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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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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대선(大選)]
문재인 傳奇 (2/4)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가.
꼭 그런 것도 아냐”
- 문재인

⊙ 부모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 흥남철수 때 월남해 경남 거제에서 출생
⊙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진저리, “모멸감과 반항심 생겼고 세상의 불공평 느껴”
⊙ 고3 때부터 술·담배, 별명은 ‘문제아(問題兒)’
⊙ 대학 시절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읽고 큰 감화, 운동권의 길로
⊙ 대학 3학년 때 첫 시위 주도, 4학년 때 시위 주모자로 구속
⊙ 석방 후 강제 징집… 타의(他意)로 공수부대 가. 당시 상관이 전두환·장세동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동원… 미루나무 자르지는 않고 외곽 경비
⊙ 1980년 ‘서울의 봄’ 때 경찰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소식 들어
⊙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 탈락… 노무현과 만나
⊙ 부산 미 문화원 점거, 부산 상공회의소 점거자 변론 등 시국 사건 도맡아
⊙ 釜民協·國本·民辯 등 재야단체 설립 초창기 멤버
⊙ “동의대 사건 주모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에게
모욕이 되는 것은 아냐”
⊙ “반기문은 관운(官運) 타고난 사람… 유엔사무총장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덕”
⊙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대통령제에 맞지 않아”
⊙ “수사권은 경찰, 기소권은 검찰에 분리 귀속…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만들어야”
⊙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조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이제 극복해야”
⊙ 민정수석 2번 하면서 “제일 아쉬운 건 국가보안법 폐지 못 한 일”
⊙ 민정수석 재임 시 통진당 이석기 이유 없이 2차례 사면받아
⊙ “대북 경제제재 풀고 개성공단 재가동해야…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서 결정”
⊙ 조갑제 “문재인의 노선을 요약하면 친북(親北), 친중(親中), 반미(反美), 반일(反日),
반한(反韓), 반법(反法)”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필자의 다른 기사

▲ 경희대 재학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앞줄 가운데).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
16. 경희대 시절
 
  “나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 과목이 제일 재미있었고 성적도 제일 좋았다. 그래서 대학입시 때에도 역사학과를 가고자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 내 성적이 법·상대에 갈 수 있는 등수라는 게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는데 입시공부를 등한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학입시에서 실패했다. 재수 끝에 당시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문재인은 고교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도 1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계속 재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 집안 형편이 안 돼 끝내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이북에서 내려와 경희대를 일으킨 조영식 박사의 권유를 받고 1972년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한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일요시사》가 보도한 바 있다.
 
 
  17. 리영희와 《전환시대의 논리》
 
경희대 재학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앞줄 가운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대학교 1, 2학년 무렵 잡지에 먼저 논문 1, 2부가 연재되고 3학년 때 책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접한 리영희 선생 논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과 제국주의적 전쟁의 성격, 미국 내 반전운동 등을 다뤘다. 결국은 초강대국 미국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돼 있었고 명쾌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미국의 주장을 진실로 여기며 상대편은 무찔러 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과 책을 통해 본받아야 할 지식인의 추상(秋霜)같은 자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것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진실을 억누르려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노 변호사(노무현)도 리영희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노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투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림사건’은 청년과 학생들이 수십 권의 기초 사회과학 서적 또는 현실비판 서적을 교재로 공부한 것이 빌미가 됐다. 기소 내용엔 ‘그 책들을 읽으면서 북한 또는 국외 공산 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노 변호사는 변론을 위해, 수십 권의 서적을 깡그리 독파했다. 그 가운데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변론을 위해 읽은 책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은 셈이다. 이후 노 변호사는 더욱 폭넓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그것을 통해 이른바 ‘의식화’됐다. 리영희 선생 책이 그 출발이었다.”
 
  “그 후 우리가 부민협을 할 때 리영희 선생 초청 강연회를 두세 번 한 적이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 질문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 오류가 아니었는지’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오류였다. 글을 쓸 때마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그 시절은 역시 자료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또 그때는 정신주의에 과도하게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솔직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18. 경희대 운동권의 비조(鼻祖), 그리고 정범구
 
  “당시 경희대는 학생운동이 약했다. 의식 있는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스터디 그룹 같은 것도 형성돼 있지 않았다. 시위를 하려는 시도는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이끄는 중심세력이 없어 불발에 그쳤다.
 
