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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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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 《월간조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4]
내가 北에 있을 때 과외를 받았던 까닭

⊙ 학생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보상도 없는 사회
⊙ ‘모두 다 모내기 전투에로!’ 농사 일선에 선 청년들
⊙ 김씨 일가의 초상화를 닦으며 늘어나는 증오심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지난 11월 15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매년 11월이면 전국에서 60만명에 가까운 학생이 대학 입학을 위해 시험을 치른다. 북한에도 수능이 있다. 물론 ‘수능’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다. ‘대학입학 예비시험’이라고 한다. 대입시험도 남북한이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남한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이지만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혁명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북한에서도 국·영·수학 시험을 본다. 또 남한에서는 수능시험이 하루에 끝나지만 북한에선 이틀에 걸쳐 치러진다. 하루에 과목당 3개의 논술식 문제로 45분씩 3과목을 본다.
 
  과거에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현재 북한도 12년제 의무교육이지만 과거에는 11년제였다. 유치원 1년, 소학교(초등학교) 4년, 고등중학교(중고등학교) 6년이었다. 2012년 들어서 유치원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개편됐다. 대학 진학 방법도 바뀌었다. 학제개편 이전에는 일반 고등중학교에서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그러면 어떤 학생들이 대학에 갈까? 북한은 도·시·군들에 제1고등중학교라는 명칭의 특수학교를 새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수재학교다. 소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험을 통해 이 학교에 입학한다. 북한 교육성에서 출제한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제1고등중학교에 갈 수 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선 필수로 이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고난의 행군’의 경제난 속에서 생겨난 불법 과외
 
  제1고등중학교가 생긴 이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도 과외가 생긴 것이다. 제1고등중학교의 입학시험은 난도(難度)가 높은 편이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학생이 아니면 대부분 학교 공부 이외 다른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과외를 부모들이 따로 시키는 것이 아니다. 소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따로 선발해 공부를 시킨다. 이 교육은 소학교 3학년인 10살부터 시작된다. 이 학년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을 선발해 정규교육 이외 따로 공부를 시킨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북한 교육체계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해당 소조(공부모임)에 들어갔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열정도 대단했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소조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공부만 했다. 부모님들도 열정이 대단했다. 소조 공부 이외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구해 개인과외를 받게 했다. 물론 당시 개인과외는 불법이었다. 부모님들은 자식의 수재학교 진학을 위해 몰래 과외를 시킨 것이다. 물론 나만 한 것은 아니다. 소조에 들어간 친구들은 몰래 과외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경제난으로 제일 어려웠던 시절인 1990년대 말 불법과외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돈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식량으로 과외비를 대신했다.
 
  과외 선생님들은 대부분 은퇴한 교사들이거나 경제사정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신 분들이었다. 나의 과외선생님은 소학교 2학년 담임이셨던 강모연(가명) 선생이었다. 강 선생님은 결혼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두셨다. 집에서 가정주부로 생활하시면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셨다. 개인적으로 과외를 해 줘서가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시기도 하다. ‘고난의 행군’ 시절 학생들의 생일이면 연필과 공책 등 다양한 학용품들을 선물로 주셨다. 또 학생 개인의 사정을 파악하시고 도움을 주려고 애쓰셨다. 같은 반에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강 선생님은 이 학생을 자신의 집에까지 데려가 밤새 공부를 도와주셨다.
 
  나는 과외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만둬야 했다. 북한 정권의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한 전역에 과외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루빠(TF)’를 조직해 검열에 나섰다. 몇몇 분들은 그루빠에 적발돼 노동단련형(북한에서 강도가 약한 처벌 6개월~1년 정도 강제노동을 시킨다)을 선고 받기도 했다. 어떤 분은 시범케이스에 걸려 시골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당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인해 공부 열풍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도 어영부영 공부를 포기했다.
 
  당국의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과외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 2012년 북한의 학제가 11년에서 12년 의무교육으로 바뀌면서 제1고등중학교에 대한 인기는 사라졌다. 과거 제1고등중학교에서만 대학 입학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반 고급 중학교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북한도 남한의 과외 열풍을 따라가고 있다. 현재 국어,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물리, 화학, 컴퓨터, 피아노, 글쓰기 과외까지 등장했다. 특히 과거와 달리 과외비도 현금으로 준다.
 
  특히 과거에는 소학교 졸업 전 과외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다양한 과목과 이과 과목, 피아노, 관현악기 등 예체능까지 과외가 이뤄지고 있다. 물론 집안의 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과외비용은 과 거에 비해 2배 수준으로 올라갔다. 지역에 따라 차이도 있다. 가장 비싼 지역은 역시 평양이다. 평양의 경우 1인 평균 100~200달러 정도 한다. 물론 과외교사에 따른 차이도 있다. 고급 중학교 교사인지 대학교 교수인지도 중요하다. 이 밖에도 함흥과 청진은 50달러, 회령은 중국 화폐 100위안이다.
 
