. 또 다른 소수민족인 투와족(圖瓦族)은 한민족과 얼굴 생김새가 완전히 같다. 세르게이 쇼이구(Sergey Shoigu) 러시아 국방장관이 투와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배우 율 브리너도 몽골계 소수민족인 부랴트족의 후손이다. 할아버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때 부랴트족 여인과의 사이에서 율 브리너의 아버지를 낳았다. 부랴트족은 한민족의 형제 혹은 조상이라 불리는 민족이다. 율 브리너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며 목재채벌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율 브리너까지 갈 것 없이 하바롭스크, 극동 지역 자체가 한민족과 인연이 많다. 예맥족 혹은 퉁구스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의 전통 문장에 곰과 호랑이가 들어 있을 정도다. 하바롭스크는 북한 김정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북한 정권은 김정일이 백두산 정일봉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한다. 실은 1941년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88여단의 야영지에서 출생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정일의 탯줄을 직접 잘랐다는 러시아인 조산원의 증언까지 있다. 탯줄을 너무 길게 잘라 나중에 보니 김정일의 배꼽이 불룩해졌다고도 했다.
   
   향토박물관 입구 앞에 거북 모양의 석상이 놓여 있다. 다가가 살펴보니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다. 우수리스크에서 가져온 발해 유물이다.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와 똑 닮았다. 그런데 비문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이 평평하다.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러시아인들이 덧칠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다.
   
   짧은 기간 러시아 극동 지역을 일별하며, 깨달은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러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에 발을 딛는 순간 혐한 감정에 찌든 스킨헤드의 네오나치주의자가 나타나 뺨을 후려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정치 독재, 경제 양극화 같은 부정적 키워드로만 러시아를 구성해왔는지 모른다. 이번 일정에 동행한 스타니슬라브 바리보다 타스통신 서울지국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인터뷰를 하는데 그 측근이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 아니냐’고 묻더라.”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된 지 이제 30년이 다 되어간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를 알려면 러시아가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 잊지 말아야겠다는 점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유럽 러시아와 아시아 러시아로 나누어 생각한다. 인구와 문화는 유럽 러시아에 몰려 있고, 자원과 땅은 아시아에 많다. 일정을 함께한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가 말했다.
   
   “포스트 차이나로 유라시아를 주목할 때가 왔다. 아직 덜 개발된 유라시아가 한국엔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주간조선 2464호
등록일 : 2017-07-07 14:54   |  수정일 : 2017-07-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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