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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4월 아지랑이 피는 호미곶 청보리밭의 ‘검은 갈매기’

수필〈보리〉의 작가 한흑구 선생

⊙ “평생 단 한 편의 親日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
⊙ 美軍政 통역관 하다 포항에 정착(1948년)… 포항인에게 문화예술의 맛을 전해
⊙ 아버지는 애국지사 한승곤 목사… 국내 최초 교회 주일학교·한글 학습서 간행
⊙ “寡作이었으나 수필 〈보리〉 〈나무〉 〈닭울음〉 등은 인생 예지와 예술적인 향기가 조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19-04-08 09:56

봄이면 생각나는 글이 있다. 한흑구(韓黑鷗·1909~1979)의 수필 〈보리〉다. 1955년 《동아일보》에 발표됐으니, 폐허가 된 산하(山下)의 희망가와 같은 글이었다. 〈보리〉는 중등 국어 교과서에 실려 40대 이상 세대들에겐 친숙한 작품이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한흑구의 수필 〈보리〉 중에서
수필가 한흑구의 앉은뱅이 책상 앞에 선 장남 한동웅씨(오른쪽)와 문단후배 김일광 동화작가.
 
평양 출신의 그가 6·25 직전 정착한 곳이 포항이었다. 〈보리〉를 쓸 무렵, 당시만 해도 조그마한 어항이던 포항은 주변이 온통 보리밭 물결이었다고 한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해마다 4월이면 청보리밭 천지였다.
 
본명은 한세광(韓世光). 1909년생이니 생존했다면 올해 110세가 된다. 1929년(20세) 다니던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도미(渡美), 시카고 노스파크대학 영문학과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34년 ‘모친 위독’이란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식민지 청년의 눈에 비친 20세기 미국의 신문명은 충격이었으리라.

젊은 시절에는 시와 소설, 평론을 왕성하게 발표했고, 미국문학 번역에도 활발했다. 광복 후 서울 미(美) 군정청에서 근무하다 포항에 정착한 것은 1948년.
 
타계할 때까지 포항에 은둔하며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친일(親日)문학을 연구한 문학평론가 임종국은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고 한흑구를 헌사(獻詞)했다.
 
그러나 평생 남긴 저서는 생전 포항의 후학들이 주선하여 펴낸 수필집 《동해산문》(1971)과 《인생산문》(1974) 등 단 두 권이 전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한흑구 문학선집 Ⅰ, Ⅱ》(민충환 엮음, 2009)이 묶였고, 시만 따로 모은 《한흑구 시선》(2014)이 간행됐다.
  
기자는 한흑구의 문학적 자취를 더듬으려 지난 2월 중순 포항을 찾았다. 〈보리〉를 쓰기 위해 거닐었다는, 청보리가 바람에 춤을 추는 호미곶과 ‘흑구문학관’에서 장남 동웅(韓東雄·80)씨와 한흑구에게 문학을 배운 김일광(金日光·66·동화작가)씨를 만났다.
  
아버지 한승곤 목사 이야기
 
1951년 포항여고 교정에서 한흑구와 아내 방정분 여사.
한흑구는 아버지 한승곤(韓承坤·1881~1947)과 어머니 박승복(朴承福) 사이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한승곤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애국지사다. 1881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찍이 예수교 장로회에 들어가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를 지냈다. 일제에 저항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쫓겨가듯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고 전한다. 1919년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興士團) 본부의 의사장(議事長)을 맡아 활약했다.
  
아들 흑구가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한흑구의 장남 동웅씨의 말이다.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는 4·19 당시 의거에 앞장섰으나 낙향, 아버지와 함께 포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지고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아버지 한흑구는 2대 독자셨는데 위로 누나 두 분(韓淑姬·韓貞姬), 아래로 여동생(韓德姬)이 계셨어요. 이화여전을 다니던 ‘덕희 고모’가 학교 동기동창을 아버지에게 소개했는데 그분이 어머니 방정분(邦貞分·1913~1989) 여사입니다.
  
