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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가 총람’ 펴내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고미술 90%는 위작(僞作) 가능성...나 죽기 기다리는 사람 많아”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934년생인 노(老)학자는 요즘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큰 소리로 물었고, 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답했다. 그가 “책 한 권 내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답했을 때 서로의 문답(問答)에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사연이 진짜 그랬다.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쉼 없이 하나둘 자료를 모았고 천신만고 끝에 지금에야 책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교 용어인 정진(精進)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정양모(83) 박사가 펴내는 ‘조선시대 화가 총람’(시공사)은 우리 미술사 연구에 기념비적 저서가 될 전망이다. 아직 책이 나오기 전인데도 후학들의 호평과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국가에서 할 일을 선생님 혼자서 하셨다”고 평가했고,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책 서문에서 “조선왕조 시대 화가들에 대한 구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결집되어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안 교수는 “책이 나오면 머리맡에 두고 자겠다”고 했다고 한다.
   
   11월 말 상·하 양권 1500쪽 분량으로 나오는 이 책에는 조선시대 화가 220명의 ‘모든 것’이 담긴다. 화가의 약력과 화력(畵歷), 서명, 제발(題跋), 인장(印章) 등 화가를 알리는 원자료들이 컬러도판과 함께 실린다. 우리 전통 회화가 꽃피웠던 조선시대 화가만을 다룬 자료집이 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회화사 연구를 위한 사전(辭典) 성격의 자료집이 오래전부터 수도 없이 나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드물었다. 1928년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같은 명저가 출간됐지만 그림 도판이 없는 책이었고 이후에는 시대와 작가들을 세밀하게 분류한 자료집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정양모 박사는 회화가 아니라 도자기가 주 전공이다. 한국 미술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지만 회화가 아니라 도자기 연구에서 최고 권위자라는 명성을 쌓아왔다. 이번 노작(勞作)이 출간되면 조선시대 회화를 연구하는 후학들이 그의 학구열에 단단히 빚을 지는 셈이다. 책 출간을 앞두고 지난 11월 20일 서울 서촌의 개인연구실인 ‘한국미술발전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10년째 사용하고 있다는 연구실은 온갖 자료와 책들이 여기저기 산을 이루고 있었다.
   
   - 그림이 전공도 아닌데 ‘조선시대 화가 총람’을 펴낸 계기가 뭔가. “내가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학예관으로 들어가 37년간 근무했다. 처음에 미술과장인 최순우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과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에 10명 정도가 근무하지만 그때는 둘밖에 없었다. 그림 전시를 하려면 공부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림 100점을 걸려면 유물부에서 150점쯤 빌려와 훑어봐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박물관에 있는 2000점의 그림을 다 섭렵하게 됐다. 그러면서 전통 회화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일본·중국과 달리 회화 연구 자료집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우리 화가 인명사전을 만들어 작품을 원색 도판으로 많이 수록하고 서명과 제발과 인장을 다 함께 담아 출간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50년 전이다. 1984년 돌아가신 최순우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굉장히 좋아했을 것이다.”
   
   - 220명의 화가가 책에 담긴다는데 조선시대 화가들을 다 망라한 것인가. “조선시대 화가들이 무명작가까지 합해 한 300명쯤 될 것이다. 그중 기존 자료를 참고하고 자문도 받아 내 안목으로 좋은 작가 220명을 골랐다. 작가마다 최소 3점에서 많게는 10여점의 그림을 담았다. 조선시대 그림은 초기는 귀하고 중기부터 많아진다. 최경이라는 화가는 실록에는 등장하는데 그림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반면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는 그림이 많다. 최경은 도판 이외의 자료만 실었다. 이 책에 실리는 그림이 1000점 정도 될 것 같은데 일반인들이 못 보던 그림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는 일반인들이 잘 못 보던 그림 중 하나가 단원의 말기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단원은 52세에 그린 ‘병진화첩(丙辰畵帖)’ 이후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학(鶴)도 되고 신선도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원의 말기 그림 중 못 보던 것들이 있을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들도 많이 실리나.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실 그림이 약하다. 단원의 경우 풍속화만 있고 진짜 좋은 그림은 별로 없다. 예컨대 단원의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 같은 산수화는 장관(壯觀)이자 명화인데 개인소장가인 이모씨 댁에 있다. 1980년대 후반 그 그림을 박물관에서 사려고 해봤는데 그때도 최하 가격이 10억원이나 돼 포기했다. 아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번 책에 실린 그림 중 한 10분의 1만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는 간송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이 많이 갖고 있다. 선문대학에도 꽤 있다. 개인소장가로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고 이후락씨가 가장 많이 갖고 있었다. ‘간송하고 이후락씨 빠지면 우리 회화는 반밖에 없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이후락씨 소장 작품은 빌려다가 본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못 담았다. 간송과 호암미술관의 도움이 컸다. 호암미술관은 300컷의 도판을 그냥 빌려줬다.”
   
