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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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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출신 《월간조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2]
한 소년에게 첫 기억이 된 김일성 사망

⊙ 집안 출신 때문에 꿈마저 포기하는 북한
⊙ 북한의 선물 정치 세뇌교육의 첫 단계
⊙ 김일성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 사건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 2011년 12월 17일 북한 리춘희 조선중앙방송 아나운서는 김정일 부고를 발표하고 있다.
  ‘자유를 찾아가는 죽음의 길 탈출’ 연재가 나가고 나서 글을 잘 읽었다는 전화가 왔다. 나보다 더 힘들게 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연재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연재를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18살의 어린 소년의 북한 삶을 통해 조금이라도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걸로 나의 연재는 성공했다고 본다.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 연재다. 이번 호에는 기억에 대해 써 볼까 한다. 누구나 태어나서 첫 기억이 있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시기는 다르지만 대부분 행복·불행·충격적인 사건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의 첫 기억은 1994년 7월 9일 김일성의 죽음이다.
 
  이날 우리는 휴가 중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수송반(자동차 회사) 직원들과 가족들이 모두 소풍을 떠났다. 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김일성 사망 전까지는 주민들의 생활이 괜찮은 편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 배급이 나왔고, 노임(월급)도 정상적으로 지급됐다.
 
 
  심각한 표정의 안전원 “당의 중대발표 있다”
 
  이른 아침 우리는 다른 가족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소풍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2시간 남짓 달려 함경북도 회령시 창효리에 도착했다. 그곳엔 넓은 저수지가 있어 가까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소풍을 자주 오곤 했다.
 
  우리는 강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낚시하러 나갔고, 여자들은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물가에서 뛰어놀았다. 정말 즐거웠다. 오랜만에 나온 소풍이었고, 맛있는 고기를 먹을 생각에 더욱 신났다. 그러나 그 달콤한 시간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저 멀리에서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때 쯤 우리는 놀랐다. 창효리 안전원(경찰)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동무네 어디서 왔네?”라고 물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답했다. 안전원은 숨을 가다듬고 “지금 당장 짐 싸서 돌아가라. 당에서 중대발표가 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9살 소년 ‘안전원’이라는 꿈을 포기하다
 
북한 안전원.
  북한에서 안전원이라는 직업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국가안전보위성이 그 위에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주민 통제는 안전부에서 한다. 나도 어린 시절 안전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9살에 그 꿈을 접었다. 북한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 그 집안 출신 배경을 우선시한다.
 
  당시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는 이랬다. 1997년 추석으로 기억한다. 군복무 중이던 막내 삼촌이 휴가를 받고 집에 왔다. 제대를 앞둔 삼촌은 입당(조선노동당 가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음식을 준비해 산소에 갔다. 성묘를 마치고 둘러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먹었다.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삼촌이 머뭇거리면서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했다.
 
  삼촌: “아버지 우리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삼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할아버지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그거이 갑자기 왜 물어보네?”
 
  삼촌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입당을 앞두고 하루는 부대 정치지도원(북한 군부대에서 당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 호출로 사무실로 갔다. 그가 삼촌에게 문서 하나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는 우리 집안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위에 빨간 글씨로 ‘적대계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한에선 주민들을 계층별로 분류한다. 크게 3가지 계층이 있다.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순이다. 핵심계층은 해방 전 김일성과 함께 싸운 사람들과 그 자녀들, 6·25 전쟁 당시 북한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동요계층은 일반 주민이라고 보면 된다. 적대계층은 지주나 자본가의 자녀나 월남 인사가 있는 가족, 또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반대되는 사람들이다. 적대계층에 들어가게 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 자손들까지 출세를 하지 못하고 평생 힘든 노동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적대계층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말아 피우시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얘기는 이랬다. 집안 대대로 평양 중심부에서 살았지만 할아버지 동생, 즉 나의 작은할아버지로 인해 함경북도 산골짜기로 추방당했다. 1950년대 김일성이 반대세력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시기 작은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몰래 소련(러시아)을 다녀왔다. 당시 작은할아버지의 친구들은 소련파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와 친구들은 무사히 다녀왔다. 이후 친구 중 한 명이 북한 정권에 발각되면서 작은할아버지도 감옥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던 작은할아버지는 감옥에서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 일로 인해 당시 평양중앙검찰소(한국의 검찰청)에서 고위직에 종사하시던 할아버지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온 가족이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추방당했다.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된 집안
 
  작은할아버지는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1955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대부분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문 받았다. 귀국한 김일성은 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한 연설이 공개되자 김일성은 3차 당대회를 앞두고 비공개 석상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가 과도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을 해야만 했다. 개인숭배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에둘러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벗어나 동유럽과 이른바 비동맹 외교를 추진하려는 계획을 확정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이 위기에 몰려 있다고 판단하고 망설였던 계획을 꺼내 들었다.
 
  김일성이 동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의 당 위원장 자리를 박탈하고 내각총리만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계획이었다. 김일성을 실각시킨다는 것도 아니고 권한을 일부 제한한다는 계획을 합법적인 방법, 즉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결정한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우선, 연안파와 소련파가 합작을 했지만 중앙위원회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일성의 만주파와 그에 우호적인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김일성이 외유 중일 때 자신들의 계획을 밀어붙이면 중앙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정세인식 수준이었다.
 
