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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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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내 안의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글 | 정여울 작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저자

▲ 리스본의 밤거리. photo 이승원
나는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지는 소설에 매혹된다. 설령 그 질문이 전혀 내 취향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파스칼 메르시에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대목이다. 나는 인간관계를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지가 않다. 내 마음은 이런 비극적 인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질문이 던지는 파문은 오래오래 가슴에 쓰라린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그 질문과 동화된다. 두렵지만, 아프지만, 그 질문을 진심으로 내 자신을 향해 던져 보는 것이다. 내가 지속적으로 신뢰를 느꼈던 관계, 친밀감과 이해심을 보이려 애썼던 그 모든 관계가 어쩌면 내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면? 나는 ‘절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이토록 중시하는 친밀감과 이해심도 어쩌면 인생에서 끊이지 않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마음의 진통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런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그것 없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문장은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쓰라린 질문이었다. 급기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가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표지날개의 작가 사진을 보니 놀랍도록 얌전하고 모범적인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이토록 평온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다니.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 작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문장들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 수더분한 인상조차 이 작가의 ‘반전 매력’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 리스본 거리의 전차 photo 이승원

   무조건 열광하게 만드는 도시
   
   희망봉을 돌아가는 인도 항로를 발견해 ‘대항해의 시대’를 연 개척자 바스코 다 가마의 나라, 포르투갈.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무조건적인 열광에 빠졌던 도시.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언젠가는 꼭 한 번 가고 싶은 도시였다. 유레일 열차로 산티아고에서 포르토를 거쳐 리스본에 도착한 날, 나는 서둘러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옷만 급히 갈아입고 나와 전철을 타고 리스본의 중심 코메시오 광장으로 달려갔다.
   
   전철역에서 내리자마자 꿈결처럼 눈부신 바다가 펼쳐졌다. 맥주 한 병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바다의 풍광을 안주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앉아 말 없이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 연인과 꼭 부둥켜안고 그들이 앉은 벤치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드는 이들. 모두가 리스본의 주인공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리스본 사람들의 첫인상은 따뜻하고 친절하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고, 영어가 서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눈짓과 손짓으로 정확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어딜 가든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먼저 알아보곤 한다. 여행자는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볼 일이 많고 그러다 보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어로는 ‘고맙다’라는 단어가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남자는 ‘오브리가다’, 여자는 ‘오브리가도’가 감사인사라고 한다. 일본어의 감사 인사 ‘아리가토’라는 말이 포르투갈어 오브리가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리스본에서 그 어느 장소보다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리스본에는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현지인들이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 리스본 현대미술관 photo 이승원

   예수님이 커다랗게 팔을 벌리고 리스본 전체를 떠안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석상이 있는 곳 ‘크리스토 라이’로 가는 버스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내게 성큼 다가오셨다. 할아버지는 내게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이시며 볼펜으로 손바닥에 숫자를 천천히 쓰셨다. 101이라는 숫자였다. 크리스토 라이로 가는 버스 번호였다. 내가 웃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저쪽으로 가보라고 친절하게 손짓을 하신다. 이렇듯 리스본 사람들은 영어가 통하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온갖 액션과 만국공통어인 화사한 미소를 통해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광장 근처의 식당에서 포르투갈 요리인 문어구이와 해물리조토를 먹자 한국 음식을 향한 그리움도 진정이 되었다. 저민 마늘과 올리브유를 비롯한 각종 양념에 버무린 토실토실한 문어를 오븐에 구워낸 요리는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게다가 포르투갈식 해물리조토의 얼큰한 양념은 김치찌개나 떡볶이 못지않은 매콤함을 지니고 있었다. 싱싱한 홍합에 각종 야채를 곁들여 올리브유와 와인 식초로 맛을 낸 샐러드 또한 상큼한 별미로 여행자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거리 곳곳에는 포르투갈의 대표 간식 나타(달걀 타르트)를 파는 상점들이 보였고 팬플룻으로 팝송 ‘마이웨이’를 구성지게 부르는 연주자와 불꽃쇼에 여념이 없는 건장한 남자들로 북적거렸다.
   