   - 책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뭐였나. “개인소장가들로부터 도판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돌아가신 지 50년이 안 된 화가들의 도판을 실을 때는 소장자와 유족들의 허락을 받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그림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하는 것부터 간단치 않았다. 그림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기 때문에 잘 내놓지 않는다. 좋은 그림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시간이 그래서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앞으로는 내 책을 기초로 국가가 나서서 좋은 도판을 보강했으면 한다.”
   
   - 조선시대 그림은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의 그림과 비교해 어떤 특장점이 있나. “조선의 그림은 일본, 중국과는 다르다. 중국 회화는 스케일이 크고 관념화다. 실경(實景)이 아니라 머릿속 좋은 산을 그린다. 반면 우리는 겸재 이후 실경을 그렸다. 그렇다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다. 반면 일본의 그림은 우리와 비교해 매끄럽고 깔끔하다.”
   
   - 이번 책이 후학들의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그것도 그렇지만 위작을 가려내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화가의 서명, 인장, 제발 등을 있는 대로 다 수집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하면 거짓 서명과 인장, 제발 등을 가려낼 수 있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는 인장이나 서명이 100개가 넘는 경우도 있다. 전통 회화를 거래하는 상인들도 그걸 다 볼 수 없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그런 인장과 서명만 따로 모은 자료집도 없고. 내 책을 참고하면 앞으로 상인들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 우리 고미술시장에 위작이 많나. “돌아다니는 것은 위작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좀 이상해서 감정을 해주는 데가 별로 없다. 사인(私人) 간의 감정은 잘 믿지를 않고. 다들 ‘자신이 없으니 정양모한테 물어보라’고 하니 다 나한테 갖고 오는데 가짜가 많다. 100이면 90은 가짜라고 본다.”
   
   - 위작을 위작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해주나. “그랬다면 내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공부가 덜 돼 잘 모르겠다’며 돌려보낸다. 나를 미워하는 상인들이 참 많다. ‘정양모 죽으면 우리 세상’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들 다닌다.”
   
   - 본래 도자기를 전공했는데 조선시대 도자기와 그림은 어떤 점이 차별화되나. “그림이나 도자기나 다 중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도자기가 더 한국적이다. 그림도 겸재 같은 이가 나와서 중국으로부터 겨우 벗어났지만 결국 종이, 붓, 먹 같은 재료가 다 중국이 원류다. 반면 도자기는 우리 재료로 만들어 우리의 음식을 담는다. 조형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적 미(美)의 진수가 도자기에 있다.”
   
   - 과거 인터뷰에서 한국의 도자기는 중국, 일본 것과 섞어놓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라고 지적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한국의 도자기에는 인공성이 없다. 사람의 재주, 군더더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조선시대 자기는 백자가 99%인데 그냥 물레에서 백토를 원심력으로 빚은 걸 일상생활에서 쓴 것이다. 인공적인 것이 들어가면 우리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대범하고 자연적이어서 일본, 중국 자기와는 금방 차이가 난다. 그런 백자에 장 같은 우리 재료를 담아 서민들이 일상에서 쓴 것이다. 자연미와 함께 실용성도 한국적인 미의 핵심이다.”
   
   그는 한국의 현대 도예가 1세대로 평가받는 김익영씨의 경험을 전하며 한국 도자기 조형의 세계적인 우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김익영씨가 도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미국의 알프레드대학원에 유학을 갔는데 영국의 세계적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가 강연을 와서 ‘현대 작가가 지향할 최고의 조형은 한국 것’이라고 강조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 김익영씨가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왔었다. 청소라도 하면서 있게 해달라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머물면서 최순우 선생 지도를 많이 받았다.”
   
   그는 “조선시대 달항아리 백자는 그 조형미가 세계 최고”라며 “이런 한국적인 조형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10년 8월 서울시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에서 열린 태안 마도 2호선 수중발굴 유물 언론공개에서 발굴 자기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photo 뉴시스

   - 과거 도자문화원이라는 걸 만들자고 정부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이민섭 문화부 장관에게 도자문화원을 만들자고 건의했었다. 우리 도자기의 조형성이 대단한데 선진국에 뒤처져 미래를 향해 나간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도자문화원을 만들면 내가 한국 도자기의 미래를 제시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이민섭 장관이 ‘좋다’고 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우리 교과서에 한국 도자기 그림을 넣어서 한국적 미가 뭔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국내에서도 도자기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 “경기 이천, 여주에 가보면 옛날 식으로 도자기들을 많이 만드는데 공부를 별로 안 한다. 다들 옛것을 모조만 한다. 정신은 빼고 외형만 베껴서는 발전이 없다.”
   
   - 역대 정부가 항상 문화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는데 결실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하나. “다 헛소리였고 관심들이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문화하고 정치는 양 수레바퀴라고 강조했지만 조선총독부 허문 것밖에 없었다.”
   
