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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시인, 해고 없는 압축공장 근로자

로린 니데커의 ‘시인의 일’

⊙ ‘시인은 시대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강도를 쫓는 자’(정현종)
⊙ ‘尹東柱의 혈서를, 에즈라 파운드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었노라’(박남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19-04-10 09:56

시인 로린 니데커.
  
  시인의 일
  로린 니데커
 
  할아버지께서
  내게 권하셨다:
  장사를 배우거라
 
  나는 배웠다
  책상에 앉는 법을
  그리고 압축하는 일을
 
  해고가 없다
  이곳으로부터
  압축공장으로부터
 
 
  Poet’s work
  Lorine Niedecker
 
  Grandfather
  advised me:
  Learn a trade
 
  I learned
  to sit at desk
  and condense
 
  No layoff
  from this
  condensery
 
 
세상의 모든 시인은 꿈꾸는 존재다. 꿈꾸는 일은 별을 헤는 일일지 모르며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과 닮아 있다.
미국 시인 로린 니데커(Lorine Niedecker·1903~1970)는 작은 오두막, 범람하는 강 옆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위스콘신주 포트앳킨슨(Fort Atkinson) 근처의 블랙호크섬(Blackhawk Island)이 고향이다.
  
로린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가난했으며 작은 일(small jobs)을 하며 살았다. 지역 라디오방송국 작가를 하다가 시력이 나빠져 포트앳킨슨의 병원에서 청소 일을 했다. 이혼 후 옛집(블랙호크)으로 돌아왔는데, 그때가 1968년이니 죽기 2년 전이었다.
 
로린 니데커가 살던 미국 위스콘신주 포트앳킨슨의 한 오두막집.
이웃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시를 쓰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 강렬하고 격렬한 시(fierce poetry)를 썼다. 시 ‘시인의 일’에서처럼 이미지의 단순함은 시 정신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고 할까. 글감은 대개 블랙호크섬에서 살며 영향받은 것이었는데 일상에서 얻어진 경험, 예컨대 자신과 가족, 이웃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부자가 되기 바라는 할아버지의 권유에서 시작되는 ‘시인의 일’은 시작(詩作)에 관한 유머러스한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장사를 배우라”고 권하셨지만, 시인은 장사 대신 책상에 앉아 압축하는 일을 배웠다. 로린은 시인이 일하는 공장을 ‘압축공장’이라 명명한다. 시의 생명은 압축미이다. 이 공장에는 해고도 정년도 없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백지 위에서 언어를 조련하는 시인은 ‘종이 왕’일지 모른다.
  
순수시대, 질풍노도시대
 
시인 박남철.
해체와 패러디의 시인인 고(故) 박남철(朴南喆·1953~2014) 시인은 한국의 어느 시인보다 거칠게 저항하며 살았다. 그는 좌우(左右) 문단에서 버림받았으나 그의 시만은 버림받지 않았다.
  
‘시인연습’은 문청(文靑) 시절을 회고하는 시다. 박남철은 바바리 깃은 한껏 세워 올리고 머리는 봉두난발, 세수도 안 한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다녔다. 그 모습이 세상을 등진 시인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일까. 시인은 세상과 불목(不睦)한 존재니까.
  
그런데 그런 객기를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그저 낙오자, 부적응자로 볼 뿐이었다. 시인은 허탈하게 “태산 명동에 서일필이더라, ㅍㅍㅍ”라고 자조하지만 돌이켜보면 ‘굉장히 열심히 시인’이고자 했던 시절이다. 어쩌면 그때가 ‘순수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나도 한때는 詩人이고자 했었노라. ㅎㅎㅎ
  굉장히 열심히 세수도 않고 다니고
  때묻은 바바리 코우트의 깃을 세워 올리면서
  봉두난발한 머리카락의 비듬을 자랑했거니,
  이미 내 등이 꺼꾸정하게 굽은 뒤에
  형사 콜롬보가 기막힌 포옴으로 수입되었었노라
  무엇인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한시라도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먼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만을 바라보는
  내 순수 고독의 시선하며
  그것을 담은 詩展 팜플렛을, 오호호
  저 무지 몽매한 중생들에게
  노나 주었었노라
 
  항상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우주와 평화를 걱정하면서
  尹東柱의 혈서를, 에즈라 파운드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었노라
  어디 나도 한번 머엇있게 살아 볼려고
  오른손을 번쩍 번쩍 치켜들면서
  인생이란 뭐 다 그런 거라고, 아무 때고 간에
  떠나고 싶을 때 혹 떠날 수 있는 거라고
  목에 힘 꽉 주어 엄격하게 단언하면서
  귀족처럼 우아하게 酒店 할미집을
  들락거렸었노라
 
  때로는
  끓어오르는 詩興을 가누지 못하여
  별로 인적이 뜸하지 않은 오솔길을
  홀로 사색에 잠겨 비틀거리곤 했었노라
  납작하니 짓밟힌 꽁초를 주어 피우면서
  李小龍이처럼 절묘한 비명을 질러댔었노라.
  아카! 아카카카!
 