   일곱 개의 거대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리스본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둔덕길을 올라가 골목골목을 헤매며 구경하는 맛이 일품이다. 오래된 상점들과 레스토랑들, 고서점들과 LP판을 파는 음반가게들, 높다란 언덕 꼭대기까지 느릿느릿 그러나 거침없이 달리는 재래식 전차의 정겨운 모습까지. 나는 리스본에 도착한 지 겨우 두 시간 만에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리스본의 골목길을 그저 하염없이 걷는 것이 그저 좋아서 ‘이곳에 살면 그저 한가로운 오후의 산책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소 짓기도 했다.
   
   
▲ 리스본 유람선을 타고 본 도시 전경. photo 이승원

   ‘리스본행 야간열차’ ‘불안의 서’
   
   나를 리스본으로 이끈 두 권의 책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다. 특히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면, 이 책이 우리 시대의 ‘그리스인 조르바’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독서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겼으며 묵묵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만족했던 그레고리우스는 일생 동안 모범생으로 살아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한 여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열띤 수업 도중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무 대책 없이 리스본행 열차를 탄다. 그녀가 두고 간 책 속의 인물, 아마데우에 대한 불타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가 자신에게 극도로 결핍된 모험과 열정, 야생적인 삶에 대한 투혼을 조르바를 통해 간절하게 대리만족하듯이, 그레고리우스는 머나먼 리스본의 젊은 혁명가 아마데우에게서 바로 그런 ‘자기 안의 결핍’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인물을 만난다. 아마데우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체 게바라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매혹적인 인물이다. 조르바의 야생마 같은 초인적 감수성, 그리고 체 게바라의 혁명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열정과 두려움 없는 용기를 닮은 이 주인공은 단번에 그레고리우스를 압도한다. 그레고리우스가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것은 책 바깥의 실제 세상에서는 책 속의 인물들만큼 매력적인 인물을 만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아마데우는 이 책에 미친 백년서생 그레고리우스를 단번에 무너뜨릴 두 개의 열쇠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마데우는 단 한 권이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책을 썼으며, 그리고 그 책의 살아 있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마데우는 책 속의 매력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책 바깥에 살아 있는 실존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마데우라는 미지의 인물,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소책자 한 권으로 인해 스위스에 살고 있던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평생 지켜온 모든 것을 갑자기 내려놓고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 것이다.
   
▲ 리스본 바닷가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다시 읽으며 내가 리스본에 간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나 또한 그리스인 조르바나 포르투갈인 아마데우를 동경하는 꼼짝없는 백면서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반드시 떠나야 할 실용적인 이유도 없는 곳으로 매년 기갈증에 걸린 사람처럼 떠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내 안의 결핍 때문이 아닐까. 불꽃 같은 삶을 진짜로 살아낼 수는 없고 오직 책으로, 영화로, 그림으로, 음악으로만 경험하는 내 인생에 대한 결핍감. 그 모자람과 아쉬움이 사무쳐 1년에 한 번씩 열병처럼 도져서, 나는 머나먼 여행을 떠나곤 한다.
   
   여행은 내게 ‘힐링’이 아니다. 휴식도 아니다. 더욱 격렬한 삶을 향한 갈증이고, 일상에서는 미처 살아내지 못한 막연하지만 갈급한 그리움의 해방구다. 나는 해변의 선비치에 누워 햇살을 만끽하는 달콤한 힐링을 결코 해내지 못한다. 여행 도중에도 늘 책을 붙들고 글을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항상 ‘너는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는 지청구를 듣지만, 고칠 수가 없다.
   
   나는 여행 중에 느끼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감정에 중독된 것 같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참고 운동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 격렬한 운동 후에 맛보는 도취감이 바로 러너스 하이지만, 글쓰기 같은 정신적인 노동을 할 때도 이와 비슷한 희열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마라톤 주자가 42.195㎞의 고통스러운 질주를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쳤을 때, 그 사점(死點)을 넘기면 신기하게도 기이한 해방감과 카타르시스가 찾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여행 중의 글쓰기가 그렇다. 하루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녀 녹초가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온몸이 간질간질하며 그 와중에 글이 쓰고 싶어진다. 여행 중에는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쳐야 한다는 긴장감과 일상의 규칙적인 생활 패턴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가득 찬 긴장감과 느긋한 이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여행의 체험 속에는 뭔가 중독에 가까운 기쁨이 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격렬한 감정, 심리적인 러너스 하이인 것이다.
   