  3학년 가을 학교에서 재단퇴진 농성이 있었다. 그걸 계기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유신반대 시위를 기획했다. 우리 팀이 선언문을 준비해 배포하고 다른 학생들은 교내 학생들을 교시탑(校是塔) 앞까지 모으는 일을 맡았다. 그 후 시위 주도는 부학생회장단이 맡았다. 우리 팀은 아무도 모르게 시위 준비만 해준 후 잠적해 버리고 부학생회장단이 현장에서 직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장서게 된 것으로 역할을 나눔으로써 처벌을 피하자는 계획이었다. 그 선언문을 내가 작성하게 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 가운데 그나마 내가 다른 대학의 여러 선언문을 자주 접해서, 어떤 식으로 쓴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써보는 선언문이었다.
 
  친구 집에서 등사기를 밀어 등사하는 방법으로 밤새 유인물을 4000부가량 준비했다. 그 유인물을 다음날 새벽 아무도 모르게 모든 강의실에 뿌렸다. 정해진 시각이 되자 500~600명의 학생이 교시탑 앞에 모였다. 이제 부회장단이 학생들을 이끌 순서였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처 직원들이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그대로 두면 시위는 실패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올라가 선언문을 읽었다. 학생처 직원들이 몰려왔으나 학생들이 막아줬다. 비가 내려 선언문이 젖었다. 그래도 내가 쓴 글이어서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학생들을 교문으로 이끌었다. 금세 학생들이 2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우리는 시위가 본궤도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학교를 빠져나와 며칠 동안 잠적했다.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앞장선 몇 사람을 붙잡아갔으나 시위를 준비한 팀과의 연계성이 안 나오자 구류 정도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때 잡혀가 고생한 학우 중 한 명이 민주당 국회의원 정범구다. 그는 정치외교학과 4학년 졸업반으로 총학생회 간부였는데 현장에서 앞장서다가 붙잡혀갔다. 형사처분은 구류로 끝났지만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해 졸업도 늦어지고 취업도 못 해 고생을 많이 했다. 지나고 보니 그 고생이 그를 단련시켜 더 큰 인물로 만들어준 것 같다.”
 
 
  19. 첫 구속, 제적 그리고 강삼재
 
  “경희대는 마침 1975년 4월 초 오랜만에 실시되는 직선제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그때 당선된 총학생회장이 후일 민자당과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지내고 한나라당 부총재까지 했던 강삼재 전 의원이다. 나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그렇게 총학생회가 출범하자마자 총학생회 주도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했다. 역시 시위 준비는 우리 팀이 맡기로 했고 당일 비상총회와 시위를 이끄는 것은 총학생회장이 하기로 했다. … 시위가 끝난 후 우리 발로 걸어가 체포됐다.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수감됐다. 구속과 동시에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구류를 당한 학생들까지 포함해 한꺼번에 16명이 제적됐다. 1980년에 가서야 복학이 이뤄졌다. 지금은 다들 잘 살지만, 오랫동안 그들에게 미안했다. 경찰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로 이송되는 날 오랜만에 유치장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호송차에 올라탔다. 1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이 둘러쳐진 호송차였다. 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차 뒤에서 달려오고 계셨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혼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
 
 
  20. 아내
 
문재인 전 대표 부부의 결혼식. 두 사람은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구치소에 있을 때 아내(김정숙)가 뜻밖의 면회를 왔다. 아내는 같은 대학교 음대생이었고 나보다 2년 후배였다. 해마다 5월 초 ‘법의 날’에 맞춰 열리던 법(法)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내가 3학년, 아내가 1학년 갓 입학했을 때였다.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축제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1975년 4월 시위 때 아내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비상학생총회에서 시국토론을 할 때 자원(自願)발언이 끊길 경우, 분위기가 식지 않도록 나설 발언자를 몇 명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토론을 마무리할 마지막 발언자는 여학생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총회 개최시각을 기다리며 여학생 발언자를 확보해 두려고 살피는데 마침 아내가 노천광장에 와 있었다. 같은 과 과대표와 같이 있었다. 둘이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다.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한 사람이 마무리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과대표가 나와서 발언했다. 그 일로 그녀는 구류를 살았고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다. 비상학생총회 후 교문 앞까지 행진했다가 내가 페퍼포그를 맞아 실신했을 때 한참 후 누군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아내였다. 시위행렬에 있다가 앞장선 내가 걱정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랬다가 면회를 온 것이다. 그런데 면회시간 내내 접은 신문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나에게 보여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대회인지 전국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스포츠면 톱기사였다. 세상에 내가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 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감방에서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석방 후 아내와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곧 입대해야 했다. 아내는 이번엔 군대로 면회를 왔다. 제대 후 고시공부를 할 땐 또 공부하는 곳으로 면회를 다녔다. 아내는 나와의 연애사(史)를 면회의 역사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경희대에 가게 된 건 오로지 아내를 만나기 위함인가 보다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21. 서울구치소 시절-한승헌, 박형규 목사, 시인 김지하
 
