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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틴토레토의 워싱턴 외출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2019-06-13 09:29

▲ 틴토레토의 대표작 ‘은하수의 기원’.
유럽 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틴토레토 특별전이 워싱턴 국립미술관(www.nga.gov)에서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지난 3월 24일 오프닝 이후 7월 7일까지 세 달여 전시된다고 한다.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틴토레토가 유럽 밖, 그것도 미국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그동안 작은 규모의 틴토레토전은 있었지만, 전 세계에 산재한 56점의 틴토레토 대형 작품들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처음일 듯하다. 틴토레토는 이탈리아와 유럽 예술계의 큰 별이다. 유럽 예술사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어느 정도의 미술 매니아들에게 어울리는 화가다. 고전적 종교화로 유명한 틴토레토가 카우보이 프로테스탄트 나라의 간판 미술관에 등장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차로 피곤했지만,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필자는 워싱턴으로 오기 직전까지 베네치아에 머물렀다. 사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화가다. 베네치아 태생의 이 화가는 74년의 인생 대부분을 그림에 바쳤다. 작품 수가 방대하다. 특히 베네치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인 시투(In Situ·원래의 현장)’, 즉 500여년 전부터 걸려 있던 원래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다. 베네치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 중 하나가 바로 ‘인 시투’를 통한 예술 체험에 있다. 베네치아에 이어 워싱턴까지 와서 또다시 틴토레토를 만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비록 ‘인 시투’는 아니지만 워싱턴 특별전은 베네치아 현지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하나 더’ 갖고 있다. 바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베네치아 ‘인 시투’의 대부분은 성화(聖畵)들이다. 교회가 ‘인 시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상징이기도 한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은 극히 드물다. 성화 화가로서도 존경하지만, 관능과 환상으로 표현된 그리스 신화를 틴토레토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연출했는지 궁금했다.
   
예술은 미적 차원의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일고 있는 ‘나한상 특별전’ 열기에서 보듯, 옛 선인들이 남긴 돌에 새긴 웃음 하나만으로도 영혼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품과 격을 되찾아주는 치료제가 예술이다. 더불어 인류 역사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하는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예술이기도 하다. 조각·음악·무용을 접하면서 당시의 상황과 환경을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과 세계관을 과거의 예술세계를 통해 파악해낼 수 있다. 인터넷 디지털 화상이 아니라 반드시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고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 예술이다.
   
   
▲ ‘9명의 뮤즈’(왼쪽)와 틴토레토 자화상. photo 유민호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151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최전성기에 활동한 예술가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의 수준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오해하기 쉬운데,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엄밀한 의미에서 화가가 아니었다. 신(神)에서 독립된 인본주의 르네상스 예술가로 ‘뜬’ 인물이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세계적 작품들도 있지만 양적인 측면과 당대의 평가를 기준으로 할 경우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를 따라가기 어렵다. 틴토레토는 동시대 미술계 거인인 티치아노(Tiziano)나 베로네세(Veronese)와 더불어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틴토레토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은 1100년간 독립을 누린 공화국, 베네치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있었기에 틴토레토가 존재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베네치아가 누린 세기적 번영이 16세기 베네치아 예술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은 베네치아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최적의 본보기다. 베네치아의 정반대편에 선 중세형 도시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로나(Verona)다. 15살 로미오가 13살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한 베로나 2층집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 세계 청춘들이 아직도 찾는 명소로 통한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을 대하는 관점도 달라진다.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10대 순애보를 넘어선 전혀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천진난만한 10대 남녀가 보여준 ‘세기적 사랑’의 주변에 드리워진, 어둡고도 잔인한 ‘중세형 현실’에 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로미오는 몬태규(Monta -gue), 줄리엣은 캐풀렛(Capulet) 집안의 상속인이다. 둘 다 16세기 베로나를 대표하는 명문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두 집안은 철천지원수 관계로 그려진다. 목숨을 걸 정도로 서로를 증오하게 된 두 집안의 내력이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 증오를 이끌어낸 가장 큰 이유다. 16세기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의 대표주자는 교황이다. 속은 왕이나 권력자들이다. 신과 인간의 자유를 내건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돈과 권력을 둘러싼 ‘욕의 경쟁’에 불과하다.
   
소설 속에 자세히 드러나진 않지만, 추측건대 줄리엣이 속한 캐풀렛가는 성으로서의 교황, 로미오의 몬태규가는 속으로서의 왕을 지지하는 집안으로 판단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도시는 성과 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15세기 이전, 즉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까지만 해도 ‘교황=절대파워’로 통했다. 인본주의로 압축된 르네상스 정신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마침내 교황파가 지배하는 교황령, 왕당파가 지배하는 자유도시로 이분된다. 도시 전체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이어진다. 베로나는 그 같은 양자택일의 최전선 중 하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같은 어두운 이탈리아 흑역사의 산물이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 속, 즉 자유도시 체제가 가장 오래, 견고하게 유지된 지역이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1871년 통일 이전 이탈리아는 크게 3개 권역으로 나눠진다. 로마 바티칸과 베네치아, 그리고 나머지 공화국들이다. 베네치아는 성과 속의 다툼이 거의 없는 공화국이다. 베네치아는 북부 베네통 지역과 아드리아해·지중해·에게해 전체를 지배하는 육지·바다를 아우르는 당대 최강국이다. 감히 바티칸이 무시할 수 없는, 파워와 재력을 갖춘 특별자치령이다. 해상지배권과 관련해 서쪽의 제노바공화국이 베네치아에 대항하지만 결국 패한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바티칸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속의 최고 정치지도자인 도지(Dodge)도 가톨릭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 파워는 도지, 즉 속이다. 교황에게 기부는 할 수 있지만, 바티칸 이름으로 징세를 할 수 없는 자유도시가 베네치아였다. 따라서 베네치아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원수 명문가 스토리가 있을 수 없다.   
   
