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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간의 중국 복장 변천사...'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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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경축하기 위해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열린 치파오쇼에서 여성들이 전통미를 뽑내고 있다. /신화사

옷에는 당대 문화와 문명이 녹아있다. 도서출판 선이 펴낸 《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은 제목 그대로 지난 100년간의 중국 복장 변천사를 통해 중국의 생활 문화를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위안저와 후웨는 부부로 둘 다 베이징복장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 복장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1901년부터 2000년까지 한 세기 동안 중국인의 옷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10년 단위로 보여줌으로써, 시대에 따른 중국인들의 심미관과 심미적 취향의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페이지마다 실린 풍부한 자료 사진은 그 자체만으로 격동의 중국 100년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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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도서출판 선)
20세기 초기 10년은 청(淸)나라 왕조 통치의 마지막 10년이었다. 여전히 왕조는 살아있었지만, 종이호랑이 신세가 된 청 제국은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은 중국의 의상(衣裳)문화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만족(滿族)은 강제로 한인(漢人)들에게 변발을 강요하며, 만족의 옷을 입게 했다. 그 이유는 첫째 만족들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물질적 형식에서 이데올로기까지 철저히 한족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한족들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족들도 점차 만족의 복장과 변발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 물건들과 현대 공업기술은 점차 중국의 서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돗물, 성냥, 휘발유, 자동차, 서양옷감 등은 점차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물건이 되었고, 카메라, 전등, 전화, 축음기 등 고급품들이 귀족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당시 한 잡지에 상하이의 기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날 풍속은 날로 화려하고 사치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의복의 차림이 사치스럽고 상·하의 구별이 없는데 상하이의 정황이 가장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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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변발.

신구가 혼존하는 시대- 변발과 전족의 폐지 노력
 
1911년 10월 우창(武昌)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200년 대청제국의 몰락을 고한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듬해 새로 성립된 국민정부는 ‘복제법령’을 반포해 청나라의 관복색을 일률적으로 폐지하고 서구식 복장을 복제법령에 수록시켰다. 새로운 복색제도는 중국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음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법령이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바로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정국의 혼란과 마찬가지로 신구의 복장이 뒤섞이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모든 것이 혼란하였고 빠르게 변했다. 양복에 구두, 군복에 가죽 장화, 두루마기에 마고자, 청나라 관복에 이도 저도 아닌 복색들이 섞여서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치켜든 중요한 혁명 하나가 바로 변발 자르기였다. 변발은 혁명 세력과 청나라 정부가 갈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변발 자르기는 ‘혁명’의 상징이었고, 당대 문명의 ‘패션’이었다.
당시 보도에는 촌민들이 군인들에게 변발을 잘릴 때의 공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변발을 잘리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고향으로 도망치고, 군인들이 그 뒤를 쫓았다. 어떤 사람들은 핍박에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옆에서 구해주었기에 죽음은 면했다.”
 
1916년과 1928년 국민정부는 천 년이 넘도록 중국 여성들을 속박해온 악습인 전족을 금지하는 통고와 조례를 발표했다. 1912년부터 1928년까지 변발 자르기와 전족금지에 대한 법령이 점차 강도를 높여 갔지만, 그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낡은 것을 없애야 새것이 온다-중산복의 도래와 모던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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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복을 입은 중국 국민당 주석 장개석과 중공을 세운 모택동. 중산복은 모택동 이후 인민복으로 변화되었다.
1920년대 이후 민국의 각종 화보, 문예잡지, 신문들은 문자, 사진, 패션회화, 광고, 만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양복 문화와 해당 정보들을 소개했다. 1926년 상하이에서 창단된 〈양우〉라는 잡지는 표지에 여성사진을 실었다. 표지여성의 옷차림과 정신적인 기질은 ‘아름답고, 모던하고, 매력적’이라는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유행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의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중산복’은 민주혁명 선도자인 손중산(손문:孫文)이 창도한 의복이다. 이 옷은 민국 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남성복이었으며, 가장 정치색채가 농후한 복장양식으로 정치역사의 기복에 따라 역사와 함께 호흡을 같이 해왔다.
 
중산복 양식이 기본상 결정된 것은 20년대 후기이다. 그 주요 특징들을 보면, 낮은 칼라거나 번진 칼라로 끝 부분이 팔자형을 띠고 있다. 위아래에 네 개의 덮개 달린 주머니를 달았고, 앞섶에는 다섯 개의 단추를 드러나게 달았고, 소매에는 각각 세 개의 단추를 달았다. 난징 국민정부는 중산복을 공식 복장으로 발표하고, 네 개 주머니를 예, 의, 염, 치라 비유했으며, 앞섶 다섯 개의 단추는 오권분립을 상징하며, 소매의 3개의 단추는 삼민주의를 상징한다고 했다.
 
192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들이 장포(長袍: 치파오)를 입었다. 민국 초기 한족 여성들 가운데 치파오를 입은 자가 많지 않았지만, 20년대 중기부터 유행하여 점차 일반의상으로 되었고, 30년대와 40년대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입으면서 상의와 치마를 입던 방식을 대체했다.
 
1931년 6월 상하이 대화호텔에서 중국 최초의 패션쇼가 열렸다. 치파오는 도시 여성들의 중요한 복장이 되었다. 치파오의 길이는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고 하고, 칼라도 높아졌다 낮아지면서 전반적으로 점점 몸에 맞게 변해갔다. 상하이 무역항이 발달하면서 중국식과 서양식이 뒤섞이는 문화생활이 번졌고, 이런 삶을 영유하는 해외파 문화가 시작됐다. 대다수 상하이 사람들은 중국 재단사의 손에서 만들어진 양복을 입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날 마오쩌둥은 올리브색의 중산복을 입었다. 이날 마오쩌둥이 입은 소박한 옷차림은 이후 인민복으로 변형되어 수십 년간 중국의 복장문화에 광범위하면서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등록일 : 2017-09-05 08:58   |  수정일 : 2017-09-0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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