 
  공부가 아닌 강제노동의 현장이 된 학교
 
소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북한 학생들이 손수레에 흙은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 사진=인터넷 캡처
  북한에서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한 학교에서 10%도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집안이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집에 돈이 많거나, 아버지가 간부인 아이들만 대학 입학을 꿈꿀 수 있다. 이외 학생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남자인 경우 학교를 졸업한 후 10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노동부에서 직장을 잡아 준다. 취업하기 힘든 요즘 청년들이 이를 부러워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이유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리고 한 기업소(회사)에 배정을 받는다고 해도 월급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대부분의 제대 군인들은 직장을 배정 받고도 일을 나가지 않는다. 여학생의 경우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역시 노동부에서 직장을 배정해 준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가거나 장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들도 열심히 가르치지 않는다. 이들은 오전 7시 반에 등교를 한다. 등교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 모여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줄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들어선다. 8시에 수업이 시작해 4교시를 하고 모두 집으로 간다. 남한의 경우 점심시간이면 식당으로 이동해 밥을 먹는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급식소가 없다. 점심시간이면 모든 학생이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간다. 집이 먼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 오곤 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친구가 없어졌다.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복귀하는 시간은 오후 2시다. 보통 학교로 돌아와 2교시를 더 하면 학교가 끝난다. 이후 하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러 나간다. 매일매일 다르다. 농사철이면 농장으로, 그 외에는 건설장으로 나간다. 봄과 가을이 되면 주변 농장에 나가 일을 한다. 그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없다. 말 그대로 강제노동이다. 농사일은 조금 쉬운 편이다. 시에서 건물을 짓는데 일손이 부족하면 학생들을 동원해 일을 시킨다. 보통 하는 일은 강에서 모래를 담아 공사장까지 나르는 일이다. 강가와 공사장이 가까우면 쌀자루에 모래를 담아 등짐으로 날라야 한다. 이 역시 노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런 일들이 늘어나면서 대부분 오후 수업도 하지 않은 채 학생들을 노동의 현장으로 내보낸다. 이 밖에도 작업이 없는 날이면 담임선생님의 개인 농사를 도와주러 가기도 한다. 물론 모든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봄이나 가을 농사 일손이 부족하면 자신이 맡고 있는 반의 학생들을 몇몇 뽑아 농사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김정일 “밥을 먹는 사람은 모두 다 동원하라”
 
북한의 학생들이 ‘모두 다 모내기 전투에로!’라고 쓰인 구호를 들고 농촌동원을 나가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남한에서는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북한은 기계를 거의 쓰지 않고 인력이나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이를 채우기 위해 고등중학교 4학년(17살)부터 6학년 학생들을 한 달간 농촌에 파견해 농사일을 돕게 한다. 남한으로 말하면 농활이다. 남한에서는 농활이 의무가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의무이다. 1년에 봄, 가을 두 번이다. 학교는 한 달간 휴교를 한다. 각자 자신이 한 달분 식량을 챙겨야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농장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을 돕는다. 첫 농촌지원은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다. 나는 몇 시간 후 닥쳐올 시련을 생각하지 못한 채 마냥 즐거웠다. 17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한 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내에서 차로 3시간 달려 농장 마을에 도착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2인 1조로 농장원 집에 숙식하게 됐다. 나는 다행히 제일 친한 친구와 한방을 쓰게 됐다. 첫날 우리는 짐을 풀고 놀 거리를 찾아 주변 탐색에 나섰다. 물과 공기는 좋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금 실망했다.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할 수 있는 것은 강에서 고기를 잡아 어죽을 쒀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이마저도 몇 번 해 보지 못하고 죽어라 일만 했다. 농장에서의 생활은 거의 군대 수준이었다. 아침 6시 기상해 7시까지 식사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논밭으로 나가야 한다. 7시30분부터 시작해 모내기, 밭 김매기 등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한다. 중간에 점심과 새참 시간 이외 거의 일을 한다. 끝나는 시간은 따로 있지 않다. 날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매일 반복됐다. 도시에서 고된 농사일을 하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이로 인해 앓아 누운 친구도 있었고, 집으로 도망가는 친구도 생겨났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핀다. 힘든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더욱 애틋하다. 보통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비해 일을 잘하는 편이다. 몇 천 평 되는 옥수수 밭에서 김을 매게 되면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먼저 끝낸다. 먼저 끝낸 남학생들은 평소에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여학생을 도와준다. 주변에서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목소리로 그 친구들을 놀려댄다. 하루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 여학생은 맛있는 간식을 가지고 남학생에게로 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잘될 수도 있지만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때도 있다. 농촌지원은 남녀뿐만 아니라 학급 전체를 단결시켜 준다. 힘든 일을 함께 겪으면서 새로운 우정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가을 농촌지원은 봄에 비하면 쉬운 편이다. 또 상대적으로 먹을 것도 많다. 봄의 경우 농촌에서는 식량 사정이 어렵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의 식탁도 풍족하지 못하다. 물론 학생들이 식량을 가져가긴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농장들에서 조금씩 도와줘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 가을 농촌지원은 주로 옥수수 수확과 벼 베기다.
 
