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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정순태의 우리역사 기행

사쓰마-조슈 비밀동맹과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멸망

아베 신조의 정치적 자궁(子宮) 조슈를 가다②

명치유신의 주체로서 일본 국수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만든 조슈벌(閥). 조슈벌의 후계자이며 한국침략의 원흉인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아베 신조. 아베家 3代가 흠모한 역사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요시다 쇼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카다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등 조슈(長州) 인맥은 日本史에서 어떻게 평가되든 韓國史에서는 국권 강탈의 원흉들이다. 日帝 패망 이후에도 조슈(야마구치)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2人의 총리대신을 이미 배출했고, 이제는 아베 신조 내각의 제2기이다. 조슈 인맥의 사상적 뿌리에 접근, 아베 신조의 정치적 좌표를 탐색해 본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2014-01-04 오전 9:10:00

제2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4개국 연합함대에 굴복
 
  1864년 8월4일,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의 조후(長府) 앞바다에 결집했다. 영국 9척, 네덜란드 4척, 프랑스 3척, 미국 1척, 합계 17척으로 대포 290문, 병력 5000여 명의 대함대였다. 이에 대한 시모노세키의 수비대는 포 120문, 병력 2000명 정도였다. 더욱이 수비대의 포는 구식으로 사정거리가 짧고, 포탄의 파괴력이 미약했다.
 
  4개국 함대의 공격은 8월5일 오후 4시10분에 개시되었다. 담배 두어 개비피울 만한 사이에 수백 발의 포탄이 날아왔다. 공격 개시 1시간 만에 시모노세키의 주요 포대들은 궤멸상태에 빠졌다. 열국은 육전대를 상륙시켜 砲門을 파괴하고 탄약을 폐기하면서 掃討(소토)작전을 계속해 그 일부는 시모노세키 거리까지 침공했다.
 
  3일간 전개된 시모노세키 전쟁의 결과는 조슈 측의 참패였다. 조슈번으로서는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講和使節(강화사절)로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 조슈번의 상층부는 난상토론을 했다. 국제감각을 지니면서 패전 상황의 협상 테이블에서 버틸 만한 기백의 인물이 필요했다. 결론은 다카스기 신사쿠였다. 당시 신사쿠는 脫藩의 죄로 野山獄에 수감되었다가 1등 감형되어 자택근신 처분을 받고 있던 처지였다.
 
  신사쿠는 고위 사무라이의 禮裝(예장)에 烏帽子(에보시: 귀족이나 神官이 쓰는 높은 巾)를 쓰고 연합함대의 旗艦 유리아라스號에 승선했다. 26세의 청년에게 조슈번의 운명이 걸리게 되었다.
 
  3회에 걸쳐 진행된 담판 결과, 조슈번은 외국 선박의 시모노세키 해협 통과를 인정하고, 포대를 신축하지 않으며, 물·식량·연료 등의 보급을 허가했다. 그러나 4개국이 요구한 배상금 300만 달러의 지불은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300만 달러는 1개 번이 감당할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조슈번은 막부가 결정한 攘夷期限(양이기한)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책임을 막부로 떠넘긴 것이다.
 
  이에 4개국은 막부에 대해 300만 달러의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4개국의 속셈은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보다는 그 대신에 시모노세키港 또는 효고(兵庫)港 중 하나를 개항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막부는 거액의 배상금 지급 쪽을 선택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전투의 전후처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4개국 연합함대의 육전대에게 점령된 시모노세키 前田포대.
 
  高衫晉作의「시모노세키 擧兵」
 
  코메이 천황이 「禁門의 變」을 일으켜 궁궐을 범한 조슈번을 追討하도록 막부에 명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썼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조슈번內에서는 대대적인 정권교체가 단행되었다. 이때까지 攘夷의 슬로건 아래 反막부노선으로 돌진하던 자칭 「正義派」가 실각하고, 俗論派(속론파)가 대두했다.
 
  정의파의 리더였던 주후 마사노스케는 자결했다(1864년 9월26일). 이날 밤, 번주 임석下 회의에서 「武備恭順」(무비공순: 겉으로는 막부에 납작 엎드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해 유사시에 대비함)을 제의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퇴청해 귀가하던 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俗論派는 신사쿠의 목숨도 노렸다.
 
