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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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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중국에 김정남은 ‘북한판 시아누크’였나

김정일 사망 직후 베이징공항서 마주친 김정남이 한 말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된 김정남. photo 연합
2012년 1월 14일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 제3터미널 게이트 앞. 나는 베이징(北京)의 한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의자에 앉아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왼쪽을 보니 마치 미쉐린 타이어 광고에 나오는 타이어맨처럼 뚱뚱한 남자가 나타나 내 앞을 통과하려던 중이었다.
   
   ‘김정남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10보쯤 걸어 그 뚱뚱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김정남씨 아니냐?” 그는 의외로 선선히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엄청난 양의 땀을 온 얼굴에서 흘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마카오행 출국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던 중 웬 남자가 불쑥 앞을 가로막더니 “김정남씨 아니냐”고 했으니,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여성 2명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가 살해한 정황을 보면, 늘 그런 공포에 시달리던 김정남으로서는 땀을 흘릴 만했을 것이다.
   
   내가 김정남을 만난 그날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한 지 한 달 가까이 되던 날이었다. 그래서 김정남이 자신의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부터 말을 던졌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많이 놀랐나요?”
   
   “아… 네… 자연이죠… 뭐….”
   
   아마도 ‘사람이 한 번 나서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놀라 경황이 없던 터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됐다.
   
   “아버지 장례식에는 다녀왔어요?”
   
   “아… 네… 네, 네, 네….”
   
   그는 명확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장례식에 김정남이 참석했는지 여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이후 김정남이 평양에 가긴 했지만 김정일 시신을 보고 인사만 하고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평양을 떠났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불쑥 마주치자 엄청난 땀 흘리기 시작
   
   김정남은 내가 앉아 있던 서울행 항공기의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방향에 있는 마카오행 항공기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필자는 김정남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서 일본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일본 언론들은 당시 서우두공항에 자기네들 말로 ‘하리코미(현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지키기)’를 하고 있었다. 김정남은 일본 기자들이 영어로 하는 질문에 영어로 대답했는데, 미국식 영어는 아니지만 영어에는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나우 폴리티컬 시추에이션 오브 평양 이즈(지금 평양의 정치적 상황은)…” “더 모스트 임포턴트 팩터 오브 더 퓨처 오브 노스 코리아 이즈 마이 파더즈 디시전(북한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 아버지의 결정)…”.
   
   김정남은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한 명은 베이징 교외의 한 별장에, 다른 한 명은 마카오의 한 아파트에 감추어 두고 베이징과 마카오를 수시로 오가면서 지내고 있었다.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한 것은 쿠알라룸푸르에 세 번째 여자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대사관이 있고,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돼 있는 것을 보면 김정남으로서는 중국의 보호막 바깥인 말레이시아 출입은 삼갔어야 했는데, 결국은 중국의 보호막 바깥으로 나갔다가 변을 당한 셈이다.
   
   중국 외교부는 김정남 피습 이틀 만인 지난 2월 15일 겅솽(耿爽) 대변인이 나서서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김정남이 암살당한 데 대한) 관련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사건의 발전에 밀접한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관련 사건은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했고,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 당국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정남의 처와 아들이 마카오에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대변인인 나로서는) 관련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있다.”
   
   겅솽 대변인의 말은 “김정남의 처와 아들들이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외교부 대변인인 나의 일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들렸다.
   
   중국 정부가 그동안 김정남을 마카오에서 거주하도록 배려해주고 보호해온 데에는 과연 무슨 실익이 있었던 것일까. 김정남은 2001년 5월 4일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일본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면서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미움을 사 마카오에 거주하게 된 이후 중국 관영매체에 다음과 같이 밝힌 일이 있었다.
   
   “중국 정부가 나를 보호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마카오에 거주하는 이유는 마카오가 중국 대륙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마카오가 자유분방한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술을 마시기 좋아하기 때문에 통풍을 앓고 있다. 통풍이 종종 발작하기 때문에 매일 요산 복용제를 먹고 있다.”
   
   중국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주변국(周邊國)’이 모두 14개가 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한반도, 남쪽으로는 인도를 비롯해서 베트남, 미얀마,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있다. 캄보디아도 중국의 주변국 가운데 하나다.
   
   캄보디아 국왕으로서 국가원수이던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4)는 1973년 3월 프랑스를 거쳐 소련을 방문 중이었다. 당시 ‘불교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시아누크는 북베트남이 무기를 조달하던 ‘호찌민(胡志明) 루트’가 캄보디아 국경 내를 통과하고 있던 사실을 묵인해주고 있었다. 3월 18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총리 겸 국방장관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아누크의 국가원수직 박탈을 선포했다. 시아누크는 그 소식을 모스크바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소련 관리로부터 들었다.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 위에서 시아누크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에게는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것이었다.
   
   1973년 3월 19일 베이징공항에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국방장관 예젠잉(葉劍英), 국가주석 리셴녠(李先念)이 나와 시아누크를 영접했다. 저우언라이는 “시아누크 국왕의 중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캄보디아의 국가원수이십니다”라면서 악수를 청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시아누크에게 국빈관 조어대(釣魚臺) 5호루를 통째로 내어주고 시아누크 일행과 가족들이 중국에 장기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에 베이징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마오쩌둥의 내연의 처로, 문화대혁명을 사실상 지휘하던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은 조어대에 숨어살면서 문혁을 조종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때문에 시아누크 일행에게 청왕조 시절 프랑스가 대사관으로 쓰던 건물을 마련해주고, ‘캄보디아 원수부(元首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1975년 8월 캄보디아 국내에서는 키우 삼판이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전국을 장악하는 국면이 조성됐다. 키우 삼판은 베이징으로 사절을 보내 시아누크 국왕을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귀국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시아누크는 귀국 직전 환송식을 베풀어준 덩샤오핑(鄧小平) 앞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제2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 지난 2월 15일 오후 김정남의 시신 부검을 참관한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왼쪽). photo 뉴시스

   중국이 시아누크를 대접한 이유
   
   키우 삼판은 불과 6개월 뒤인 1976년 4월 시아누크의 국가원수직을 박탈하고 왕궁에 유폐시켰다. 그랬다가 1979년 폴 포트가 권력을 잡자 시아누크는 다시 국가원수직을 회복했으나 1994년 아들이 정변을 일으켜 다시 베이징으로 피신했고, 결국은 2012년 10월 15일 베이징에서 90세 인생을 마감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시아누크를 위해 천안문광장의 오성홍기를 반기(半旗)로 게양하는 예우를 해주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자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한국의 이웃으로서 중국은 한국의 국내 정세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국내 정세의 안정을 빨리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탄핵안은 한국의 내정이므로,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캉 대변인은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한국의 대통령이며, 그는 취임 이후 중·한(中韓)관계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집권기간에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에 동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중국 측의 전략안전 이익을 해치는 일이므로 나는 확고하게 반대한다.”
   
   이전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대해 질문을 하면 짤막하게 “우리는 다른 나라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만 말해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는 뭔가 말이 길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으로 관찰해야 할 사항이다.
   
   5년간 시아누크를 망명객으로서 베이징에 데리고 있던 중국은 시아누크가 귀국할 때 “다른 나라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을 생략하고, “캄보디아 인민들이 시아누크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하기를 바란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를 이해하려면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중국 지도자들과 외교부가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김정일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선노동당 주위로 단결하기를 바란다”고 논평한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은 김정일 이외의 인물이 북한을 장악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희망의 표시인 동시에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중국이 김정남을 그동안 보호해온 것은 북한 유사시 북한판 시아누크를 상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2-21 08:52   |  수정일 : 2017-02-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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