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메뉴

FUN | 여행
  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기사목록 
  2.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초여름 죽엽산...광릉숲과 온전히 하나 된 느낌으로 충만

글 | 윤제학 동화작가·월간山 기획위원

‘미세 먼지’는 별로 두렵지 않다. 정녕 두려운 것은, 초여름 새벽안개 속에서 깨어나는 아침을 보며 ‘두근거리던 가슴’이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늦잠에서 깨어난 딸아이가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볼 때 냉큼 햇살이 고이는 콧등의 예쁜 주름을 더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카시나무 꽃향기가 철철 넘치는데도 벌컥 들이키지 못하는 ‘소심’이 숲으로 가는 발길을 잡는 것이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초여름 숲은 순정하다. 기갈에 시달리지 않았고 태풍에 혼절한 일도 없다. 씩씩하게 푸르되 이악스럽지는 않다. 그 숲으로 가며 황사와 미세 먼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조금의 두려움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순정에 대한 모독이다. 왜 모독인지는 일찍이 한 시인으로부터 배웠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직이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윤사월’
 
 
549년 동안 도끼 구경한 적 없는 ‘광릉숲’
 
본문이미지
1 올봄부터 자란 잣나무 순. 2 올봄부터 자란 소나무 순.

나는 지금 초여름의 죽엽산으로 간다. 죽엽산(601m)은 한북정맥이 운악산(935m)으로 솟구쳤다가 허리를 낮추어 서남쪽으로 흐르는 곳에 자리한 흙산으로 수림이 울창한 산이다. 높이나 산세가 야산에 가까워 독립 산행지로 찾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한북정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숲바다를 유영하는 즐거움을 안겨 주는 산이다.
 
조선시대까지도 이 산의 이름은 죽엽산(竹葉山)이 아니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주엽산(注葉山)’이라 표기하고 ‘양주 동쪽 35리 지점, 포천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고 간단히 설명한다. <여지도서>는 ‘수원산 큰 줄기가 계곡을 지나 이 산을 이루었고, 남쪽으로 뻗어내려 광릉의 터를 이루고, 곧바로 뻗어나가 서울의 터를 이룬다’고 상당히 입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릉의 터를 이루었다’는 대목이다.

본문이미지
3 죽엽산 남쪽 기슭의 둥굴레꽃. 4 죽엽산 정상 부근의 은방울꽃.

죽엽산은 남쪽으로 봉선사천까지 산줄기를 흘려내리며 구릉 같은 산을 이루었다. 그 산이 바로 ‘운악(235m)’이고, 세조의 능인 ‘광릉’이 바로 이 산에 안겨 있다. 운악산이 광릉을 안았고, 운악산을 죽엽산이 안고 있으니 사실상 광릉과 운악산 그리고 죽엽산은 한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죽엽산의 수림이 울창한 데는 광릉이 큰 몫을 했다.

죽엽산을 향한 행로의 시작을 광릉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광릉에서 운악산을 거쳐 죽엽산을 오르는 산행은 불가능하다. 운악산을 포함한 죽엽산 남서쪽 일대가 ‘국립수목원 광릉입업시험장’으로 지정되어 입산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광릉숲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광릉을 찾는 것이다.

본문이미지
소나무를 둘러싼 물박달나무.

광릉은 세조(조선 제7대 왕, 1417~1468, 재위 1455~1468)와 그의 비인 정희왕후(1418~1483)의 능이다. 1468년 세조의 능이 들어 선 이후 능의 사방 15리(약 3,600ha)의 숲은 조선 말까지 엄격히 통제되었다. 경작과 매장은 물론 풀 한 포기도 건드릴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학술연구보존림으로 지정됨으로써 숲은 계속 보호되었다. 1967년부터는 임업연구원 중부임업시험장으로 불리다가 1997년부터 국립수목원으로 독립해 오늘에 이른다. 광릉의 능림 일대를 총칭하는 ‘광릉숲’은 1468년부터 2017년까지 549년 동안 도끼 구경을 한 적이 없다. 덕분에 광릉숲은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519년 동안 27대에 걸친 조선을 통치한 왕과 비의 무덤은 총 42기다. 이 가운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광릉은 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광릉숲으로 하여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본문이미지
죽엽산 정상 북쪽 능선의 잣나무숲.