  11월, 俗論派의 암살 위협을 피해 신사쿠는 하기를 탈출해 시모노세키 북부 산간지대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奇兵隊의 캠프로 찾아갔다. 이미 속론파의 藩정부는 기병대를 비롯한 諸隊(제대)에 해산명령을 내려놓았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軍監(제2인자)인 야마카다 아리토모를 만나 속론파 타도를 위한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愼重派(신중파)인 아리토모는 응하지 않았다. 옛 부하에게 거절당해 실의에 빠진 신사쿠는 규슈(九州)의 후쿠오카로 망명했다. 그는 후쿠오카 교외 平尾山莊(평미산장)에 은거하고 있는 歌人(가인)이며 「志士의 어머니」라 불리던 女僧 노무라 보도(野村望東)의 거처에 잠복했다.
 
  起死回生의 기회를 엿보던 신사쿠는 무력으로 번의 俗論派를 타도하기로 결심하고 후쿠오카로부터 시모노세키로 잠입했다. 그는 시모노세키 근교의 조후(長府)에 할거하고 있던 기병대를 비롯한 諸隊에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諸隊는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이에 신사쿠는 諸隊의 대원들을 상대로 궐기를 위한 유세를 벌였다. 드디어 소수이지만 신사쿠의 궐기 호소에 찬동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격대 군감 다카하시(高橋熊太郞)와 力士隊 총독 이토 히로부미 등 약 80명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시모노세키 擧兵(거병)」이다.
 
  신사쿠의 작전은 電光石火(전광석화)를 방불케 했다. 시모노세키 중심부에 있던 조슈번의 奉行所(봉행소)를 습격해 군량과 군자금을 입수했다. 이어 숨돌릴 새도 없이 小船(소선)을 타고 미타시리(현재의 防府市)를 급습해 조슈번의 군함 3척을 강탈했다.
 
  이같은 신사쿠의 활약은 순식간에 기병대 등 諸隊에 전해졌다. 당시 기병대의 총독대리가 나중에 「조슈 軍閥(군벌)을 키워 40여 년간 일본육군을 지배하는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이다.
 
  신사쿠의 반란군과 조슈 정규군의 싸움은 1865년 1월 오다에도(大田繪堂) 전투로부터 개시되었다.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정규군을 일거에 대파한 데 이어 계속 정규군을 패퇴시켜, 2월에는 신사쿠를 중심으로 하는 討幕派(토막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신사쿠의 파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해(1865년) 4월, 신사쿠는 여러 외국과의 무역에 의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시모노세키를 開港(개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유행사상은 攘夷였던 만큼 신사쿠는 자신을 따르던 기병대 등 諸隊의 강경파들로부터 피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게이샤 출신 애인 「오우노」를 데리고 시고쿠(四國)로 달아나 또다시 잠복했다.
 
  1865년, 다지마(但馬: 현재의 兵庫縣)에 잠복해 있던 기도 다카요시가 돌아와 조슈번의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사쿠의 歸藩(귀번)의 길이 열리게 된다.
 
① 영국의 프리머츠港에 전시되어 있는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의 영국 군함과 艦載砲.
②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사용된 영국 측 포탄(오른쪽)과 조슈번의 포탄(왼쪽). 조슈의 球形 포탄은 時限信管으로서 명중해도 일정 시간 후에 폭발하는 데 비해, 영국의 尖塔形 포탄은 닿기만 하면 폭발하는 着發信管이 붙어 있었다.
③ 시모노세키 전쟁의 전리품으로 파리의 앵발리드에 보관되고 있는 조슈번의 18파운드 포.
 
  사쓰마-조슈 비밀동맹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삿초동맹을 성립시킨 사이고 다카모리.
  4대 열강과의 제2차 시모노세키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난 조슈는 이제는 武備恭順(무비공순)의 정책을 견지해 간다. 이를 面從腹背(면종복배)로 판단한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전을 위한 사전준비에 돌입했다.
 