어머니는 황해도 딸 부잣집 9번째 딸이었어요. 당시 어느 신문에 ‘평양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아까운 재원을 잃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만큼 당대 유명한 분이셨어요.”
  
《동아일보》 1934년 8월21일자 ‘방현유치원 동정(同情)음악회 성황리에 종막(終幕)’ 기사에 ‘16~17 양일간 경성 이화전문음악과 재학 중인 방정분 양 등이 참여한 음악회가 대성황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 선생의 아버지 한승곤 목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이번에는 한흑구에게 문학을 배운 김일광 작가의 말이다.
  
“한승곤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와 경창문교회, 안주교회에서 목회(牧會)를 하셨죠. 이른바 105인회 사건 때 일경(日警)에 의해 초주검이 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를 당시 한승곤 신학생이 모셔왔는데, 나중 그 교회 초대 한인목사가 됩니다. 산정현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학교, 주일학교를 시작한 교회로 기억되고 있어요.”
  
105인회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 등으로도 불리며 제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명칭이 유래한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거짓으로 암살을 날조한 사건이다.(《두산백과》 참조)
  
“할아버지(한승곤)는 한글에 관심이 많아 국문 학습서인 《국문첩경(國文捷徑)》을 펴내셨어요. 이 책은 할아버지가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1908년 간행됐는데 간단한 단어와 문장, 긴 문장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쉽게 한글을 공부할 수 있게 쓰였다고 합니다. 1937년에 나온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보다 훨씬 앞선 한글서라는 평가도 나옵니다.”(한동웅)
  
“어린이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히 우리말 교육에 관심을 갖지 않았겠어요? 개화기 당시 교회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학교 역할을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죠. 바로 한 목사가 교회에서 한글을 가르친 선각자인 셈이지요.”(김일광)
  
평양 출신 한흑구가 포항에 정착한 사연
포항 호미곶 주변의 4월 청보리밭 모습이다. 사진=안성용 제공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한흑구 선생은 재북(在北) 해외유학생 대표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을 따르며 북에서 활동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고당의 권유로 남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일광 작가의 말이다.
  
“당시 한흑구는 청년들과 함께 고당을 찾아가 서울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고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한 군은 서울로 가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게나. 나는 동포들과 더불어 여기에 남겠네.’
  
한흑구는 고당이 마련해준 트럭을 타고 황해도 해주를 거쳐 서울로 왔고,미 군정청에 발탁되어 당시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있던 미군 통역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통역관 세도(勢道)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서울시장 행정보좌역이었던 한흑구의 사인 하나에 엄청난 이권이 오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불과 몇 달을 근무하고 미련 없이 떠난 것이다.
  
김 작가의 계속된 말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흑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청탁자들이 줄을 서는데 도둑놈 소리 듣기 전에 서둘러 물러났다’고요. 부정부패의 유혹에 넌덜머리가 난 모양입니다.”
 
동료 문인들과 함께 경주 고적지를 돌아보고 있다. 사진 오른쪽이 한흑구, 왼쪽 끝이 소설가 김동리다.
한흑구가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1948년. 왜 그는 서울을 버리고 당시만 해도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포항을 찾았을까. 장남 동웅씨의 말이다.
  
“아버지는 하지 중앙의 군정(軍政)에서 통역관으로 자리 잡고 서울 필동에 있던 경성제대 교수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으셨지요. 그러고 평양에 있던 당신 식솔들을 데려오셨죠. 수입이 좋던 아버지께서는 서울 명동 일대에 드나들며 가난한 문우들에게 거의 매일 한턱을 내면서 교류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시 포항에 내려간 까닭은, 당시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께서 마침 고적지를 순례하는 작가들과 함께 경주에 가셨다가 일행과 잠깐 떨어져 포항에 들른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해요.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가 폐결핵(당시엔 난치병)에는 바닷가의 맑은 공기와 신선한 굴을 먹으며 요양하는 것이 좋다는 권유를 떠올리셨던 모양이고, 그때의 포항 날씨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지요.”
  
