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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80 주기...권태를 날개로 그를 다시 본다

글 | 박해현 조선일보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 이상과 시 ‘오감도’
올해는 시인·소설가 이상(李箱)의 80주기가 된다. 그의 본명은 다 아시다시피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실험과 전위예술의 상징으로 꼽혀왔다.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일본 도쿄 제국대 부속병원에서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상은 1936년 10월 새로운 문학을 모색하러 도쿄에 갔다가 죽기 두 달 전 ‘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본명 김해경이 아닌 이름으로 ‘그리 온건하달 수 없는 글귀’를 적은 공책이 그의 하숙집에서 나왔다. 한 달 동안 조사를 받다가 추운 유치장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성에서 급히 달려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는 “멜론이 먹고 싶다”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 뒤 숨을 거뒀다. 한때 ‘레몬’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멜론’이 맞다는 게 최근 연구 결과다. 그때 아내 변동림이 병석을 지키고 있었다.
   
   <변동림은 이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얼 먹고 싶어?”
   
   그걸 듣고 이상이 대답했다. “센비키야(千匹屋)의 멜론.”
   
   변동림은 이상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듣곤 멜론을 사러 밖으로 나섰다. 변동림이 센비키야 농원에서 나오는 멜론을 사갖고 들어와서 깎았다. 이상이 그 향기를 맡은 듯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장석주 ‘이상과 모던 뽀이들’>
   
   도쿄 시절 이상은 서양을 흉내 낸 일본의 ‘모조(模造)된 현대’를 비웃었고, 하숙집에서 소설 ‘종생기’ 등 10편을 왕성하게 썼다. 그러나 곧 귀국하려던 참에 느닷없이 불심 검문에 걸려 ‘거동 이상자’로 분류돼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끌려갔다. 이상은 경찰서에 구금된 채 한 달가량 조사를 받았다. 진술서도 여러 차례 썼다. 이상은 병이 악화되어 풀려나 병원에 입원한 뒤 병석에서 일본 경찰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험악한 분위기에서 진술서를 써야 했을 터인데 장난스럽게 “예의 명문(名文)에 계원(係員)도 찬탄하더라”며 우스갯소리도 던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이 경찰서에서 쓴 수기(手記)를 포함한 일본 경찰 기록은 공개된 적이 없다.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상은 평소 폐결핵을 앓아 심신이 힘든 상태였다. 그런 처지에 경찰서에서 보낸 한 달가량은 그의 건강을 급속하게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병사가 아니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위풍당당한 천재(天才)로 기록된 이상은 일제의 폭력 앞에서 허망하게 쓰러진 희생양으로도 기억되어야 한다.
   
   
   1934년 ‘오감도’ 연재, 천재와 광인 평가
   
   1910년 9월 23일 경성에서 태어난 이상은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 연재를 시작해 천재와 광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중략)/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은 ‘오감도’ 연작시의 첫 편을 발표한 뒤 다음날 제2호와 제3호를 동시에 내놓았다. 시가 발표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의도를 알기 힘든 단어를 되풀이해서 나열하고, 기존 시에선 사용하지 않았던 수식과 기호를 동원해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시가 연일 지면에 등장하니 일반 독자들로서는 미친 짓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여론의 질타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은 이렇게 큰소리쳤다고 한다.
   
   “불란서의 보들레르는 지금부터 백 년 전인 1850년에 ‘악의 꽃’을 발표해서 그 유명한 악마파 선언을 하지 않았소?… 이번에 내 ‘오감도’는 ‘악의 꽃’에 필적할 세기적인 작품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요.”(조용만 ‘이상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오감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놓고 지금껏 수많은 비평과 논문이 나왔다. 오감도(烏瞰圖)는 건축용어 ‘조감도(鳥瞰圖)’에서 한 획을 비틀어 까마귀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본 형상을 의미한다. 까마귀는 흔히 불길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불안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다.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동일한 구조의 시행을 반복함으로써 시의 조형성이 강조되었다. 그러한 구조로 인해 구획으로 이뤄진 도시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13인의 아해’란 표현을 놓고 13을 기독교에 연결하기도 하고, 조선 13도로 풀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이상의 재발견을 주도한 평론가 이어령은 ‘오감도’를 읽을 때 지나치게 우의(寓意) 해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어령은 음산하고 황량한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을 떠올리라고 했다. 그는 13을 예수와 그의 제자 12인에 갖다 붙일 필요가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이 시를 읽으라고 했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이상에 의해서 한국 시는 처음으로 표현이 아니라 관찰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의 그물로 바뀐 것이다.”(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오감도’를 이해하려면 이상의 생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상은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를 꿈꿨기 때문에 미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는 1929년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교 추천을 받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특채됐다. 그는 일본인 건축가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건축회 정회원이 됐다. 그는 1930년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서 1등과 3등을 다 차지했다. 1931년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 ‘자상(自像)’을 출품해 입선함으로써 오랫동안 꿈꾸던 화가의 길도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토록 앞날이 창창했던 청년 이상은 갑작스레 찾아온 폐결핵으로 쓰러져 모든 것을 일시에 포기해야 했다. 그는 총독부에 사직서를 냈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 무렵 여인 금홍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경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방 ‘제비’를 개업했다. 이상은 다방에 자주 오던 문인들과 접촉하면서 자연스레 문학을 새로운 삶의 출구로 삼게 됐다. 그는 시인 정지용, 소설가 박태원·이태준의 주선으로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발표하게 됐다.
   