   -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실무책임자로 비판도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인가. “내가 평소 강조해왔지만 세계 어떤 침략자도 경복궁 같은 정궁을 허문 적이 없었다. 왜놈들만 그렇게 했다. 조선총독부를 부수고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잘했다고 본다. 1995년 허물었으니까 한 20년 됐는데 과거 반대론자들도 지금은 ‘큰일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다. 광화문 뒤로 북악산이 보이는 게 어디인가.”
   
   - 당시 역사적인 상징물인 조선총독부를 이전해 보존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내가 철거 때 실무를 담당해 잘 아는데 조선총독부 건물은 다 인조석이어서 쓸모가 없다. 건축공사에는 건식과 습식이 있는데 조선총독부 건물은 콘크리트로 뼈대를 만들고 돌을 갖다붙인 습식 건물이다. 장식용 돌을 떼어내면 다 깨진다. 부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유물이니까 떼어내보라고 업자한테 부탁해서 일부 떼어낸 것을 독립기념관에 실어다놨다.”
   
   그는 우리 정부가 전통문화 발전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주문했다. “역대 정부는 전통문화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빈곤했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다. 서양 것을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든 한류도 필요하지만 진짜 우리 것을 그대로 보여주면 외국 사람들은 더 다가선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도서실에 가보니 한국 도자기에 대한 영문 서적이 딱 두 권밖에 없었다. 중국, 일본 서적은 수백 권씩 있는데.”
   
   - 국립중앙박물관장 때 지금의 용산 박물관으로 이전 계획도 세웠는데 지금 박물관에 만족하나. “경복궁 시절에는 공간이 너무 협소해 용산으로 옮기기를 잘했다. 국립박물관도 시작은 그랬지만 우리의 박물관들은 껍데기만 짓는다. 뭘로 채울 건지, 내용과 운용 인력에는 투자를 안 한다. 지방 박물관들도 서울에 있는 것 가져다가 채운다. 우리의 유물들은 외국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일제가 빼앗아간 것만 수십만 점이다. 허튼 데 돈 쓰지 말고 그런 유물들을 다 사와야 한다.”
   
   그는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의 아들이다. 위당의 4남4녀 중 일곱째다.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느냐”고 묻자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내가 서울 창동에서 기차로 통학을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다니고는 그만뒀다. 아버지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밥도 굶고 옷도 형편없었는데 맨날 지각하다가 광복 2년 전부터는 아예 학교를 안 다녔다. 어머니랑 누이가 ‘학교 안 가면 거지 된다’고 했지만 오히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제일 무서웠던 분이 ‘왜놈 글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냥 놀았다.”
   
   ‘조선의 얼’을 강조해온 위당은 일제 말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서 전북 익산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일제의 암살대상자 명단에 올랐다고 누군가가 귀띔해준 덕분이었다. 익산에서 광복을 맞은 후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위당은 6·25전쟁이 나던 해 납북됐다. 정양모 박사는 2004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아버지의 추억’이라는 글에서 ‘지난 50여년 동안 하루도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지 아니한 날이 없었다. 그래도 10년 전까지는 매일 아버님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시는 꿈을 꾸었건만 그 이후로는 아주 가끔 꿈에 아버님을 뵙게 되었다. 아버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은 그대로 가슴에 있건만 아버님을 향한 마음이 미흡한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해 보기도 한다’고 썼다.
   
   - 얼마 전 누이인 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남편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사모문집’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정 교수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 화제가 됐었다.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누이는 진짜 학자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더 간절한 것 같다. 국문학을 전공한 누이는 아버지의 글을 읽기 위해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아버지가 남긴 ‘조선사 연구’ 같은 책은 지금도 학자들이 한 쪽 읽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고들 한다. 그분 머릿속에 있던 온갖 고전을 다 인용해서 내용이 그렇게 어렵다. 그런데 누이가 그걸 숙명적으로 번역하겠다고 한 것이다. 누이는 30년 걸려 아버지의 책을 번역했다. 나보다 100배는 위대하다.”
   
   그는 “위당이 마지막 선비였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발끝도 못 쫓아간다. 입신양명해서 부모의 공을 기려야 하는데 누이는 아버지 책을 번역이라도 했지만 나는 그것도 제대로 못했다. 한국학을 했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 아버지를 이었다고 할까. 지금은 아버지 같은 선비가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다.”
   
   - 선비가 뭐라고 보나. “학문이 깊고 학문에 기초해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학문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학문이 실용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문이 자기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옳고 그른 걸 분명히 판단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다 “찾아보면 있겠지만 이 시대는 선비가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라며 동시대 후학들을 향한 듯한 주문을 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옳은 소리를 해야 한다. 정치가가 하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선비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등록일 : 2017-12-01 13:55   |  수정일 : 2017-12-0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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