이번에는 차남 동명(韓東明·78)씨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 한흑구가 교수로 재직하던 포항수산초급대(현 포항대)를 졸업했으며,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국비 4기생)를 거쳐 항해사가 되었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평생 바다를 누볐으며, 지금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다.
  
“평양 식솔을 서울에 불러들인 다음 아버지는 거의 한 달 동안 서해→남해→동해를 다니셨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포항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12시간 가까이 서울~포항 간 완행열차를 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말씀이 ‘서해는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개펄도 많다. 그러나 포항 송도는 모래가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보다 좋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전쟁이 나면 바다 근처에 살아야 피란 갈 수 있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미국서 공부해 공산주의를 싫어하셨는데 향후 김일성의 남침을 예견하셨어요. 시국에 민감한 안목을 지녔던 셈이지요.”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
 
한흑구의 유택인 포항 남빈동 530번지에서 찍은 가족사진. 장남 한동웅씨가 찍었다. 앉은 이가 한흑구·방정분 내외. 방 여사 옆이 고명딸 한동숙씨. 뒷줄 왼쪽 끝이 차남 한동명, 오른쪽 끝이 사남 한동화.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는 생계를 위해 포항 K3(당시 K1은 경남 진해, K2는 대구 동촌에 있었다)부대에 미군 통역관으로 취직했다. 장남 동웅씨의 말이다.
  
“미군으로선 통역관이자 한국인 노무 책임자로 아버지가 꼭 필요했을 겁니다.
  
왜냐면 6·25 당시 포항·영천 전투가 치열했는데 ‘노근리 학살’처럼 오폭(誤爆)사건이 많이 일어났어요. 예컨대 인민군이 고지를 점령하면 미군이 폭격하는데, 폭격 전에 국군이 고지를 재점령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아군과 미군의 대화(통역)가 늦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어요. 미군으로선 아버지가 꼭 필요했지요.
  
아버지는 정말 특별대우를 받으셨어요. 정문 몸수색은 아예 예외였고, 무엇이든 들고나와도 그들은 믿고 묵인하였어요.”
  
당시 한흑구의 집(포항 남빈동 530번지)에는 영문소설(주로 포켓북 형태), 시집, 잡지 등이 무려 1000여 권이나 있었다고 한다. 계속된 동웅씨의 말이다.
  
“잘 해득(解得)은 못 했지만 윌리엄 사로얀, 존 스타인벡, 윌리엄 포크너, 에드거 앨런 포, 화이트 헤드 등 미국 작가와 철학자들의 이름을 알게 됐어요. 영화잡지를 통해 ‘글래머러스(glamorous)’하고 ‘엘리건트(elegant)’한 미국 여배우들의 이름을 200명 이상 스펠링 하나 안 틀리고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국 여배우의 미모에 반해 같은 영화를 5번이나 본 적도 있고요.”
  
동웅씨는 “제가 영어교사를 평생의 생계수단으로 삼게 된 것도 그런 문화적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흑구는 자식들에게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하며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를 강조했다고 한다.
  
“늘 손에 《타임》이나 《뉴스위크》를 들고 다시셨던 아버지는 당시 선각자이셨고, 나름의 안목으로 인생을 음미하며 ‘평범한 삶, 고귀한 생각’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부자(父子)는 ‘두주불사’였는데 한번은 과음하신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어 ‘술을 왜 그렇게 자시냐’고 대드니, ‘네가 마시는 기분과 똑같은 기분으로 먹는다’고 하셔서 말문이 막힌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술 한잔 잘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포항 문화의 격을 높인 분”
1957년 무렵 포항수산대(현 포항대) 교수 시절의 한흑구 선생. 후포 앞바다에서 실습선을 타고 있다.
한흑구는 포항에 정착한 뒤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으나 서울의 ‘중앙문단’과 교류는 없었다. 그러나 중앙지와 지방지, 잡지 등에 꾸준히 작품이 실렸는데 장르는 주로 수필이었다. 김일광 작가의 말이다.
  