  「외톨이」 조슈로서는 동맹세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1866년 1월, 기도 다카요시는 비밀리에 京都로 올라가 그때까지 원수처럼 지내던 사쓰마의 藩士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회담을 거듭해 소위 「삿초(薩長)동맹」을 체결했다. 이것은 중앙의 정국에 실력을 가진 사쓰마번이 「朝敵」 조슈번의 復權(복권)을 위해 진력하고 유사시의 助兵(조병)을 서약하는 비밀동맹이었다. 막부 측은 삿초동맹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두 「雄藩」은 막부의 독재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서로 라이벌 의식 때문에 이때까지 대립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여러 다이묘(大名)에 의한 共和체제를 기도했던 사쓰마번은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슈번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사쓰마 번내에서는 조슈번을 탈락시켜서는 막부 타도의 추동력이 부족하다는 계산서가 이미 나와 있었다. 거기에다 중앙 진출에 강한 야심을 품고 있는 사쓰마번에 있어 간몬해협(關門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을 보유하고 있는 조슈번과 대립한다는 것은 해상교통로 확보의 차원에서 得策(득책)이 아니었다.
 
  사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접근은 전년부터 본격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제안에 의해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 등 열강은 일본과의 密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朝敵」 조슈번은 무기 구입이 불가능해져 對막부 전쟁준비가 곤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쓰마번이 가만히 무기도입의 名儀(명의)를 빌려 주어 조슈번에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런 삿초동맹을 주선한 인물이 도사(土佐) 浪士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그 덕택으로 조슈번은 영국 상인으로부터 소총 7000정 등을 구입해 軍備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신변의 위험에서 벗어난 신사쿠는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 조슈번은 그의 신청에 따라 해외유학을 허가했다. 그는 유학비 1500량을 지참하고 나가사키로 출발했다. 이때 막부는 조슈번주에 대해 호출명령을 내리면서 거부하면 제2차 조슈 정벌전을 결행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정보를 접한 신사쿠는 해외유학을 포기했다. 그는 藩命에 따라 영국의 무기상인 글라버를 만나 군함 오덴트號(증기선)의 구입계약을 하고, 이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돌아왔다. 이것이 뒷날 막부와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는 丙寅丸(병인환·헤이인마루)이다.
 
 
  제2차 조슈 征討戰에서 되레 패전한 幕府軍
 
「삿초同盟」을 주선한 도사 藩士 사카모토 료마.
  히로시마(廣島)까지 정벌의 대군을 추진시킨 막부는 조슈 번주 父子를 에도로 호송할 것과, 조슈번 石高 36만 石 중 10만 石의 삭감 등을 강화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막부는 開戰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선, 믿고 있던 사쓰마번이 출병을 거부했고, 다수의 다이묘(大名) 및 公卿들이 조슈 再征에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1차 정벌전에서 이미 항복한 조슈번을 다시 공격한다면 大義名分(대의명분)이 확실하지 않고, 막대한 戰費부담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막부로서도 內心으로는 가능한 한 평화적 수단으로 조슈번을 굴복시켜 막부의 위신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슈번 측은 이미 제1차 조슈정벌전의 강화로 처분이 종료되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私怨(사원) 때문에 조정의 권위를 이용해 再공격하려는 막부야말로 「賊」이라는 것이었다.
 
  조슈번이 막부가 제시한 조건을 최종적으로 거부한 것은 1866년 5월29일의 일이었다. 이제는 開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막부는 諸藩(제번)의 병력 15만 명을 호령해 조슈의 영토를 사방으로부터 포위했다. 조슈군의 병력은 4000명에 불과했다. 드디어 6월8일부터 막부군의 진격이 개시되었다. 전투는 大島口(대도구), 藝州口(예주구), 石州口(석주구), 小倉口(소창구) 등 4방면의 국경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조슈번에서는 이를 「四境(4경)전쟁」이라고 불렀다.
 
  歸藩 후 신사쿠는 小倉口의 해군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곧 육군참모를 겸임했다. 北규슈의 小倉(소창·고쿠라)城에 집결해 간몬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를 공격해 들어오려는 막부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직책이었다. 조슈번은 이 방면에 기병대·보국대 등 약 1000명을 配備(배비)했다. 반면 막부군은 고쿠라·구마모토(熊本)·가라쓰(唐津)번 등 6개 번병 2만 명을 투입했다.
 