  아아, 근데 누가 뭐 신경이나 좀 써 줘야지
  태산 明洞에 서일필이더라, ㅍㅍㅍ
  좌우지간 나도 한때는 굉장히 열심히
  詩人이고자 했었노라
 
  - 박남철의 ‘시인연습’ 전문

  
정현종과 최승자의 詩人論
  
사실보다 관념, 현상보다 이미지에 충실한 시를 쓴 시인 정현종(鄭玄宗·81)의 ‘시인’은 사실적인 박남철의 시와는 다른, 그러나 유쾌한 시다.
  
그에게 시인은 ‘일기장’ 같은 존재다. 사랑한 일들, 망쳐버린 일들로 가득한 공간이 일기장이다. 혹, 꿈을 실어다 파는 무역업자인 시인은 무일푼이다. 가진 재산이란 ‘수상한’ 피와 광기뿐. 괴로워하는 일이 본업인 그에게 의사와 약은 멀리할 수밖에 없다. 또 밤새워 쓴 시를 심판하는 독자를 숙명적으로 미워한다.
  
세상의 죄를 짊어진 예수의 십자가를 ‘자(尺)’로 쓰거나 죽음에 빠져들다가도 때로 헛된 기쁨에 빠지기도 하는 무모한 존재…. 정현종은 마지막 행에 시인의 숙명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시대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강도를 쫓아 밤새도록 달리고 있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 《고통의 축제》 초판.
  아직도 日記帳 같은 거
  학원일기나 희망일기 같은 걸
  사랑하며 망쳐 놓으며
  心臟은 없고 바람뿐이며
  財産은 수상한 피와 狂氣뿐이며
  本能에 생각을 싣고
  感覺에 精神을 싣고
  꿈을 積載하는 貿易이 있으며
  醫師와 藥을 가장 미워하고
  讀者를 가장 미워하고
  十字架를 자(尺)로 사용하다 들키고
  죽음이 던지는 미끼에 매어 달려 쩔쩔매고
  망칙한 기쁨에 빠져서 부르짖고
  事物을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면서
  거듭 죽고
  즐거울 때까지 즐거워하고
  슬플 때까지 슬퍼 하고
  無謀하기도 하여라
  모든 즐거움을 完成하려 하고
  모든 슬픔을 완성하려 하고
 
  時代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强盜를 쫓아 밤새도록 달리고 있다.
 
  - 정현종의 ‘시인’ 전문

  
시인에게 흰 종이는 전쟁터다. 무기는 연필 한 자루지만 세상의 거대한 존재들과 대결한다. 피가 튀고 살점이 뜯기지는 않으나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다. 시인은 언제나 백지 위에서 몸부림친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 꼬박 밤을 새운다. 그러나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시인은 언제나 패배자다. 이튿날 밤에도 백지와 싸운다. 몇 날 며칠을 싸워 나온 몇 줄의 시에 만족하는 시인은 없다.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년 간)에 실린 시인 최승자의 ‘나의 시(詩)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에는 그런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시인은 백지 위에 큰 걸음을 남기고 싶고, 뛰고 싶다. 언어의 날개를 달아 훨훨 날고 싶다. 때론 깨부수고 울부짖고 까무러치고 싶다. 그리하여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 최승자의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전문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의 맨 뒷장에는 자신만의 시인론이 적혀 있다. 그에게 시인은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이가 시인이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라고 규정한다.
  
조용미와 허수경의 詩人論 ‘숲속의 바스락거리는 염소’
  
시인 조용미의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2007년 간)에는 유독 지명(地名)이 많이 등장한다. 
  
한반도 남쪽 전 지역을 망라하는 지명들은 마을 이름은 물론이고 산이나 개천, 절과 서원, 그리고 수많은 섬 이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인의 유랑은 지리부도를 펼쳐보는 것과 같다”(평론가 남진우)고 말할 정도다. 누가 뭐래도 ‘유랑’은 시인의 본업 중 하나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기는 궤적에 마음의 파문을 담아 언어에다 싣는다.
  