“선생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했지만, 일가를 이룬 것은 역시 수필이었습니다. 과작(寡作)이었으나 〈보리〉 〈나무〉 〈닭울음〉 〈노목을 우러러보며〉 등의 작품은 서정성이 강하고 인생의 예지와 예술적인 향기가 조화를 이룬 격조 높은 작품이죠.
  
그분의 수필은 차라리 시에 가깝습니다. 수필을 마치 산문시처럼 쓰셨으니까요.”
  
한흑구 선생의 첫 수필집 《동해산문》(1971년 간)의 머리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 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짧은 글이지만 한흑구의 삶이 연상되는 구절이다. 당시 《동해산문》의 발간을 주선한 미당(未堂 徐廷柱) 선생은 책 발문을 통해 옛 문우(文友)를 이렇게 평가했다.
  
‘까다롭다면 무척 까다로운 이 필자, 은둔자라면 또 자신 종생의 귀양살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이 묘한 은둔의 사색가, 인간을 되도록 멀찍한 거리에서 오래 두고 성찰하고 사랑하기에 초점을 모아온 이 이해자….’
  
한흑구는 포항에, 포항문단에, 그리고 포항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60~70년대 중앙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가 한흑구였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포항 문화의 격을 높인 분이죠. 포항인에게 문화예술의 맛을 전해준 분입니다. 한흑구를 정점으로 향토문화단체인 ‘흐름회’가 결성돼 지역 문화운동을 주도했어요.
  
선생은 누구를 흉보거나 누구와 싸운 적이 없었어요. 유신(維新) 시절, 후배 문인이 《이 참혹한 땅에서》라는 프린트판 시집을 펴냈을 때 다른 문인들이 ‘제목이 왜 그렇노’라며 나무랐지만, 선생만은 ‘왜 제목 탓을 하는가. 세상을 탓해야지…’라며 다독이셨죠. 올해로 40주기지만 포항 문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김일광)
  
‘검은 갈매기’와 바다의 운명
 
한흑구의 차남 한동명씨. 원양어선 선장으로 평생 배를 탔다.
한흑구가 포항에 정착할 무렵만 해도 인구 5만명의 포항은 문학의 변방이자 불모지였다.
  
“아버지는 중앙문단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으셨어요. 문학 불모지인 포항에서 의미를 찾으셨어요. 누구보다 먼저 미국 문명과 문물을 경험했으나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으셨죠. 서정주(徐廷柱·1915~2000), 김동리(金東里·1913~1995), 이원수(李元壽·1911~1981), 박목월(朴木月·1916~1978) 같은 중앙문단에 알려진 분들이 낯선 포항을 찾은 것도 오직 한 사람, 한흑구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말씀드릴 수 있어요.”(한동웅)
  
필명인 흑구(黑鷗)는 ‘검은 갈매기’라는 뜻이다. 1929년 미국으로 떠날 때 태평양 해상을 외롭게 나는 검은 갈매기를 보고, 자신의 신세와 비슷하게 느껴져 비유해 지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포항을 택한 것은 어쩌면 바다와의 운명 때문인지 모른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평생 ‘바닷사람’이 된 차남 동명씨의 말이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동명아! 바다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얘기가 다 네게 전해지겠지…’라고 적혀 있었죠.
  
처음 제가 뱃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남자는 모험심이 필요하다. 남이 안 해본 것도 해보라’며 격려하셨어요. 그 덕에 평생을 바다에서 보내는 바람에 아버지 영면(永眠)을 볼 수 없었으니 불효막심하죠.”
  
‘젊은 한흑구’는 시를 많이 썼지만 10여 편에 이르는 소설도 남겼다. 소설 〈어떤 젊은 예술가〉는 미국에서 함께 고학(苦學)한 지휘자 안익태(安益泰·1906~1965)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미국을 무대로 한 소설 〈이국의 비가〉 〈황혼의 비가〉 등이 있고, 국내 현실을 다룬 〈금비녀〉 〈4형제〉 등도 있다.
  
