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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화제의 책 ‘마오의 대기근’

“마오는 인민의 목숨을 파리보다 하찮게 여겼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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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0월 허난성 바오펑현에서 토법고로에 쓸 돌을 깨고 있는 사람들. 토법고로 연료를 때기 위해 숲에서 나무가 사라졌고 수많은 가옥에서 목재가 뜯겨져 나갔다. photo 열린책들
2003년 7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가장 존경하는 중국 인물이 누구냐”는 중국 대학생의 질문에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을 꼽았다. 좌파 운동권의 대부로 불린 리영희 교수는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에 대해 ‘이기주의·특권계급의식 등을 추방하고 8억 인민을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대수술’로 보는 시각을 소개했다.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386세대 상당수가 리영희 교수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마침 마오쩌둥 숭배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책 한 권이 나왔다. ‘마오의 대기근’(열린책들)은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약진운동(1958~1962) 기간에 벌어진 대규모 참극(慘劇)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자들은 중국 정부의 인구조사 통계를 기준으로 대약진운동 시기 약 1500만~3000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의 대기근’ 저자인 디쾨터 홍콩대 석좌교수는 각종 기록 보관서의 증거들을 바탕으로 사망자가 최소 450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희생자 수에 맞먹고, 크메르루주 학살의 20배가 넘는 수치다. 저자는 이 희생자들 가운데 약 6~8%인 250만명이 고문을 받다 죽거나 약식 처형되었다고 추론했다.

저자는 대약진운동이 불러온 파국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중국 공안부 비밀문건, 최고위 당직자 회의 의사록, 지도자 연설문, 설문조사 등 최근 공개된 방대한 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정권 차원에서 자행된 폭력과 그 작동방식, 그 결과(참상)를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공산화한 마오쩌둥이 신(新)중국, 즉 공산주의 중국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전 인민을 동원하여 추진한 경제성장운동이다. 중국이 가진 큰 자산인 수억 명(당시 중국 인구 6억5000만명)에 달하는 노동력을 활용해 농업 생산량 증대와 철강산업을 육성한다는 것이 대약진운동의 핵심정책이었다.

이 운동은 스탈린 사후(死後) 등장한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의 허풍에서 시작됐다. 1957년 11월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에게 흐루쇼프는 “나의 경제 정책을 따르면 15년 안에 미국의 생산품 산출량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즉각 “15년 안에 우리 또한 영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소위 대약진운동을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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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디쾨터 교수와 책 ‘마오의 대기근’ photo 열린책들

대약진운동에서 문화대혁명으로
 
‘대약진’이라는 명칭은 1957년 하반기 시작된 치수사업에서 처음 시작됐다. 건조한 지역에 물을 대면 곡물 수확이 급증할 것이란 계산 아래 수천만 명의 농민이 관개사업에 동원됐다. 1957년에서 1959년 사이에 100개가 넘는 댐이 건설됐다. 간쑤성의 경우 노동력의 70%에 가까운 340만명이 관개사업에 배치됐다. 프로젝트를 앞당기기 위한 잔혹한 노예 노동이 이어졌고 수년간 계속된 관개사업은 굶주림으로 허약해지고 쇠진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치수사업과 동시에 농장들도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합병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인민공사를 설립했다. 인민공사는 주민들을 더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군대의 행정을 차용한 거대한 집단 공동체였다. 중국 전역에 걸쳐 농민들은 나팔 소리에 기상한 후 공동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각종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행군 노래에 맞춰 일터로 갔다. 임금은 사실상 폐지되었고 생산물은 국가가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잉여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농민이 인민공사에 식량을 꿔서 목숨을 부지했고 농민들은 이 부채를 갚기 위해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심지어 50년간 이 부채를 갚은 농민도 있었다.
 
공업과 농업의 생산량은 쉴 새 없이 상향 조정되었다. 지방 당국자들은 마오쩌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고, 세금은 부풀려진 생산량에 부과되었다. 당에서 내려온 철강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마을 곳곳에 토법고로(土法高爐)라는 소규모 용광로가 설치되었다.
 