  “서울구치소 수감 생활은 견딜 만했다. 나는 일반사범과 함께 있는 혼거(混居)방이 좋았다. 세상공부, 인생공부가 됐다. 옆방에 한승헌 변호사가 계셨다. 잡지에 쓴 〈어떤 조사(弔辭)〉라는 글로 필화를 당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였다. 내가 옆방에 수감되자 교도관을 통해 러닝셔츠와 팬티 한 벌씩을 보내주셨다. 그때 서울구치소엔 한 변호사 외에도 박형규 목사, 김관석 목사, 김지하 시인 등 쟁쟁한 재야인사들이 많았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을 하다 해고된 ‘동아투위’ 해직 기자들도 있었다. 재판에서 나는 징역 2년을 구형받았다. 한승헌 변호사가 유머 있게 풍자했듯이 당시 선고 형량은 정찰제라고 할 만큼 일률적이었다. 그때는 또 무조건 실형이 선고될 때였다. 그런데 판사가 징역 10월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때 여러 대학 중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 판사가 소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22. 강제징집
 
  “석방된 지 얼마 안 돼 입영 영장이 나왔다.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태였다. 신체검사 통지서와 입영 통지서가 함께 날아왔다. 입영 전날 신체검사를 받고 다음날 입영하는 일정이었다. 강제징집이었다.
 
  입대한 훈련소는 향토사단이라는 창원 39사단이었다. 1975년 8월 초였다. 훈련소에서는 선임 분대장을 했다. 대학 다니다 왔고 나이도 많은 편이어서 지명된 것이다. 훈련소 퇴소 때, 훈련병들을 모두 연병장에 모아놓고 배치될 부대를 차례로 발표했다. ‘문재인, 특전사령부!’라고 발표됐다. 다들 특전사령부가 어디에 있는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훈련병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 군용열차 안에서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허용해 줬다. 힘든 부대에 배치되는 사람에게는 훈련병들이 술을 더 권했다. 내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렸다.”
 
 
  23. 공수부대 시절-전두환, 장세동, 안현태, 정병주
 
공수부대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 당시 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4주간의 공수 훈련과 6주간의 특수전 훈련, 2주간의 여단전입 훈련을 다 거친 다음에야 자대에 배치됐다. 관등성명부터 외우게 했는데 ‘여단장 준장 전두환’ ‘대대장 중령 장세동’이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경호실장까지 한 장세동 대대장은 내가 후반기 훈련을 마치는 사이에 바뀌어 함께 근무해 보지 못했다. 얘기만 들었는데 군인으로서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 5공화국 당시 장세동씨 후임으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했던 안현태씨가 바로 옆 대대 대대장이었다.
 
  특수전 훈련 때 폭파 주특기를 부여받았다. 나는 공수병이자 폭파병이 됐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정 사령관은 나중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끝까지 저항하다 반란군의 총에 맞아 참군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전두환 여단장은 그 쿠데타를 이끌고 성공해 대통령까지 됐다. 관등성명을 외웠던 두 직속상관의 운명이 그렇게 극적으로 엇갈렸다. 자대에 배치된 후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은 일도 있었다.”
 
 
  24.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상병 때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작전을 우리 부대가 맡았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데프콘이 상향됐다. 준전시 사태였다. 나무를 자를 때 북한이 제지하거나 충돌이 일어나면 바로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까지 대비해 부대 내 최정예 요원들이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고 나머지 병력은 외곽에 배치됐다. 다행히 북한은 미루나무 자르는 것을 못 본 척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때 잘라온 미루나무 토막을 넣은 기념물을 국난(國難) 극복 기장이라고 하나씩 나눠줬다.
 
