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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연숙의 ‘내겐 너무 그리운 것들’

스페인 하숙을 보면서

글 | 이연숙 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 2019-05-23 09:40

출장이거나 연수 등 명분이 있는 여행이 아니면 흥미조차 없던 남편도 스페인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스페인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망설임 없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플라밍고와 가우디, 빠에야 그리고 시골 마을의 잔잔한 풍경들을 보고 싶은 나와는 살짝 방향이 다르지만 어쨌든 남편에게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작년, 우리는 남편의 은퇴와 결혼 30주년 등 여러 명분을 붙여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원래는 캐나다에 사는 남편의 절친 부부와 캠핑카를 타고 한 달 가량 서유럽을 전전하며 살아보려는 계획이었는데 친구의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다. 파리에서 만나서 일주 후 다시 파리에서 캐나다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일정으로 항공권은 이미 예약이 된 상태였다. 위약금을 무느니 우리끼리라도 떠나자고 말하는 남편의 마음이 바뀔까봐 서둘러 여행책 펼쳐놓고 구체적인 일정잡기를 시작했다.
 
남편은 처음에는 예정했던 대로 RV카를 빌려 본인이 운전하겠다고 했다가 그냥 승용차를 렌트할까 하더니 대중교통이 편하겠다고 한다. 나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나마 내게는 딸과 함께한 유럽 여행 경험이라도 있었지만 누군가 맞춰놓은 여행 외에는 경험이 없는 남편에게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목적지는 파리와 스페인, 포르투갈로 별 이견 없이 결정되었다. 고민 끝에 숙소와 구간 내 이동수단을 여행사에 의뢰하고 나니 한결 수월했다.
 
파리 공항에 아침 여덟시 이십 분에 도착하여 호텔 체크인 후 사실상 당일부터 일정이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했던 5주에서 같은 조건으로 변경이 가능했던 항공권의 기간이 3주 였으나 그 시간이 그렇게 길 줄 그 때는 몰랐었다. 공항에서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편과는 달리 나는 담담했다. 딸과 여행을 할 때에도 내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여행을 하니 캐리어조차 끌지 못하게 한다.
 
파리의 지하철이 다 그런 건지 숙소 앞 역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에스컬레이터는 물론 엘리베이터조차 없었다. 한 번에 출구를 찾지 못해 그 큰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몇 번씩 지옥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미안하고 안쓰러움에 나조차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여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마트폰 운동어플 사용 이래 최고의 걸음 수를 그 날 기록했다. 삼만팔천  걸음을 걸은 후, 걷기에 세상 편하다는 에어 운동화가 무색하게도 새끼발가락에 풍선만한 물집이 잡혔다. 여행의 목적은 맛있는 걸 먹는 거라는 확고했던 남편의 신념조차 잊은 듯 여행 첫날 초저녁부터 기절하듯 잠을 잤다.

파리에서 5일 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서인지 스페인에서 조금 편해졌고 포르투갈에서는 마음에 들었던 길을 다시 찾아가 걷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첫날의 당황스러움은 없어졌으나 남편은 아직 긴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남편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내여행에서라면 날마다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것을 그 곳에서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이틀 일정은 다시 파리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 마카롱 맛집을 찾아가 줄 서 기다려서 마카롱을 사고 피자와 와인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30년을 살았지만 정작 3주 동안 이렇게 계속 함께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렇지, 30년을 같이 살았던 사람 맞나 싶을 만큼 낯선 부분도 있었고..." 
"그래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사모님은 즐거우셨는가?"
남편은 어색해지면 갑자기 존대를 한다.

"사실, 처음엔 내가 다시는 남편하고 여행하나봐라! 그랬는데..."
" .......?"
"여행이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여행 날 수가 더해질수록 우리에게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 나만 그런가?"
 
남편은 어색해지면 마시던 술잔을 마저 비우는 습성을 그날도 여지없이 또 드러냈다. 
 
만재도에서 찰떡 호흡을 맞추며 삼시 세끼를 해 먹던 배우들이 이번에는 스페인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딸아이가 말해줬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곳인데 숙박에 식사가 가능한 곳도 있다고 한다.

순례자가 오면 체크인 도장을 찍어주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아침이면 순례자를 배웅하고 청소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등 단조로운 내용을 보면서 남편은 3주차 쯤에 말했다.

"뭐, 만날 똑같은 얘기네."
그러나 나는, 그 즈음 향수에 사로잡힌 것처럼 마음 속에 알싸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몇 명이 올까?'라고 유배우가 설레는 표정으로 말할 때 나도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고 '부엔 까미노!'라며 아침마다 순례자들을 배웅할 때면 나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는 것처럼 휑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매일 찾아오고 떠나는 그들의 길에 어쩐지 나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이번 주에는 스페인 하숙이 9일간의 영업을 종료하는 날이 방송되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다. 방송을 볼 수 없어서인지 사람 좋은 배우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이유인지, 아니면 방송이 끝난다는 것이 곧 내가 그 곳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의미로 느껴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얼굴책' 알림에 과거의 오늘을 돌아보세요, 라는 메시지가 떴다.
세비아에 있는 스페인 광장 사진이 있었고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라고 적혀있었다. 그 글을 썼던 순간의 느낌이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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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연숙 작가

63년생 토끼띠 평범한 주부이자 작가. 2009년 문예지 <좋은수필>로 등단하고 2014년 친정엄마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성장기를 엮은 에세이 <엄마 덕분입니다>를 출간했다. 에세이 작가에 이어 소설가에 도전하고 있다.

등록일 : 2019-05-23 09:40   |  수정일 : 2019-05-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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