  6월17일, 조슈번 군함 5척이 해협을 건너 北규슈 연안을 공격해 막부군의 요충을 공략했다. 1000명 對 2만 명의 격돌이었다. 병력수에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신사쿠는 기습공격으로 막부군을 압도했다. 막부군은 수만 많았을 뿐 諸藩으로부터 동원된 烏合之衆(오합지중)이었다.
 
  나머지 3개구에서도 조슈군은 병력수에서는 열세였지만, 무기와 장비는 월등했다. 조슈군은 사기가 높았다. 여기서 패하면 자기들 고향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4개 국경 전투에서 막부군의 「征討軍」이 오히려 敗勢를 보였다.
 
  7월20일, 쇼군 이에모치가 오사카城에서 병사했다. 8월1일, 고쿠라城의 막부군은 城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大島口·藝州口·石州口에서 조슈군의 승리가 거듭되었다. 막부는 칙명을 받아 휴전을 제의했다. 그 使者로서 막부의 해군총독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히로시마로 내려왔다.
 
  9월2일 아키(安藝)에서 막부의 사절 가쓰 가이슈와 조슈번 측의 히로자와 사네오미(廣澤眞臣)·이노우에 가오루가 회담, 兩者 사이에 휴전협약이 체결되었다.
 

 
  신사쿠 死後 6개월 만에 단행된 王政復古 선언
 
  이제는 신사쿠의 죽음에 대해 약간의 설명해 둬야 할 것 같다. 1866년 6월, 조슈군이 北규슈의 고쿠라城을 점령할 무렵에 이 방면의 총지휘관 신사쿠가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不治였던 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東奔西走(동분서주)했던 그에겐 쉴 틈이 없었고, 더욱이 젊었던 만큼 병의 진행속도가 빨랐다. 그는 1866년 10월 위독한 상황에서 현직에서 물러났다.
 
  1867년 4월14일, 신사쿠는 시모노세키의 병상에서 사망했다. 27년 7개월의 짧은 일생이었다. 근대일본의 새벽인 明治維新의 최대 추진력은 조슈번이었고, 그 조슈번을 그렇게 추동시킨 것은 바로 그였다.
 
  1866년 12월25일, 완고한 攘夷論者로서 公武合體를 추진해 오던 코메이 천황이 급사했다. 토막파의 公卿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어떻든 막부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조슈 再征軍의 解兵(해병)을 공식 발령했다.
 
  「휴전」·「解兵」이란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과는 막부의 참패였다. 번주로부터 농민들까지 한 덩어리가 된 조슈번에 격퇴당한 것이었다. 막부의 약점이 전국에 폭로된 가운데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어린 천황 메이지(明治)를 옆구리에 끼고 막부에 대해 大政奉還(대정봉환)의 압력을 가중시킨다.
 
  1867년 10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대정봉환을 상주해 칙허를 받는다. 12월에는 이른바 「王政復古의 大號令」이 선언되었다. 신사쿠가 병사한 지 6개월 후의 일이었다. 조슈 번주 父子에게 씌어졌던 「朝敵」의 오명도 벗겨졌다. 조정의 小御所회의에서는 요시노부의 쇼군職을 떼고 막부의 땅도 일부 몰수하기로 결정되었다.
 
  1868년 1월, 이에 반발한 요시노부는 막부군을 이끌고 오사카城을 나와 京都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 중도인 도바(鳥羽)·후시미(伏見)에서 조슈·사쓰마 번병을 주력으로 하는 「官軍」과 싸웠으나 패퇴했다. 戊辰(무진)전쟁의 시작이었다. 추격전을 벌인 新정부군(관군)에 대해 요시노부가 항복했다. 新정부군은 1868년 4월 에도에 입성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265년 만에 멸망했다.
 