  제대 후 부마(釜馬)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근무하던 제1공수여단 제3대대가 부산에 투입됐다. 12·12쿠데타 때는 정병주 사령관에게 항명하고 반란군 주력부대로 투입되기도 했다. 군 복무를 좀 더 늦게 했다면 나도 역사를 거스르고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역할에 동원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대 후 한동안 꾼 꿈이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이었다. 그냥 군대 생활 꿈이 아니라 꿈속에서 분명히 제대했는데 제대가 취소되든지 해서 다시 군대에 가게 되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꾸는 꿈이었다.”
 
 
  25. 고시(考試)공부
 
  “집에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일지 모를 복학을 기다리며 빈둥빈둥 놀 수도 없었다. 부산 해운업계에 있던 선배들이 취업 권유를 했다. 대학 졸업장 없이도 대졸 사원 처우를 해줄 테니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기로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무슨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심장마비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너무 가슴 아팠다. 돌아가시던 순간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아버지가 삶에 너무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간 것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게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이나 희망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냥 취업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늦게나마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 49일을 치르고 다음날 바로 집을 떠났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갔다. 대흥사 내 대광명전이라는 암자였다.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입시공부를 하던 초등학교 6학년 이후 처음으로 공부답게 했다. 대학 재학 중 3학년 겨울방학 때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한 번 합격한 경험이 있었다.
 
  그해 가을 교내시위를 주도한 뒤에서, 공부도 결코 소홀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본 시험이었다. 다행히 합격했고, 게다가 우리 학년에서는 유일한 합격자여서 나는 단번에 ‘고시 유망주’가 됐다. 그러나 법률 과목은 거의 공부가 안된 상태였고 나머지 암기과목들을 잘해 합격한 것이어서 제대로 된 고시공부는 이번이 처음이나 진배없었다. 공부하기 좋았던 곳인데 몇 달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떠나고 싶어 떠나는 게 아니라 암자가 하숙을 그만뒀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윤고암 스님이 그때 대흥사 조실로 오면서 대광명전을 선원(禪院)으로 바꾸도록 했다고 들었다.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다음해 2차 합격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발발했다. 급기야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울의 봄’이 시작됐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들떠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980년 1월 무렵부터 학교 측과 복학 논의가 시작됐다. 나는 내 의사와 무관하게 복학생 대표가 됐다.”
 
 
  26. 복학과 재구속
 
  “복학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제적됐던 1975년 1학기 4월 초까지 학교에 다닌 것을 한 학기 이수로 인정해 줬다. 나 같은 4학년의 경우 한 학기만 더 이수하면 졸업이었다. 거기다 복학 학기 등록금 또한 면제해 줬다. 나는 그 덕에 1980년 8월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측과 복학 협상을 시작하면서부터 고시공부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복학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사법시험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전년도 1차 합격으로 바로 2차 시험을 칠 자격이 있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것이 아까워 1980년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제22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쳤다. 시험을 앞둔 가장 중요한 시기 두세 달 동안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경희대가 반독재 민주화 요구 시위로 전환할 때부터 나는 그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재학생들이 시위 경험이 전혀 없어서 복학생들이 시위 요령을 가르쳐줘야 했다. 경희대는 매일 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서울역 광장까지 행진해서 대학생 연합시위에 참석한 후 다시 학교까지 행진해서 돌아와 해산식을 하곤 했다. 서울역에 집결하는 대학생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마지막 5월 15일엔 거의 20만명에 달했다. 그 순간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학생들의 전면 퇴각을 결정했다. 군 투입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복학생들이 총학생회 회장단을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시위 경험이 없는 그들은 군 투입 소식에 겁부터 냈다. 나는 서울 지역 대학생들의 마지막 순간 배신이 5·18광주항쟁에서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생각한다.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나는 그날 아내와 함께 강화도에 있는 장인어른의 농장으로 놀러 갔다. 농장으로 가는 진입로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일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5~6명의 건장한 괴한이 둘러싸며 권총을 들이댔다. 그러고 ‘꼼짝 마, 손들어. 너 문재인 맞지?’라고 소리쳤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던 청량리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영장을 보자’고 했더니 ‘영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면서 ‘계엄’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힌 ‘계엄증’을 보여줬다. 처가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갑이 채워지고 차에 태워져, 그 길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27. 사시(司試) 합격
 
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와 가족들. 왼쪽부터 아내 김정숙씨, 아들 준용, 딸 다혜, 문 전 대표.
  “구속된 지 이십삼, 사일쯤 됐을까, 뜻밖의 낭보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학교 학생처장, 법대 동창회장 같은 분들이 면회를 와서 축하해 줬다. 경찰은 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으니 대신 그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축하할 수 있게 해줬다. 또한 그분들과 유치장 안에서 축하주까지 마실 수 있도록 해줬다.
 