 
  北 학생이 가져야 할 중요한 마음 ‘충성심’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동상 앞에 주민들이 꽃다발을 놓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북한 당국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충성심’에 대한 요구가 가장 크다. 충성심의 시작은 ‘정성사업’이다. 매일 아침 등교 이후 교실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먼지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그리고 학교에 걸려 있는 김 부자의 대형 사진과 교시판을 학급별로 돌아가면서 청소를 해야 한다. 북한 학교들에는 교실에 있는 김씨 일가의 초상화 이외에 학교와 관련된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다. 또 김씨 부자가 학생과 관련해서 내린 지시들을 대리석에 새겨 벽에 붙여 놓은 것들이 수십 개가 된다. 이것을 모두 닦아야 한다. 청소가 끝나면 담당 교사가 흰 천을 들고 다니면서 청소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검사한다. 여기에 통과되지 못하면 다시 또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이후 청소를 해야만 한다. 이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증오는 선생님이 아니라 김씨 일가에 대한 원망으로 번진다. 이런 날이면 가끔 몰래 들어와 사진과 교시판들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만약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다 걸리면 그날로 우리 가족은 끝장난다.
 
  정성사업으로 학교뿐만 아니라 시 곳곳에 있는 김씨 일가의 동상과 관련 대형 조형물을 쓸고 닦아야 한다. 특히 회령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고향이다. 이 때문에 다른 도시보다는 쓸고 닦을 곳이 더욱 많다. 먼저 김정숙이 태어났다는 고향집과 주변 동상, 역사박물관, 어릴 때 뛰어놀았던 곳 등등 여러 곳이 있다. 특히 우리 학교가 시내 중심이어서 김정숙 관련 모든 곳을 청소해야 한다. 눈이 오면 눈을 치우고, 비가 오면 나뭇잎 등을 쓸어내야 한다.
 
  명절이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 반 담당 구역은 김정숙의 고향집이다. 아침이면 이곳에 모여 청소를 한 다음 다 같이 모여서 학교로 들어온다. 만약 겨울이면 거의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고향집 주변에 눈이 쌓이면 안 된다. 눈이 오면 고향집으로 나가 눈을 치워야 한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할 때도 있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나가서 나뭇잎을 쓸어 내곤 했다.
 
  이와 관련,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소학교 시절 우리 반 친구 중 한 명이 중앙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솔직히 소학교 학생이 시도 아니고 중앙당 표창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웬만해서는 중앙당 표창을 받지 못한다. 얼마 후 그 친구는 표창을 받게 됐고 이유도 알려졌다.
 
 
  김씨 일가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족쇄가 된 조선소년단
 
  이 친구에겐 누나가 2명 있었다. 이들 남매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 김정숙 동상 주변을 청소했다. 하루는 중앙당 간부가 회령에 내려왔다가 이 모습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간부는 아침 일찍 김정숙 동상을 청소하는 이들을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 없이 김정숙 동상을 청소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간부는 중앙당으로 올라가 곧바로 이들에 대한 표창을 준비했다. 이 일로 친구의 가족들은 표창을 받고 평양 견학도 다녀왔다. 이후 학교에서 우수학생으로 좋은 일에 항상 맨 앞에 섰고, 조선소년단에도 제일 먼저 가입했다.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소년·소녀가 문 대통령 내외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들은 조선소년단원들이다. 조선소년단은 1946년 6월 6일에 창립된 북한의 소년 단체다. 남한의 보이·걸스카우트와 비슷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흰색 상의와 붉은색 넥타이가 이들 조선소년단의 상징이다. 조선소년단은 구소련, 공산권 국가에 있는 소년단 조직 ‘피오네르(pioneer)’의 일종이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경례를 하는 모습과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피오네르 소속 소년·소녀들의 모습과 같다.
 
  조선소년단 가입은 소학교 2학년(9살)이다. 소년단엔 4차례 걸쳐 가입 기회가 주어진다. 제일 처음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이고 그 다음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조선소년단 창립절인 6월 6일, 김정숙 생일인 12월 24일 순이다. 시기를 놓고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도 벌어진다. 순전히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통해 조선소년단 조직에 명단이 올라간다. 부모들은 자식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선생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한다. 뇌물에 따라 이름이 몇 번째 올라가는지 결정이 된다. 물론 모든 것이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이를 통과하면 소년단원이 알아야 할 원칙들을 외워 검사를 받는다. 한마디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 맹세다. 이후 6년간 소년단원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조직생활을 통해 김씨 일가를 위해 충성을 강요하는 족쇄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11-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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