  1956년 8월 2일로 계획되어 있던 중앙위를,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자 강행하지 못하고 8월 30일로 연기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이 안건에도 없는 정치연설을 통해 김일성의 경제정책 오류와 개인숭배를 비판했지만 강제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8월 중앙위 전원회의)이라고 부르는 이 반나절의 에피소드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영원히 사라졌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우리 집안이 평양에서 살다 내려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추방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삼촌도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이후 할아버지는 명예회복을 위해 중앙당에 상소 편지도 보냈고,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해 직접 소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북한정권은 할아버지를 평양으로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한다.
 
  얼굴도 보지 못한 작은할아버지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인해 한 소년은 꿈을 포기해야 했다. 적대계층의 집안은 대대손손(代代孫孫) 출세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북한 사회 원리를 너무 일찍 알게 된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공부를 시켜 좋은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족이 탈북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한에 정착해 아버지는 “니들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당신이 겪은 수모와 고통의 고리를 자식들 대에 끊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사망
 
김정은 사망 소식을 들은 북한 주민들이 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안전원의 명령에 따라 짐을 챙겨 돌아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울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는 도착하기 바쁘게 각자 집으로 향했다. TV에서는 이미 김일성 사망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리춘희: “우리의 전체 노동계급과 협동농민들, 인민군 장병들과 청년학생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 급병으로 서거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가족은 서둘러 옷을 차려 입고 분향소를 찾았다. 극장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추모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모두 통곡을 하며 김일성을 불러댔다.
 
  나는 극장 앞에 놓인 김일성 사진 앞에 꽃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앞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옆에서 어른들이 우니까 나도 운 것 같다. 한참을 울다 보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엎드린 채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꼬집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으나 우는 시늉이라도 내야 했다. 나는 분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추모는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어린 나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선물’이었다. 북한 정권은 매년 김일성·김정일 생일에 아이들에게 사탕 과자 등 간식을 선물했다.
 
  나를 비롯한 북한 어린이들은 이 선물을 김일성이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으면 선물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김일성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선물을 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더 눈물이 났다. 선물은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부터 11살까지 모든 어린이에게 제공된다. 이것이 북한의 선물정치다. 아니 세뇌교육의 시작이다. 이렇게 태어나서부터 세뇌교육을 시키면서 김일성에게 충성을 하게 만든다. 이 같은 세뇌교육이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김일성을 신(神)으로 믿게 만들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신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충격에 심장마비로 인해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1994년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북한정권은 이것을 이용해 김일성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 울고 있다고 선전했다. 나는 그 선전을 믿었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 사망 이후 3개월을 애도기간으로 정해 놓고 유희, 오락, 술, 노래 등을 금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숨어 몰래 술을 마시다 걸려 정치범 수용소에 간 경우도 있다. 특히 인민무력부 간부들 중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적발돼 공개처형당한 사례도 있다.
 
 
  김일성 사망 미스터리… 김정일 암살설까지
 
북한 김일성·김정일 부자.
  김일성이 죽은 뒤 북한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다. 김일성이 치료만 받았으면 살 수 있었으나 김정일이 아버지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보니 그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물론 정말 김정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물론 주민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돌았다. 만약 이것이 알려지게 되면 관련자들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소문은 이랬다. ‘김일성이 묘향산 휴양소에서 쓰러졌는데 그때라도 직승기(헬기)를 띄워 평양으로 이송했다면 김일성은 살았을 것이지만 김정일의 지시로 직승기는 뜨지 않았다’는 것이 소문의 전말이다. 근거는 없다. 그냥 당시 북한에서 떠돌아다니던 소문일 뿐이다.
 
  남한에 온 뒤 우연히 2016년 1월호 《월간조선》 ‘김일성 심장 주치의 “김정일(金正日)은 김일성의 죽음을 유도, 방치했다”라는 기사를 보고 놀랐다. 북한에서 소문으로 돌았던 이야기를 기사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기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김일성의 죽음에는 사망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의혹’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 의혹의 중심에 아들 김정일(金正日)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사실상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권력 전면 재(再)등장을 두려워해 모살(謀殺)했다는 것이다. (중략) 김정일은 1974년 2월 13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 정치위원이 된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이 됨으로써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지만,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 사실상 실권을 행사해 왔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북한 관련 정보 소식통들이나 전문가들은 김일성 사망의 배경으로 김일성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사실상 북한을 통치해 오던 김정일이 아버지의 재등장이 가시화하자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왔던 것이다.
 
  기사에 보면 김정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말에 신빙성이 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직후 빠르게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시작했고, 곧바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신이 됐다. 여러 가지 정황을 놓고 보면 김정일이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인해 김일성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날의 기억…
 
  1994년 7월 8일 한 독재자의 죽음. 지금도 가끔 이날의 일들로 인해 악몽을 꾼다. 24년 전 그곳에선 아직도 한 소년이 커다란 영정사진 앞에 엎드려 억지로 울고 있었다. 울어야 했다. 울지 않으면 나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꼬집으면서까지 울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슬프지 않지만 슬픈 척해야 하고, 울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사회. 그곳이 북한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도 죽었다. 북한은 또 다시 특별방송으로 이 소식을 알리고, 남한 언론들은 대서특필했다. 김정일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북한 전역이 또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길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하는 주민, 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에서 김정일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친구가 물었다.
 
  친구: “자기들을 억압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근데 왜 저렇게까지 우는거야? 저게 가능해?”
 
  가능하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가능하다. 설령 슬프지 않아도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그리고 즐겁지 말아야 하면 즐겨서도 안 된다. 또 김씨 일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라고 강요한다. 그곳이 북한이다.(계속)⊙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8-10-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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