  경찰허가하에 외부인사가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서 수감자와 함께 축하주를 마신 일은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석방이 됐다. 군사재판에 이미 회부됐다면 석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합격도 취소되거나 3차 시험 불합격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미결 상태였기 때문에 석방의 여지가 생겼다.
 
  그 사법시험에서 경희대 합격자는 단 두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합격이 취소될 상황이라 학교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 노력을 했다고 한다. 마침 그때 경희대 대학원장이 육사 1기 출신 김점곤 교수였다. 한국전쟁 때 평양에 제일 먼저 진입한 연대장으로 전사에 기록돼 있는 분이다. 그분이 중대장일 때 육사 2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밑에서 소대장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계엄사 쪽으로 노력을 많이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법시험 최종 합격까지 한 번 더 고비가 있었다. 3차 면접시험이었다. 그런데 면접시험을 며칠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가 지정한 호텔에 나가 인터뷰에 응했다. 묻는 핵심은 하나였다. ‘지금도 옛날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 요지였다. 일종의 사상검증이었다. 대답하기 정말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젊을 때였다.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생각이 변함없다’고 버텼다. 그러고는 최종 합격자 발표 때까지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다행히 최종 합격했다. 그가 좋게 보고해 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보고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3차 시험 불합격자가 한 명도 없는 걸 보면 대세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사법고시 합격은 여러모로 운이 따랐다. 실제로 그 다음해부터는 시위 전력자들이 3차 면접시험에서 마구 떨어졌다.”
 
 
  28. 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적은 액수지만 봉급을 받게 돼 처음으로 경제적 자립을 했다. 아내와 결혼하고 첫애를 낳았다. 처음 만난 때로부터 만 7년, 긴 연애 끝의 결혼이었다.
 
  박원순 변호사,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부 장관,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 이번에 새로 대법관이 된 박병대 판사, 박정규 전 민정수석 등이 모두 연수원 동기들이다. 정치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여럿이다. 조배숙, 박은수, 고승덕, 이한성 의원과 함승희 전 의원 등이 동기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도 연수원 동기였다. 한참 선배였는데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법연수원에서 제명됐다가 우리 때 복적이 이뤄져 연수원을 함께 다녔다.”
 
 
  29. 고 조영래 변호사와 민변(民辯)
 
고 조영래 변호사.
  “조영래 변호사는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 판사 임용이 거부됐을 때 김앤장을 비롯해 두어 군데 법무법인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도 그였다. 1987년 대선 때 그는 ‘후보단일화’ 운동을 주도했다. 재야의 다수가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로 기울어 있을 때였다. 나는 부산 지역에서 그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는 특별한 입장을 가지지 않고 공정선거 감시 활동에 주력했다. 끝까지 후보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아 결국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말았을 때 우리는 크게 낙망했다. 얼마 후 ‘민변’을 창립할 때도 함께 의논했다.
 
  민변을 처음부터 전국 조직으로 만들기 어려워서 ‘서울민변’을 창립할 때 나는 부산에서 별도로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했다. 그는 엄청난 골초였다. 특히 글을 쓸 때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그의 명칼럼, 명변호문이 모두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쓰였다.
 
  어느 날 부산에 와서 함께 생선회로 점심을 먹었다. 웬만한 골초라도 음식을 먹는 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그때 그는 음식을 먹다가도 이야기를 할 때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절반쯤 피운 다음 껐다가 나중에 남은 담배를 다시 피우는 흡연 습관도 독특했다. ‘체인 스모킹’이 심각할 정도로 심해져 내가 걱정을 했는데도 듣지 않았다. 그가 말기 폐암이라는 말을 들은 건 그로부터 20여 일 후였다.”
 