   물론 여행 중 강행군에 지친 상태에서 글을 쓰다가 너무 졸려 노트북 앞에서 까무룩 잠들기도 하고, 다음 날 그 글을 읽어보면 도저히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난감한 상태일 때가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안의 그 희귀한 감정, 여행 중의 러너스 하이를 사랑한다. 나는 그 황홀경의 시간 속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어보고, 마음만은 언제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덜컥 타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되곤 한다.
   
   
▲ 리스본의 밤거리에서 춤추는 비보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photo 이승원

   아우구스토 광장에서…
   
   리스본에 도착한 둘째 날, 투어용 보트를 타고 리스본의 명소를 쭉 돌아보았다. 항구에서 배가 멀어지는 순간 리스본의 붉은 지붕들이 일제히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항상 바다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해왔던 리스본 사람들답게, 항구에는 온갖 배들이 많고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리스본의 밤은 더욱 눈부시다. 여름 내내 음악이나 춤에 관련된 온갖 축제가 벌어지는데, 아우구스토 광장에서는 ‘율리시스 21’이라는 이름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리스본의 탄생을 모티브로 한 화려한 영상이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리스본은 17세기에 커다란 지진을 겪었는데, 그 지진의 피해를 딛고 도시를 다시 복구해낸 기념으로 아우구스토 광장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수많은 공연자들로 북적일 뿐 아니라 온갖 레스토랑과 디저트카페, 옷과 구두를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포르투갈의 전통음악 파두(fado)가 울려퍼지는 아우구스토 광장에서 나는 리스본에서 태어나고 죽은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를 떠올렸다. 그는 ‘불안의 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피곤하여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였다.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피곤할 때, ‘나’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로 살아보고 싶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동상 흉내를 내는 어린이. photo 이승원

   페르난두 페소아가 자주 갔던 카페 브라질레리아에 도착한 나는 그의 동상에 손을 얹고 한참 동안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거나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연인과 사진을 찍으며 흥겨워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텅 비게 될 이 아름다운 거리를 상상해 보았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아득한 심연입니다.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입니다.” 페소아는 왜 우리 자신을 ‘두 개의 아득한 심연’이라 했을까. 하나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꿈꾸는 나’가 아닐까. 내가 꿈꾸는 나를, 현실의 나는 결코 실현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토록 가슴 아픈 방황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리스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읽었던 페소아의 글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슬픔의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영혼 밑바닥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글, 오직 스스로의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가장 정직한 언어들로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 투명함과 간절함이 리스본의 아련한 밤 풍경과 어우러져 나를 위로하는, 눈부신 밤이었다.
   
   ‘오직 밤에만, 밤에만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모든 사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잊힌 존재로, 버려진 존재로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은 채, 그 어떤 세상의 소용과도 무관한 채, 나는 오롯이 나로 있는 나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나는 꿈꾼다. 내가 쓰는 글이 마치 지진계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의 온갖 울림과 떨림, 미세한 균열과 급작스러운 온도변화까지 전해줄 수 있기를. 아무리 갈고 다듬어도 아직 이 ‘문장’이라는 마음의 지진계는 어딘가 부정확하다. 그때 느낀 그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언어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그 망설임과 궁리 속에서 매번 조금씩 ‘이전과 다른 나’를 향해 1㎜씩 아주 느리게 바뀌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아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진동과 균열이 어쩌면 ‘진정한 나’에 가까운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비로소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진짜 나 자신이 된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걷고, 달리는 야간열차 속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눈꺼풀이 지구만큼 무거워질 때까지 글을 쓰고, 꿈속에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찾아 헤맨다. 그럴 때 나는 가장 나다워진다. 누가 통과의례를 ‘성인식’이라고 했던가.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지독한 마음의 통과의례를 치르고, 그때마다 조금씩 오히려 어려지고, 철없어지고, 해맑아진다. 그 새로 태어남이 좋다. 그 나다워짐이 좋다.
등록일 : 2017-03-10 15:16   |  수정일 : 2017-03-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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