시집에 실린 ‘바람의 행로’는 폭풍이 지나는 궤적이다.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고통의 궤적에 닿아 있다. 한바탕 거친 바람이 지나면 나무는 쓰러지고 만다. 거센 폭풍이 몰아쳐 나무가 사원(寺院)의 지붕 위에 박힌 모습은 절망적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절망이 담겨 있다. 어쩌면 시인은 자연 앞에 가장 먼저 절망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폭풍은 끝이 아니다. 폭풍이 지나면 해가 뜬다. 부러진 나뭇잎은 곧 마를 테지만 ‘염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숲속에서 바스락거릴 것이다. 시인은 마치 숲속의 바스락거리는 염소처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존재다.
 
조용미 시인의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폭풍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을 못 이기고 쓰러져 누운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나무들이 증명하는 바람의 행로
  심지가 곧은 것들은
  저렇게 生을 다해 단 한 번
  꺾어지는 것
  사원을 뒤덮어 폐허를 구축한 케이폭나무는
  폐허의 뒤에도 살아남으려는 욕망으로
  뿌리의 긴 발톱을
  사원의 지붕 위에 박아넣고 있었다(중략)
 
  폭풍이 지나갔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잎들이 말라가고 있다
  바스락바스락 숲속에서
  염소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있다
 
  - 조용미의 ‘바람의 행로’ 일부

  
2005년에 펴낸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 실린 ‘《검은 소 도시 여행 길잡이》라는 책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산문시는 다양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실제 이 시에 등장하는 책이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검은 소 도시 여행 길잡이》라는 책이, 여행서가 아니라 시집(詩集)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세상의 모든 시집은 대개가 안 팔린다. 비매품이 운명이다. 다만 시인은 독자에게 “값을 깎지 말라”고 당부할 뿐이다.
  
시집의 무게는 가볍지만, 행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쩌면 세상 처녀지로 가득할지 모른다. 시집에는 시인의 행로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 행로는, 검은 소가 희게 음각된 강을 따라가는 구도(求道)의 길일지 모른다.
  
또 모든 시에는 어느 시절 불안했던 한 영혼이 그 불안을 눌러 잘 접어둔 자리가 있다. 그런 시편들을 묶은 시집은 삶의 긴 여행서와 닮아 있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200권 한정판, 비매품, 양장본 출판 연도 2001년(기원전인지 기원후인지는 표기되어 있지 않음).
   
- 가로 세로 12 곱하기 21센티미터, 302쪽, 지도 3장, 그리고 그림 13장, 책 무게는 아주 가벼움.
   
- 푸른빛의 책 앞표지에는 검은 소 한 마리, 도드라지게 양각으로 박힌 검은 소, 검은 소가 희게 음각된 강을 따라서 어디론가 가고 있음.
  
- 책 뒤표지에는 다시 음각으로 흐르는 흰 강, 그 강을 따라서 걸어가는 양각으로 박힌 여인과 아이, 아이의 머리는 검은 소의 머리임.
   
- 속표지에는 검은 쇠머리가 중간에 박혀 있음. 다시 책장을 넘기면 작가의 헌정, ‘나의 아내에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먼지 냄새가 남. 그렇다고 그 먼지 냄새가 딱히 책의 나이를 누설하지는 않음. 그 책을 손에 들고 장을 넘기는 누구도 책의 나이를 묻지 않게 됨. 왜 그런지는 설명되지 않음. 다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시절 불안했던 한 영혼이 그 불안을 눌러 잘 접어 둔 자리에 자기를 앉혀 썼다는 느낌을 줌. 왜 그런지는 설명되지 않음. 책장 가운데 커피 자국도 있음. 누군가의 담뱃재에 탄 자리도 있음. 이 책의 옛 주인이 누구인지, 강가에 늘어선 고서점상의 나이 든 사내는 모름. 다만 값을 깎지 말라는 말만을 그에게 들었음. 그 고서점이 있는 강가의 한 귀퉁이에 있는 가배점에서 작은 과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앉아 있으면, 마치 그 강이, 이 책의 표지에 음각으로 박힌 그 강인 것처럼 보임. 이 세계의 어느 강가에 앉아 어떤 따뜻한 음료수와 함께 있어도, 그 강이 바로 음각의 강, 이라 여겨질 것 같기도 함.
   
- 사용된 저자의 이름은 가명임. 작가의 소개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음. 다만, 부치는 글을 읽으면 작가를 얼마간 알 수 있음.
  
- 허수경의 ‘《검은 소 도시 여행 길잡이》라는 책에 관하여’ 전문
등록일 : 2019-04-10 09:56   |  수정일 : 2019-04-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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