“아버지는 포항에 정착한 뒤로 거의 수필만 쓰셨어요. 한번은 장르에 대한 갈증이 있으셨는지 대중소설을 쓰고 싶으셨나 봅니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인 김광주(金光洲·1910~1973) 선생과 친하셨는데 서울로 올라가 그분을 만났어요. 아버지 고민을 들은 김 선생이 ‘야! 너, 여자 팬티 벗길 수 있어? 대중소설은 그렇게 써야 돼’라고 하셨대요. 기겁하신 아버지는 ‘소설은 안 되겠다’고 단념하셨대요.”(한동웅)
  
“아버지께서 마거릿 미첼의 장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번역해 출간하려고 준비하셨어요. 그 번역 원고 뭉치를 007가방 같은 것에 넣어 다니셨는데,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캄캄한 터널을 지났다고 합니다. 요즘은 터널을 지날 때 객차 안에 불이 켜지지만, 그땐 칠흑 같을 때였죠.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가자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졌대요. 아버지는 잃어버린 원고 뭉치를 두고두고 아쉬워하셨어요.”(한동명)
  
이화여전 성악과 출신의 아내 邦貞分
  
한흑구는 여동생(한덕희)의 이화여전 성악과 동기동창인 방정분과 1937년 결혼했다. 스물여덟 되던 해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아내 방정분은 포항 지역 중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교감으로 정년을 마쳤다.
  
또 장남 한동웅은 동지고 교장으로 정년퇴직했고, 차남 한동명은 원양어선 선장으로 아버지처럼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았다. 삼남 한동현은 일찍 사망했고, 사남 한동화는 중등학교 교사와 공인중개사로 일했다. 포항여고 시절 메이퀸이었다는 막내 한동숙(2016년 작고)은 서라벌예대 음악과를 나와 피아노를 쳤다고 전한다. 차남 동명씨의 말이다.
  
“어머니는 동생(한동현)이 어린 나이에 죽자 슬픔을 잊으려 교편을 잡으셨죠. 처음엔 유치원 교사를 하셨는데, 사흘 만에 그만두셨어요. 죽은 아이 생각이 났대요. 그래서 포항여중에 원서를 냈는데 이화여전 성악과 출신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밖에요. 이후 포항 지역 공립학교를 오가며 많은 제자를 길렀습니다.”
  
장남 동웅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 방정분과 홍난파
 
포항 북구 호미곶에 위치한 흑구문학관 전경이다.
“어머니는 포항 남빈동에서 포항여고까지 20리(7.85km)를 매일 빠른 걸음으로 출퇴근하셨죠. 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시며 ‘다리에 꿀물이 나도록 걸었다’고 하셨어요.
  
이런 기억도 납니다. 어머니가 포항제일교회 합창단을 만드셨는데, 포항에선 볼 수 없던 성악 전공자가 만든 합창단이니 대단했지요.
  
한번은 아버지의 권유로 미군 장병들에게 위문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연을 마친 여학생들에게 생전 접하지 못하던 음식은 물론이고, 수고의 대가로 현찰을 어머니 손에 쥐여주어 당황했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자본주의에 익숙한 미국 사람들은 격식 있게 돈을 취급하지 않는다’ 하셨죠.”
  
포항중에서 방정분에게 음악을 배운 김일광 작가의 말이다.
  
“제가 노래를 잘한다고 선생님이 칭찬하신 기억이 납니다. 수업이 지루하면 가끔 옛 얘기도 하셨는데 ‘홍난파 선생에게 배우고 음악활동을 같이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책에서나 보던 홍난파를 말씀하시니 대단하잖아요. 귀를 세워 선생님 말씀을 듣던 기억이 납니다.”
  
― 한흑구의 문학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포항 지역에서 활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몇 해 전 민충환 교수(부천대)의 열정으로 《한흑구 문학선집》이 548쪽, 432쪽 분량으로 간행되고 10년 전 ‘흑구문학상’이 제정되었죠. 새로 찾은 당신의 작품이 최근 지역 문학지에 실리기도 했고요.
  