세조는, 다 알듯이 ‘계유정난(1453년)’이라 불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 1457년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그해 10월 죽음을 당했다. 세조는 왕권 탈취라는 도덕적 결함을 메우기 위해 민본정치와 부국강병 정책을 표방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은 강화됐고 왕조의 통치 기반은 안정됐다. 이를 근거로 한 역사적 평가는 그리 야박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쿠데타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세조가 죽은 뒤 200년도 훨씬 지난 숙종 대에 이루어진 단종의 복위와 사육신의 복관이 웅변한다. 성공한 쿠데타였다 할지라도 후대인들에게 두고두고 도덕적 부담을 안긴다면, 성공은 면죄부로서 의미가 없다. 명분과 충절 같은 유교 이념은 두고라도, ‘사람이 산다는 일’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본문이미지
죽엽산 정상 북쪽 능선의 잣나무숲.

광릉으로 가는 숲길은 초록의 광휘로 눈부시다. 이 숲으로 하며 세조의 죄과는 얼마라도 탕감될까? 그의 잔혹함이 사육신과 같은 충절을 낳기도 했으니, 이 또한 탕감의 사유가 될까? 역사가의 이름으로는 모르겠으되, 사람의 자격으로는 누구라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릉숲은 빛난다. 그 빛은 무구하다.

광릉숲을 나와 국립수목원을 지나 고모리로 향한다. 고모리는 죽엽산 서쪽 자락에 기댄 마을로 고모저수지 주변에 카페가 들어서면서 요즘은 ‘고모리 카페촌’으로 불린다. 한북정맥이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데 그 등성마루에 걸린 작은 고개인 비득재(비둘기고개)에서 동쪽으로 죽엽산을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 한북정맥을 가리키는 나무 말뚝 표지와 장승이 들머리를 알려 준다. 이후로 정맥 종주자들이 달아 놓은 표지 리본 말고는 어떤 이정표도 없다. 산 남쪽의 광릉숲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의 발길을 반기지 않는 듯하다. 뜻은 알겠는데 마뜩찮아 하는 기색이 노골적이어서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산과 숲과 내가 온전히 하나 된 느낌으로 충만
 
본문이미지
(위) 큰키나무 아래에서도 활짝 웃으며 핀 노린재나무꽃. (아래) 죽엽산 서쪽 기슭의 송림.

두 개의 송전탑을 지날 때까지도 산길의 분위기는 야산의 전형이다. 넓은잎나무마다 노란 송홧가루가 앉아 있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면서 송홧가루도 덩달아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끔찍한 소나무 사랑도 건강 앞에서는 가볍게 증발한다.

본문이미지
광릉과 능침 앞 잔디밭. 사진 왼쪽이 세조의 능이고,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가파른 절개지를 오르자 노송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비로소 이 산이 광릉숲의 어미산임을 느끼게 한다. 솔숲 사이로 정상을 향하는 길은 살짝 가파르다. 유순한 토산이어도 산은 산. 세상에 호락호락한 산은 없다.

진달래꽃잎이 흙과 바람 속으로 사라진 숲 사이사이로 노린재나무 하얀 꽃이 재잘거리듯 피어 있다. 숲 바닥에는 둥굴레가 꽃망울을 매달기 시작했다. 정상 가까이 다가갈수록 숲의 원시적 생명력이 출렁거린다. 그 숲 파도가 부서져 내리는 곳에 향기로운 종소리가 퍼진다. 은방울꽃이다. 초옥란草玉蘭, 초옥령草玉鈴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의 또 다른 이름은 향수화, 오월화.

나는 해마다 이 꽃을 깊은 산속에서 만났다. 숲이 환하게 웃을 무렵이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더위가 폭포처럼 쏟아질 것이다. 은방울꽃은 성년을 맞은 숲이 스스로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꽃말도 향기롭다.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예요’.

은방울꽃과 작별을 하고 나자 곧장 정상이다. 정상을 일러 주는 표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산이 사람과 만나는 법이다. 산과 숲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으로 충만하게 한다.

정상 북쪽 능선길은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호젓한 숲길. 이 산의 백미다. 비밀의 문 같은 숲은 나만을 아주 황홀한 곳으로 이끄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착각이 아니었다. 숲 터널을 빠져나와 하늘이 활짝 밝아진다 싶더니 잘 가꾼 잣나무숲이 펼쳐진다. 세상의 심장인 것만 같다. 이 숲을 지나면 내 몸 속으로도 숲 파도가 넘실거릴 것이다. 이미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출처 | 월간산 572호
등록일 : 2017-06-19 09:02   |  수정일 : 2017-06-19 09:39
  1. 프린트하기 
  2. 기사목록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 리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맨위로

하단메뉴

개인정보 취급방침독자센터취재제보광고문의조선뉴스프레스인스타그램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