 
  30. 판사 임용 탈락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어서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런데 막판에 판사 임용이 안 된다고 했다. 지금도 판사 임용 면접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판사 지망자들은 법원 행정처 차장과 인터뷰하는 절차가 있었다. 대부분 1~2분 정도 됐을까, 의례적인 절차였다. 그런데 유독 나 혼자만 30분 정도 면접을 했다. 질문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왜 데모를 했나, 그게 언제였나?’ 그게 다였다. 그런데 면접관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위 전력으로 결국 판사 임용이 안 돼 변호사의 길로 나서게 됐다. 그때 나만 판사 임용이 안 된 게 아니었다. 연수원 동기 중에 여성이 딱 2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연수원 전체 3등으로, 대한변협회장상까지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반공법 위반으로 복역 전과가 있고 보호관찰 대상자였는데, 연좌제가 없어진 후였는데도 아버지의 반공법 전과 때문에 판사 임용이 안 됐다. 그 때문에 다른 여성 동기와 함께 검찰로 갔고 둘이 사상 첫 여성 검사가 됐다. 심지어 그때 법원은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동기생 4명을 임용에서 제외해 엄청난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법원은 3개월 후에 그들을 판사로 추가 임용하는 것으로 손을 들었지만, 당시 법원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였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판사로 임용되지 않은 것은 외압 때문이 아니었다. 법원, 특히 당시 대법원의 시대에 뒤처진 의식이 스스로 낙후된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다.”
 
[월간조선 2017년 2월호 / 글=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2-06 13:40   |  수정일 : 2017-02-0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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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 2017-02-07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19
일본 산케이 신문 (sankei.co.jp 국제면 2017.2.6 11:31) 에
아래 제목의 '한국 적화 위기의 반일 종북 문재인 지지율 톱' 보도
내용중에 반일 종북 반미의 정치가로 알려진 문재인인데
한미일동맹 파괴와 적화통일 안될랑가 모르겠다고 함

조중동에서 이런 보도를 해야 하는데 조중동과 국영방송인
KBS가 문재인과 야당 추종자가 장악했으니...문재인은 대통령된 것처럼
기고만장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살인공포감 느낍니다

韓國;「赤化」危機 潘基文氏潰され…次期大統領選、「反日」「從北」の文在寅氏が支持率トップ

김성  ( 2017-02-07 )  답글보이기 찬성 : 17 반대 : 12
2012년 관리를 가장 잘하는 조선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기사를 보고 욕설없이 제 생각을 썼음) 부정선거운동의 선거법 구속해서 문재인은 저를 처벌해달라고 재판부에 탄원서 제출과 노무현 조카사위 정재승을 증인 세우고(법정에 2번 모두 안나왔음) 전라도 신헌석 판사(현재 서부지원)가 2013년 징역 1년 선고로 만기 출소했습니다. 1심 최후진술에서 '선거때마다 제 글이 잘못됐다고 처벌하는데(김대중 노무현 정동영 문재인) 저를 해칠려는 사람이 많아 문재인 증인이 참석했으면 누가 살해 지시하는지 또는 아는 것은 없는지 묻고 싶다했음.' 출소해서 부천지청에 가서 확인해보니 최후 진술서를 없앴습니다.구치소에 있을
때 사건기록부를 보여달라고했으나(당연히 갔다줌) 안보여주고 출소해서 부천지청에 가서 사건기록부 보여달라고했으나 안갖다주어 대검 게시판에 글을 올리겠다고하니까 사건기록부 갖다주었는데 최후진술서 없었습니다. 2011년 12월 헌재에서 선거법 93조 1항 위헌 판결에 인터넷글은 처벌 못한다고 판결했습니다.2심은 서울고법 윤성원(광주지법에 있을때 전라도변호사들이 이용해먹을려고 우수판사 추천으로 바로 서울고법부장판사 승진하고 서울고법으로 이동하여 우리법연구회 판사처럼 다수 사건 판결한 자),3심 대법원 주심은 전라도 판사. 고영주 문방위 이사장도 우리법연구회 판사가 유죄선고했습니다 국민의당 김수민과 박선숙을 전라도 판사가 무죄 선고하는 문재인 김대중 추종 판검사가 장악한 대한민국 사법부여서 조폭살인자들이 너무 많아 외출도 함부러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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