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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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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배우면 지식이 되고 사람에게 배우면 지혜가 된다

글 | 진세훈 진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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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시절, 하루에 3시간만 중간에 깨우지 않고 재워주면 1년 내내 혼자서 당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여기서의 당직이란 밤에 근무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밤에 당직서고 낮에 근무도 하는 그런 형태의 병원 당직이다.
 
수술실에서 한 가지라도 더 배우려고 잘 보이지도 않는 맨 뒷자리의 인턴 1~2년차 수련의지만 까치발하며 앞사람 머리와 머리사이, 손등과 손등 사이에서 수술시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졸린 눈을 부릅뜨던 시절 ‘저 수술을 내가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두 번 가져본 적이 아니었다. 불과 2~3년만 지나면 주임교수 수술을 보며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은 터무니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러다 4년차 초가 되면 그렇게 우습게 보이던 수술이 주임교수 명령으로 내 책임 하에 해야 할 때 적잖은 당황스러움을 겪기도 했다. 수술 전 날, 밤새워 수술 공부하고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 하듯 상상수술을 하며 준비했어도 비장할 정도의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것도 순간이다. 4년차 말이 되어 교수님들의 가르침으로 성공적인 수술을 몇 달하고 나면, ‘나같이 수술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1, 2년차 선생들의 아부성 칭찬이라도 한번 들으면 착각이 확신이 되고, 이땐 거의 정신적 극치감에 달한다.
 
이런 착각속에 나의 실력이 저 두꺼운 영어와 컬러그림으로 가득한 원서 덕분이라 믿으며, 내가 공부 열심히 한 결과물이라 여기던 시절에는 ‘외과 의사로서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두꺼운 전공 원서와 열심히 노력한 결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밤새워 당직 서며 수술 부위가 아프다고 쉴 새 없이 불러대는 입원환자를 치료하는 나의 모습과 수술실 한쪽 구석에서 차가운 김밥 한 줄로 아침 겸 점심으로, 또 저녁으로 허기를 때우던 상황과 응급실에서 얼굴이 술병에 난자당하고도 난동부리는 술 취한 환자를 달래고 얼러서 밤새워 꿰매며 아침에 뜨는 해를 응급실 창문으로 맞으며 그 환자가 평온히 잠들어 있는 장면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그나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거의 10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다. 수련과정을 마치고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고 퇴근하던 날 주임교수께서 말씀하셨던 ‘전문의 따고 10년은 수술해봐야 내가 잘하는 수술이 어떤 것이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어떤 수술인가를 알게 된다’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서구의 어떤 인문학자가 컵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림을 보고 재질을 설명하고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을 보는 것이 컵을 직접 만지고 눈으로 본 것의 20% 정도 밖에 정보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컵을 직접 만지고 눈으로 보았다 하드라도 컵을 직접 만들어 본 것과 비교하면 또 20% 정도밖에 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컵을 직접 만들어 본 사람과 그림과 책의 설명으로만 이해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리 그동안 치료하기 어려웠던 깊은 주름과 함몰흉터 수술방법을 새로 개발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여 인정받고 성형외과학회 학술 심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하드라도 지금 성형외과전문의로서 진료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영어로 가득찬 책이 아니라 많은 교수님, 그리고 주변의 많은 분들, 심지어 응급실에서 싸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난동 부리던 환자들의 도움도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책에서 배우면 지식이 되고 사람에게 배우면 지혜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7-06-13 15:32   |  수정일 : 2017-06-1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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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진세훈 진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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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 2017-06-13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0
산행을 하며 먼 산위의 운해를 보다가도 시선을 돌리면 발끝에 있는 작은 꽃들이 보입니다. 기술보다 성심으로 터득한 경지에 부럽다는 말을 남기고 갑니다.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작은 꽃들을 가꾸는 마음을 오래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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