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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교수의 가요 이야기

누가 1930년대 최고의 동요가수였나?

이정숙과 서금영

글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2013-11-08 16:53

동요(童謠)는 어린이의 생각과 표현을 담아서 만든 가사와 노래의 혼합입니다.

어린이의 생각에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깨끗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이 그 속에 깃들어 있지요.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침탈로 온갖 시련과 고통에 허덕일 때에 당시 아동문학가들은 많은 동요를 만들어서 힘든 시간을 견디어가던 겨레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이름도 고결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831) 선생을 비롯하여,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윤복진, 박태준, 윤석중 등 당대최고의 아동문학가 및 작곡가들이 1923년 봄,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보급과 확장에 노력했던 일들은 이제 아득한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봉건시대에는 어린이란 말조차 없었지요. 그저 개똥이, 돼지, 강아지 따위의 동물명으로 부르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아동들에게 처음으로 ‘어린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르고, 그들의 존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선각자들의 거룩했던 꿈과 포부를 생각해봅니다.

이런 동요는 192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1926년 9월에 발표된 홍재유의 동요음반 <할미꼿>과 <춤추세>가 첫 음반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로부터 1939년 5월까지 약 13년 동안 약 230여종이 넘는 동요음반이 10개의 음반회사에서 제작 발매되었습니다.

동요라는 장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왕성하게 음반을 제작 발매했던 회사는 단연 리갈레코드사였습니다. 여기서 활동했던 동요가수들은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선숙, 원치승, 강한일, 녹성(綠星)동요합창단 등입니다. 김복진은 동화구연(童話口演) 음반을 주로 발표했지요. 리갈 소속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선우만년, 송무익, 이정구, 신고송, 윤복진, 홍난파, 원유각, 유기흥, 김성도, 박종선, 강석흥, 박소농, 고호봉, 임원호, 이인숙, 민영성, 손정봉, 원치승, 송찬일, 지상하, 현증순, 정윤희, 한만금, 송완순, 김정임, 지상하, 박천룡, 유기흥, 남궁인, 김여수 등입니다.

두 번째로 동요음반을 많이 제작발매한 곳은 빅타레코드사입니다. 빅타에서 활동했던 가수들은 김연실, 김순임, 윤현향, 강석연, 김정임, 전명희, 송보선, 정경남, 진정희, 계혜련, 신흥동인회 등입니다. 윤백남은 동화구연 음반제작에 참가했습니다. 빅타 소속 작사 작곡가로는 이정구, 모령, 정인섭, 정순철, 최순애, 박태준, 엄흥섭, 안기영, 윤석중, 홍난파와 일본인 중산진평입니다.

세 번째로는 콜럼비아레코드사였고 여기서 활동한 가수로는 이정숙, 채동원, 서금영, 최명숙, 이경숙, 이삼홍 등입니다.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홍난파, 박태현, 이원수, 방정환, 정순철, 유지영, 윤극영, 한정동, 윤백남 등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도 아동물음반을 발매했었는데 동요가수로는 김숙이, 정경남, 고천명, 조현운, 김소희, 전병희, 송보선 등이며, 작사 작곡가로는 박세영, 염석정, 김태오, 원유각, 목일신, 김성칠, 조현운 등이 활동했습니다.

닙본노홍과 같은 일본음반사에서는 홍재유(홍재후), 임건순,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 등이 음반을 발표했고, 작사 작곡가로는 홍난파와 박태준이 전담했습니다. 이글레코드사에서는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이 음반을 내었고, 그들을 위해 김태오, 김신명, 박노춘, 김수경(윤복진), 박수순, 홍난파 등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습니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는 강금자, 신카나리아, 임수금의 음반이 보이고, 닛토레코드에서는 이종옥과 이정숙의 음반이 확인이 됩니다. 디어레코드에서는 강금자와 신카나리아의 동요음반도 보입니다. 태평레코드사는 동요음반 제작발매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목록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길귀송의 동요음반 하나만 확인이 됩니다. 여러 음반사마다 발간했던 동요 곡들의 제작에 참여한 가수와 작사작곡자 명단을 살펴보면 이름이 겹치는 경우가 자주 발견이 되지요. 그것은 그들의 활동이 나타내는 인기의 척도나 적극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이정숙

취입동요음반들을 가수별로 집계를 해보면 누가 가장 최고의 동요가수였었던가를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다취입가수는 단연 50여곡 이상을 음반에 취입한 이정숙(李貞淑)입니다. 그녀는 피아노연주 2곡과 작사 1편까지 포함해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한국근대 최고 동요가수였습니다. 이정숙이 활동했던 음반사로는 주된 터전이었던 콜럼비아, 리갈사를 비롯하여 닙본노홍, 이글, 리갈레코드사 등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정숙은 어린 소녀의 몸으로 한국동요사에서 동요음악을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 리갈사에서발매된'오빠생각'가사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정숙의 대표곡 <오빠생각> 전문


이정숙에 이어서 그 다음 위치를 차지하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이 16곡으로 두 번째에 해당되고, 김숙이가 15곡, 그리고 녹성동요합창단이 12곡, 최선숙이 11곡, 진정희와 이경숙이 9곡, 김순임와 계혜련이 8곡, 강금자가 6곡, 신카나리아와 최명숙이 각각 5곡, 전명희, 이삼흥, 송보선, 신흥동인회가 각각 4곡씩 발표하고 있습니다. 김정임, 고천명, 임수금, 홍재유(홍재후)는 3곡씩, 강석연, 양재익, 이정옥, 길귀송, 정경남, 윤현향이 2곡씩의 동요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李貞淑)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10년에 태어난 서금영과는 거의 동년배로 보입니다. 금강키네마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유명영화감독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이었지요. 무성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를 김영환과 함께 제작했습니다.