  막부의 잔당들은 이후 홋카이도(北海道)까지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지만, 1869년 5월 마지막 거점인 하코다테의 五稜郭(오능곽) 전투에서 패해 항복함으로써 戊辰전쟁은 新정부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신사쿠의 무덤 東行庵
 
  필자는 시내버스의 종점인 오게쓰(小月)驛에서 하차했다. 오게쓰驛에서 10여 분 기다리니 東行庵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승차 10분 후에 東行庵 입구 驛에서 하차했다(요금 280엔).
 
  동행교를 건너 5분쯤 걸어가니 찻집을 겸한 식당이 보여 조금 이른 요기를 했다. 찻집 길 건너편에 「奇兵隊의 墓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입구」로부터 여러 가족묘를 거쳐 가파른 산길 400m 쯤을 올랐다. 여기에 기병대원 10여 명이 묻혀 있었던 「터」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 하나만 있을 뿐 무덤이나 비석 같은 것은 없었다.
 
  下山해 개울을 따라 반대편 길을 2~3분 걸으니 東行庵이 보인다. 신사쿠의 애인 오우노가 출세한 신사쿠의 옛 부하 야마카다 도모유키 및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도움으로 지은 암자다. 암자를 품은 淸水山(청수산)의 경관이 뛰어나다. 1867년 신사쿠의 장례식 때 시모노세키 주민 3000명이 이곳까지 25km를 관솔불을 들고 상여의 뒤를 따라 걸어온 곳이다.
 
  東行庵을 끼고 東行기념관부터 들렀다(입장료 200엔). 신사쿠의 일대기에 관련 자료 사진 및 소지품 등이 1·2층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東行庵을 둘러보니까 오우노의 러브스토리가 생각났다.
 
  오우노는 1863년 신사쿠가 기병대를 창설할 무렵에 게이샤(藝妓)로서 처음 신사쿠를 처음 만났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은 1864년 藩命에 의해 4국 연합함대와 강화 회담을 위해 신사쿠가 시모노세키에 온 때였다. 이후 신사쿠는 집을 빌려 오우노에게 첩살림을 시켰다.
 
  오우노는 신사쿠가 조슈 번사에게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신사쿠와 함께 오사카를 거쳐 시고쿠로 도망친 일도 있다. 신사쿠가 병상에 눕자 간호를 계속했고, 신사쿠가 죽은 후에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42년간 묘지기를 했다. 그녀는 1909년 8월7일에 6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묘는 신사쿠의 묘 옆에 자리잡고 있다.
 
  신사쿠의 묘를 찾아 淸水山 중턱으로 올라갔다. 大小刀를 허리에 찬 사무라이 모습의 신사쿠 陶像(도상)이 보이고, 그 조금 위쪽에 東行墓가 있다. 기병대에 의해 조성된 장방형의 묘역은 비교적 넓지만, 묘석은 높이 61cm, 폭 24cm 로서 보통 사람의 묘보다 오히려 작다. 東行墓는 1934년 일본사적으로 지정되었다.
 
  東行墓에서 내려와 오게쓰驛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오게쓰驛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해 전형적인 조카마치(城下町: 사무라이 마을)가 보존되고 있는 조후(長府)에서 하차했다. 조후 관광회관에서 1일 사용료 300엔인 대여 자전거를 타고 개울 옆으로 난 小路(소로)를 따라 500m 거리의 功山寺 앞까지 달렸다. 이곳은 신사쿠가 俗論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864년 11월에 民兵조직인 역사대·유격대의 80명을 이끌고 거병했던 곳이다.
 
  절 앞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계단을 올라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쿠라 막부 시절에 창건된 佛殿(불전)은 일본 最古의 禪寺(선사) 양식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전 옆에는 1863년 8·18 정변 때 조슈의 존양격파를 따라 京都에서 조슈번으로 망명한 公卿 7명이 은거하던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아래엔 「다카스기 신사쿠 回天義擧銅像」이 세워져 있다. 당시 신사쿠는 산조 사네토미 등 5卿(7卿 중 1명은 사망, 1명은 다른 번으로 망명)에게 출진의 인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신사쿠는 『입으로 成敗를 말하는 것은 이미 無用의 일, 이제부터 조슈 남아의 솜씨를 보라』며 말에 올랐다. 동상은 그때 馬上의 신사쿠를 표현했다.
 