▲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틴토레토 특별전. photo 유민호

헤라 여신의 나체 담은 ‘은하수의 기원’
   
틴토레토는 베네치아가 낳은 풍요의 결과이자 성과 속을 절묘히 넘나든 베네치아 세계관의 상징에 해당한다. 성화도 넘치지만, 미의 여신 비너스로 가장한 벌거벗은 여인들의 모습도 그림의 주된 소재이자 테마들이다. 다빈치를 낳은 피렌체에서도 그리스 신화에 기초한 그림들이 넘쳐났지만, 베네치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교황의 지지기반이기는 하지만, 피렌체의 경제력은 베네치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돈=예술’은 21세기만이 아닌, 동서고금 전부에 통용될 수 있다. 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핏빛 메시지에 골몰하지만 오늘은 비너스와 아도니스 사이의 ‘낭만적 불륜’에 주목한다. 바로 틴토레토를 포함한 16세기 베네치아 예술계의 일상적 풍경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21세기 뉴욕에 비견될 만한 전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다. 유화용 그림 재료인 최고급 피그먼트(Pigment)가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베네치아 예술가들이 최대 수요자인 것은 당연하다. 선명한 색상이란 측면에서 볼 때 베네치아 그림이 전 세계 수위에 서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워싱턴 틴토레토 특별전은 예상과 달리 인산인해다. 백인이 대부분이지만, 10분 만에 관람을 끝내는 중국인 관광객도 넘쳐난다. 틴토레토 특별전은 민주주의 맏형, 미국의 진가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아무런 제약 없이 특별전에서의 사진 촬영이 100% 허용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만만한 20대 틴토레토 자화상이 눈에 띈다. 틴토레토는 무려 21명 남매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염색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도와 일하다가 15세부터 당대 최고의 예술가인 티치아노 공방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과 10일 뒤 쫓겨난다. 틴토레토의 그림 실력이 출중해서 퇴출당했다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티치아노의 정제되지 못한 야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명 대형제를 거느린 맏형으로서의 관록이 티치아노의 심기를 거슬렀을지 모르겠다.
   
틴토레토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은하수의 기원(The Origin of the Milky Way)’이란 작품이다. 은하수는 영어로 ‘우유 길(Milky Way)’이다. 우유가 퍼져 생긴 별들이 은하수란 의미다. 그림을 볼 때 화가 인생을 통틀어 전성기가 언제였는지, 몇 살 때 어디에서 그렸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체력과 시력, 나아가 재력도 약화된다. 더불어 그림의 수준도 떨어진다. 필자의 기준이지만 대략 50대가 최전성기 같다. ‘은하수의 기원’은 틴토레토가 50대 중반에 그린, 가로 148㎝ 세로 165㎝ 크기의 대작이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전신 나체로 담대하게 묘사돼 있다. 막 태어난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젖을 빨아먹으려 하자 뿌리치는 모습이다. 제우스가 몰래 불륜의 산물인 헤라클레스를 헤라에게 맡기려다 벌어진, 돌발적 상황이다. 헤라의 젖이 사방팔방 퍼져나가면서 은하수가 됐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 스토리다. 대담한 포즈와 더불어 화려한 색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피렌체발 르네상스 그림에서 보기 어려운, 입체적 구도도 인상 깊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소장품도 전시
   
   영국 퀸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인소장 작품으로 유명한 ‘9명의 뮤즈(The Nine Muses)’는 가치라는 측면과 함께 전시 기회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9명의 나체 여인으로 꽉 메워진 그림으로 ‘은하수의 기원’보다 거의 두 배나 큰, 가로 310㎝ 세로 206㎝에 달하는 초대작이다. 이 역시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뮤즈는 예술의 신 아폴로를 호위하는 예술군단이다. 시·노래·춤·악기를 통해 아폴로를 지지하는 젊은 여성들로, 원래 제우스의 불륜에 의해 탄생한 딸들이기도 하다. 아폴로 역시, 제우스와 레토(Leto) 사이에 불륜의 결과임을 고려할 경우 아폴로와 9명의 뮤즈는 배다른 어머니를 둔 남매 관계라 볼 수 있다. 가운데 태양빛을 통해 아폴로 신화를 암시하고 있지만, 관람객 대부분의 시선은 여성들의 나신에 집중할 듯하다. 신체 일부를 가린 뮤즈도 있지만, 21세기에도 삭제될 만한 대담한 포즈의 여성 누드화가 주류다. 가슴은 기본이고 둔부와 허리 아랫부분까지 드러낸 작품이다. 오직 자유도시, 베네치아에서만 가능한 그림이다.
   
특별전 마지막에 걸린 그림은 70대 틴토레토의 만년 자화상이다. 깊이 파인 눈이 투명한 영혼을 느끼게 만드는 초상화다. 20대의 야심 찬 자화상과 달리, 인생 전체를 꿰뚫는 혜안이 담겨 있는 듯하다. 틴토레토는 자신의 스튜디오 앞에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의 방향을 글로 표현해 걸어뒀다.
   
‘미켈란젤로의 데생과 티치아노의 색상(Il disegno di Michelangelo ed il colorito di Tiziano)’이 그것이다. 근육을 강조한 철저한 데생을 통해 그림의 윤곽을 잡은 뒤, 베네치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담대한 피그먼트를 사용한 그림이 틴토레토 그림 세계의 특징이자 전부다. 인류 최고봉의 미술 세계가 어떤 것인지 답을 제공해줄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틴토레토다.
등록일 : 2019-06-13 09:29   |  수정일 : 2019-06-1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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