몇몇 뜻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포항 보경사(寶鏡寺)에 있는 ‘한흑구 문학비’와 호미곶에 위치한 ‘흑구문학관’을 시내로 이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요즘 들어 아버지의 문학이 재평가되고 당신을 기리는 분이 늘어나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발굴
 한흑구가 쓴 최초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三一節 10주년 기념해 미국서 쓴 시
 
흑구문학연구소 한명수 대표.
지금까지 최초의 한흑구 작품은 미국에 체류 중이던 1930년 6월 《우라키(The Rocky)》 4호에 발표한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시는 당시 미국 교포단체에서 발간하던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먼저 발표됐다. 게재 날짜는 1929년 5월2일자다.
  
흑구문학연구소 한명수(韓明水) 대표는 “이 시는 29년 3월 1일 아침에 쓴 것으로 한흑구가 미국으로 건너간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때”라며 “이로써 그의 데뷔 연도가 1929년이요, 데뷔 작품은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1929년에 쓴 다른 작품도 있지만 그 발표 시기가 이보다 늦거나 구체적인 일자를 알 수 없어요. 따라서 ‘그러한…’이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 중 가장 발표 시기가 빠른 작품이 됩니다.”
  
한흑구는 1929년 1월 평양과 서울, 부산, 요코하마를 거쳐 2월 4일 미국에 도착했다. 3연 40행으로 이뤄진 시 ‘그러한…’은 한흑구가 3·1절 10주년을 맞아 3·1절 아침에 쓴 시다. 한명수 대표는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화자(話者)가 처한 현실적 비감이 깔려 있다”며 “국권을 빼앗긴 조국의 현실과 고향에 어머니와 누이를 두고 멀리 미국으로 건너온 자신의 처지가 뒤섞여 슬픔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 ‘그러한…’의 전문이다.
 
미국 교포단체에서 발간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 1929년 5월2일자에 실린 한흑구의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1
  대동강 얼음이 풀리면
  뱃노래 포구에 어지럽고
  뒷마을 거라지 떼-
  한숨에 젖어 빨래하는 내 고향
  아!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강물 위에 웃음 띄워 또 노래 띄워
  청춘의 귀한 생명 불타는 노래여!
  능라도 실버들 땅에서 높아지고
  반월도 흰 모래 위에 조약돌 드러나는
  아! 빛 낡은 내 고향!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진달래 꽃향내 모란봉 위에 사라졌으나
  꽃 구경꾼의 발자국 더욱이 어지러움이여!
  빛 낡은 유정 아래 늙은이의 담뱃대 터는 소리
  아! 내 고향 산천에 내 고향 산천에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2
  새벽부터 야즈러운 기적 소리에
  밥그릇 옆에 낀 허리 굵은 뒷마을 사람들
  눈 부빌 새도 없이 공장에 가는 무리들이여
  젓 달라고 우는 애 울음 귀에 담았는가!
  아직도 그 모양 내 눈에 빗긴- 아 내 고향!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무리를 위한 무리들의 부르짖음이여!
  아직도 그 부르짖음 아 이곳서도 찾나니
  그나마 내 귀에 멀어질 때면
  원망하리도 없는 내 고향아!
  부르짖음의 봄!
  생명의 봄!
  그러한 봄아! 또다시 왔는가!
 
  3
  봄이야 안 왔으랴고
  눈살을 찌푸리고 이마에 놋 얹으랴만!
  오가는 봄 하나이언만……
  내 고향의 봄 몇인가! 난 몰라!
  멀고 먼 물 밖에서
  옛 꿈을 그림하면 문걸쇠 잡으니
  조는 듯 꿈인 듯 봄 바다 위에
  크고도 작은 소리- 굵고도 가는 소리-
  아침부터 내 가슴을 울려주네-
  아침부터 내 가슴을 울려주네-
  봄 바다를 건너는 내 고향 소리가……(끝)
  - 3월 1일 아침에
등록일 : 2019-04-08 09:56   |  수정일 : 2019-04-0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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