  功山寺는 역사의 무대이다. 조슈번의 元祖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추격을 받은 오우치(大內義長)가 자결한 곳으로, 그 묘가 남아 있다. 功山寺에서 내려와 조슈번 支藩(지번)의 번주(長府毛利)의 저택에 들렀다(입장료 200엔). 대문으로 들어서면 적의 直攻에 대비하기 위한 높은 담이 正面(정면)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사무라이 가옥이다. 메이지 천황의 行在所로 사용되기도 했다.
 
  長府毛利 저택 바로 위에는 노기(乃木希典) 신사가 있다. 노기 大將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러시아 요새 旅順(여순)을 함락시킨 육군대장이다. 旅順공략전에서 노기는 휘하 장병 3만 명을 戰死시키는 전략상의 오류를 범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그런 그가 자신의 배를 가를 것을 우려해 미리 「자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노기 부부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후에야 자결했다. 성밑거리의 서부엔 家老 이상의 상급 家臣의 집이 줄지어 있다.
 
東行庵. 다카스기 신사쿠의 애인「오우노」가 신사쿠 死後 여승이 되어 40여 년간 신사쿠의 명복을 빌며 거처했던 곳이다. 가운데 사진 오우노. 오른쪽 사진은 시모노세키市 요시다町 淸水山에 위치한 東行(신사쿠의 아호)묘.
 
  단노우라 砲隊의 현장
 
  조후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미모수소川공원」 정류소에 하차했다. 이 공원엔 간몬해협을 향해 대여섯 개의 대형 포가 방열되어 있다. 바로 시모노세키 전쟁 때 4국 연합함대에 박살이 난 단노우라(壇之浦) 포대다. 그때 단노우라의 대포는 연합군이 전리품으로 가져 갔다. 현재 전시된 포대는 모조품이다.
 
  이곳은 源(미나모토)씨와 平(다이라)씨가 일본천하를 놓고 사투를 벌이던 源平(원평·겐페이) 전쟁의 최후 전투였던 단노우라 해전(1185년)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기서 平씨는 멸망하고, 源씨는 일본 최초의 武家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개설했다.
 
  간몬해협은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南北朝 전란시대에 패망한 南朝의 어린 천황 안도쿠(安德)가 母后의 품에 안겨 투신자살한 바다이기도 하다. 이로써 남조는 멸망해 북조로 통일되었다(1392년).
 
  현재, 단노우라와 北규슈의 모지港 사이에 간몬대교가 놓여 있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으로 세키간宮을 목격했다. 세키간宮은 동화책 속의 궁전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처마 끝엔 金도금으로 장식해 번쩍거린다.
 
  그럴 만한 슬픈 사연이 있다. 6세의 어린 천황이 모후와 함께 투신자살할 때 『바다 속에도 궁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모후는 『거기에도 용궁이 있다』며 어린 천황을 안심시켰다. 500년 후 明治정부가 남조를 정통왕조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세키간宮을 짓고, 그 모습을 동화 속의 용궁처럼 꾸민 것이라고 한다. 경내에 안도쿠 천황의 능도 조성되어 있지만, 그의 시신을 인양하지 못했던 만큼 假墓(가묘)일 수밖에 없다.
 
  세키간宮 앞을 지나 바로 다음 정류소인 가라도(唐戶)에서 하차했다. 가라도에는 둘러볼 곳이 많다. 가메야마(龜山) 포대, 가메야마 神社, 舊영국영사관 등이 모여 있다, 가라도 시장 옆 쪽 음식점 2층 창가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며 간몬해협의 빠른 물살과 대안의 北규슈 모지港을 관찰했다. 가라도 뱃머리를 출항한 쾌속선이 모지港으로 달리고 있다. 항해시간은 5분이다.
 
  벌써 날이 어두워 미리 정해 둔 호텔 「도큐인」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답사하지 못한 시모노세키의 「維新回廊(유신회랑」의 주요 포인트는 하기市 답사 다음날인 9월1일로 미루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등록일 : 2014-01-04 오전 9:10:00   |  수정일 : 2014-01-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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