이때 삽입곡주제가(<강남 달>)를 유경에게 부르도록 했는데 이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자 1929년 7월, 이미 동요가수로 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이정숙에게 이 노래를 정식으로 취입시키고 무대 위에서 직접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론 오빠의 배려도 있었겠지만 이정숙은 1927년 5월 닙폰노홍 음반사에서 <이 동리 저 동리>란 동요 곡을 발표했던 이미 어엿한 동요가수였습니다. 윤극영이 조직한 최초의 어린이합창단 ‘다알리아회’가 일본의 닛토레코드 초청으로 우리 동요 17곡을 취입할 때 가장 많은 곡을 취입했던 인기 높은 동요가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리갈과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적인 동요가수였고, 그밖에 닙본노홍과 이글, 리갈레코드사에서도 동요곡을 발표했습니다.

이정숙은 서금영과 함께 유명작곡가 홍난파(洪蘭坡, 1898∼1941)로부터 동요창법에 대한 특별지도를 받았습니다. 1926년 7월15일, 경성라디오방송국이 체신국 방송소를 이용해서 전파를 송출할 때 여기에 최승일과 함께 출연해서 유행가 <곤돌라>, <푸른 별>, <뱃노래> 등을 불렀습니다. 배우 신일선(申一仙, 1912∼1990)은 나운규(羅雲奎, 1902∼1937)의 영화 <아리랑> 주제곡도 이정숙이 처음 부른 것으로 증언합니다. 1927년 9월에는 장충단에서 열린 시민위안 추석놀이 음악영화대회에 단성사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합니다.

취입음반은 1934년 6월, 리갈에서 내었던 동요 <참새 춤>까지 확인이 됩니다. 1937년 여름, 중앙무대에서 막을 올린 연극 <예수나 안 믿엇더면>(채만식 작) 공연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이름이 보이고, 1956년 서울방송국 어린이프로에 세 차례 출연해서 동요를 부르거나 피아노연주를 했다는 기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혼한 뒤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서금영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 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典當鋪)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윤석중(尹石重, 1911∼2003)과 설정식(薛貞植, 1912∼1953)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라서 예측대로 명망 높은 시인이 되었습니다. ‘장래의 음악가’에는 동덕여자보통학교의 재학생 서금영이 선발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수재아동의 가정을 소개할 때 ‘창가 잘 하는 아가씨’로 그녀에 대한 취재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정숙이 다녔던 중앙보육학교로 진학했는데 재학시절 이미 이름난 동요가수로 여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 중앙보육학교 졸업생 명단에 서금영의 이름이 확인됩니다. 같은 해 이화여전 졸업생 명단에 시인 모윤숙(毛允淑)의 이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와 동년배쯤 될 것입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년 1월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년 6월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된 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 불과 23세였습니다.

홍난파는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31년 홍난파의 질녀 홍옥임이 동성애에 빠져서 파트너와 함께 열차에 투신자살한 쇼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끼던 제자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홍난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절창 <봉선화>가 빚어졌다고 하는군요. 노래 속의 봉선화는 질녀이기도 했고, 요절한 제자 서금영의 표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비단물결 남실남실 어깨춤 추고
머리감은 수양버들 거문고 타면
달밤에 소금장이 맴을 돈단다

아가야 나오너라 냇가로 가자
달밤에 딸각딸각 나막신 신고
도랑물 쫄랑쫄랑 달마중 가자

-서금영의 대표곡 <달마중> 전문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음색과 창법을 비교해보면 이정숙은 서금영에 비해 한층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펼쳐집니다. 가련함과 애처로움이 듬뿍 느껴지는 애수의 정서가 서금영에 비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이에 대조적으로 서금영의 음색과 창법은 나직하고 은은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다른 동요가수들의 경우도 두 소녀의 창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체로 유사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의 억양과 발음법이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청나게 그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초창기동요를 들을 때 마치 북한가요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북한가요에 남아있는 1930년대 창법의 흔적도 있는 것일 테지요. 여러분은 혹시 어떤 소감을 갖는지요?

대표적인 동요전문작사가로는 윤석중, 김수경(윤복진), 유기흥, 원유각, 윤극영, 김성도, 박세영, 이정구, 유지영, 송완순, 엄흥섭, 한정동, 김태오, 방정환, 최순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동요전문작곡가로는 홍난파를 위시하여 윤극영, 박태준, 박태현, 정순철, 김영환, 김신명, 안기영, 원치승, 조현운, 염석정 등과 일본인 중산진평을 손꼽힙니다.

식민지시대에서 동요음반은 이처럼 가슴속에 쌓인 상처와 울분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민족의 삶에 마치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은 부드럽고 아늑한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로 마음을 한결 안정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 이정숙과 서금영, 그리고 이름이 아주 묻혀버린 소녀 동요가수들의 애달픈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묵호> 등 14권 발간.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권 발간.
신동엽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경북문화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음.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 프로의 MC로 활동.
현재 미국 워싱턴DC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를 매주 전화녹음으로 방송 중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현재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등록일 : 2013-11-08 16:53   |  수정일 : 2013-11-0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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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이  ( 2013-11-11 )  답글보이기 찬성 : 21 반대 : 12
학교 다닐때 배우던 동요닷!
아따맘마  ( 2013-11-18 )  답글보이기 찬성 : 19 반대 : 16
요즘 어린이들 동요를 잘 몰라요. 참 걱정입니다.
이경석 기자의 영월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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