1957년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535만t이었다. 1958년 목표량은 2월에 620만t에서 5월에는 850만t으로 수정되었고, 6월에는 다시 1070만t으로 상향되었다. 이 상태로 가면 1975년이면 7억t의 철강이 생산되어 영국을 한참 뛰어넘을 것이라는 게 마오쩌둥의 계산이었다. 마오쩌둥은 “목표량보다 1t만 모자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당 활동가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재도구나 농기구를 징발해 가는 식으로 고철을 수집했다. 충분한 열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폭언을 듣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줄에 묶여 사람들 앞에서 조리 돌려졌다. 윈난성 더훙현에서는 주민 20만명이 철강 증산운동에 투입되어 수천 기의 벽돌 고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으로 하늘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목표량을 달성하려는 미친 듯한 시도에 사고도 빈번했다. 마구잡이로 베어진 나무들이 사람들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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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5월 25일 마오쩌둥이 중국 베이징 북부의 저수지인 십삼릉수고에 나타나 흙을 퍼나르고 있다. photo 열린책들
고로에 불을 피우기 위해 숲은 모두 벌목되었다. 농민들이 철강 증산운동으로 농사에 노동력을 집중하지 못하자 곡식은 수확하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 중국 전역에 걸쳐 4000만명의 노동자가 50만기(基) 정도의 고로 운용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만든 철은 대부분 쓸모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1958년 4월 말이 되자 굶주림과 식량부족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산둥성에서 67만명, 안후이성에서 130만명, 광둥성에서도 100만명이 굶주렸다. 기아에 허덕이는 부모들이 자식을 내다팔았다. 기근은 이해 여름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허난성 광산에서는 인구 50만명 가운데 넷 중 한 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1960년 신양이라는 곳에서는 100만명 이상이 아사했다. 이 중 6만7000명은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대약진운동으로 농업·공업·상업·주거시설 등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특히 취약계층인 아동과 여성과 노인의 피해가 막심했다. 학교에 다닐 만큼 자란 아이들은 노동에 투입되었고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다. 공동 식당에서 음식을 훔친 열두 살 아이는 우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이 책 6부는 ‘죽음의 방식들’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죽음의 유형에 따라 사고, 질병, 노동수용소, 폭력, 식인 등으로 분류해 놓았다. 각 장마다 차마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이런 참상을 ‘기근’이나 혹은 ‘대기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저자는 이에 동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안이한’ 표현이 마오쩌둥의 폭압 정치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살상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민의 절반을 죽게 내버려두어 나머지 절반이 그들 몫을 먹을 수 있게 하는게 낫다.”
이것이 대약진운동이 한창이던 때 마오쩌둥이 바라본 인민이었다.

마침내 당 차원에서 참극이 조사되기 시작했고 마오쩌둥도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단계에 왔다. 1960년 11월 주민들이 사유 텃밭을 보유하고 부업에 종사하며 하루 여덟 시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대량 아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으로 훼손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만회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다른 참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문 읽기
 
‘바다처럼 넓은 고원 호수 근처 추슝에서는 관개사업에 소집된 농민들이 일상적으로 욕설을 듣고 두들겨 맞았다. 주민들은 푸성귀를 조금 훔쳤다고 줄에 묶였고,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자비한 작업 체제를 부과하려고 애쓰는 간부들이 휘두르는 칼에 찔렸다.’(75쪽)
 
‘기근은 댐이나 저수지 축조 작업에 징발된 주민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차화에서는 1958년 1월부터 8월까지 마을 주민 6명 가운데 한 명이 죽어서 사망자 수가 1610명에 달했다. 차화에서는 간부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일상적으로 체벌에 의존했고, 너무 허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먹을 권리를 앗아갔다.’(120쪽)
 
‘기근이 진행되면서 특권 계층의 수가 불어났다. 당원 수가 1958년 1245만명에서 1961년 1738명으로 절반 가까이 증가했다. 당원들이 기근 와중에서도 실컷 먹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것을 국가가 제공하는 잦은 당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1960년에는 고위간부 회의가 상하이시에 엄청난 비용을 안기며 매일 열리다시피 했다. 하급 간부들도 지역 모임에서 실컷 먹었다.’(290쪽)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방호복은 고사하고 일정한 작업복도 없었다. 더 높은 목표량 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안전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면서 난징에서는 1958년부터 매달 치명적인 폭발사고가 줄곧 발생했다.’(395쪽)
 
‘농촌 주민들은 산딸기와 열매, 풀을 찾아 숲을 샅샅이 헤집었다.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뿌리와 야생 풀을 찾아 언덕을 뒤졌다. 필사적으로 썩은 고기를 찾고 쓰레기를 뒤지고 나무껍질을 벗겨냈다가 급기야 배를 채우기 위해 진흙으로 눈길을 돌렸다.’(408쪽)
 
‘막대기는 농촌에서 선호되는 무기였다. 그것은 값이 싼 데다 쓸모도 많았다. 곤봉을 한번 휘두르면 뒤처진 사람을 벌할 수 있는 한편 연달아 가격하면 말을 안 듣는 불순분자들의 살갗을 찢을 수도 있었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희생자들은 줄에 꽁꽁 묶여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기도 했다.’(427쪽)
 
‘인육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장예 기차역에서 고기 1㎏에 신발 한 켤레를 맞바꾼 한 농민은 꾸러미에 사람의 코와 귀 여러 개가 감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적발을 피하기 위해 인육은 암시장에 팔릴 때 개고기와 섞이기도 했다.’(466쪽)
 
‘목록에 거론된 범인들 대다수는 시체식, 다시 말해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거나 땅에 묻힌 시신을 파내어 먹은 것이다. 76명의 희생자는 세 가지 범주, 즉 살해되어 먹힌 부류(12명), 사망한 뒤 먹힌 부류(16명), 시신이 파헤쳐져 먹힌 부류(48명)로 나뉜다.’(469쪽)
 
‘일부 역사가들은 진짜 사망자 수는 5000만~6000만명에 달할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기록 보관소들이 완전히 개방되기 전까지 우리가 참사의 규모를 온전히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수는 다수의 당 역사가들이 비공식적으로 논의하는 숫자들이다.”(486쪽)
등록일 : 2017-05-02 09:04   |  수정일 : 2017-05-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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