   이상 전집(전 4권)을 엮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오감도’에 대해 “이 작품은 1920년대까지 한국에서 유행하던 서정시의 시적 정서나 진술 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상은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법과 양식을 거부하고 사물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실험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세계와 사물을 보는 시각의 문제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다.”(권영민 ‘오감도의 탄생’)
   
   이상은 건축학과를 다녔고, 미술에도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오감도’처럼 시각을 바탕으로 하되, 시각의 새로움을 통해 세계를 색다르게 내려다볼 수 있는 정신을 시의 언어로 표출할 수 있었다. ‘오감도’를 읽다 보면 당시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날던 한 마리 검은 까마귀를 상상하게 된다. 창공을 유유히 날며 세기말의 징후인 양 불안한 기운을 뿜어내던 까마귀는 이상의 머릿속을 지배한 시대정신의 표상이었을 수 있다.
   
   
▲ 서울 서촌에 있는 ‘이상의 집’.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사람
   
   이상의 소설 ‘날개’는 1936년 발표됐다. 도시의 외딴 방에 웅크리고 앉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아내의 매춘 덕분에 먹고사는 사내는 현실을 향해 고고한 자의식을 투사하면서 버틴다. 스스로 이방인이자 외톨이로 살면서 은근히 현실을 조롱하고 스스로를 학대한다. 그가 돈을 화장실에 버리는 장면은 화폐경제에 대한 반항의 몸짓으로 해석된다. 1930년대 경성이 식민지 근대화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를 완비했고, 새로운 도시성은 문명의 새 지평이기도 했지만, 물신숭배와 인간소외라는 근대 도시의 폐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는 그런 상황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당대 지식인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전집(전 3권)을 펴내고 연구서 ‘실험과 해체’도 낸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이 소설의 구조를 풀이했다. “작가는 작품의 서두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있다. 이 작품은 질문과 답변의 형태, 아이러니, 패러독스, 비유 등 특이한 문체로 이뤄졌다.… 이 작품은 외출과 귀가의 반복 구조를 띠고 있다. 다섯 번의 외출과 네 번의 귀가를 겹쳐놓으면 하나의 완전한 영상, 즉 성행위 장면으로 상승 발전하는 양상을 띤다.”
   
   ‘날개’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고, 독자의 기억 속에 오래 각인된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은 아마도 새를 동경한 듯하다. 까마귀를 통해 내면의 초상을 드러내고 근대의 불안을 표출하면서, 다방 이름은 제비로 정했고, 소설에선 ‘날자’라고 외쳤다. 식민지 조선에서 예지에 가득 찬 눈으로 시대를 읽었던 청년 이상은 누구보다도 비상(飛翔) 욕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 김기림은 이상과 절친했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으면서 모더니즘 문학의 이론가로도 활동해왔다. 당대의 모더니스트였던 그는 다방 ‘제비’에서 이상을 처음 만났다. “무슨 싸늘한 물고기와도 같은 손길이었다. 대리석처럼 흰 피부, 유난히 긴 눈사부랭이와 짙은 눈썹, 헙수룩한 머리 할 것 없이 구보(소설가 박태원)가 꼭 만나게 하고 싶다던 사내는 바로 젊었을 적 D.H. 로-렌스의 사진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김기림은 이상의 삶과 문학에 대해 “차마 타협할 수가 없는 더러운 세계와 현실의 등 뒤에 돌아서서 킥킥 웃어주었으며 때로는 놀려주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고 평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라고도 했다. “오늘에 와서 생각하면 상(箱)은 실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험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시는 난해하고,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에 가깝다. 그나마 ‘날개’는 읽을 만하다. 그래서 발표 당시 격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상을 난해한 괴짜 예술가로만 인식해 들여다보기도 싫다는 독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상의 수필은 그런 독자에게도 적극 권할 만하다. 독특하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글이 아니다. 역설과 위트, 독설과 비애, 풍자와 해학, 지성과 감성이 두루 뒤섞여 있는 산문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수필 중 대표작으로 ‘권태’가 꼽힌다.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샘물이니 말이다.”
   
   이상은 그야말로 불나비처럼 화끈하게 살았다. 그가 지향한 예술의 불꽃 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권태’는 1936년 도쿄에 머물 때 쓴 글이다. 그는 도쿄에서 ‘불나비’를 찾지 못했다. 그는 예술의 기폭제가 될 새로운 자극을 얻지 못했다. 그는 권태를 느껴야 했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等待)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권태’는 이상이 1936년 도쿄에서 쓴 수필이다. 그의 사후에 조선일보 1937년 5월 4일자부터 11일자에 연재됐다. 80여년 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예리한 정신의 촉수와 세련된 문체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상의 유해가 경성으로 돌아와 열린 추도식 자리에서 당대의 평론가 최재서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상의 보헤미안 타입의 풍모와 시니컬한 웃음과 기지환발한 스피치에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인위적인 포우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상식에 싫증났다는 것, 그리고 결코 순탄스러워보이지 않는 생활 가운데서도 문학적 에스프리(esprit)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 등을 나는 알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상의 문학적 추동력은 결국 ‘권태’였다는 얘기가 된다. 권태는 결코 나약한 감정이 아니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권태야말로 실존을 낯설게 하는 부조리의 감정이고, 그로 인해 인간은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이상은 상식의 세계에 싫증이 났기에 과감하게 그 세계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는 온몸으로 시대의 편견과 제약을 깨려고 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그것이 그의 문학적 에스프리였다. 이상의 삶과 문학은 도전과 저항·실험정신에 바탕을 두고 상상력의 해방을 실천했기에 오늘날까지도 늘 젊고 위풍당당하게 떠오른다.
등록일 : 2017-05-08 09:24   |  수정일 : 2017-05-0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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